2화
‹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코를 찌른 건 마른 풀과 밀랍 냉기가 섞인 냄새였는데, 응급실 특유의 알코올 냄새에 익숙해져 있던 코가 그 낯선 조합을 받아들이지 못해 잠시 헛기침을 했다. 천장은 나무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구조였고, 그 사이로 걸린 백색 천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빛을 부드럽게 걸러내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새소리인지 벌레 소리인지 모를 낯선 울음이 이어졌는데, 그 소리마저도 이곳이 서울이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 확인시켜주는 것 같았다. '아, 그러니까 나는 아직 안 죽었구나.' 속으로 그렇게 결론을 내리는 동시에 팔을 들어 올려보려 했지만, 손끝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다시 이불 위로 떨어뜨렸다. 회사에서 밤샘 야근 세 번 한 것보다 더 지독한 몸살이었다. 관절 하나하나가 녹슨 기계처럼 뻐근했고, 목을 조금만 돌려도 뒷골이 당겼다. 이 정도면 산재 처리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애초에 이 세계에 노동청이 있을 리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실없는 생각을 접었다.
그때 방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리고, 작은 체구의 소녀가 쟁반을 든 채 들어왔는데, 나를 발견하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쳤다. "어머, 정말 깨어나셨네요!" 목소리에 장난기가 잔뜩 배어 있었고, 이 소녀가 바로 어제 어렴풋이 기억하는 그 시종, 미소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였다. 그녀는 쟁반을 들고도 발걸음이 가벼워서, 마치 이 상황 자체가 재밌는 구경거리라도 되는 양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몸은 좀 어떠세요? 아저씨는 사흘을 통째로 잠만 잤어요." 사흘. 그 말에 나는 순간 머릿속으로 날짜 계산을 하려다가, 애초에 이 세계에 요일 개념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서울이었다면 사흘이나 무단결근했으니 인사팀에서 벌써 전화 폭탄을 돌렸을 텐데, 여기선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게 묘하게 후련하면서도 서글펐다. "사흘이나… 그럼 밥은 못 먹었겠군." 능청스럽게 대꾸하자 미소가 픽 웃으며 쟁반을 침대 옆 탁자에 내려놓았는데, 그 위엔 김이 오르는 죽과 말린 과일 몇 조각이 놓여 있었다. 향은 낯설었지만 배 속에서 요란하게 신호를 보내는 걸 보니 몸은 이 세계에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이건 뭘로 끓인 거요? 냄새가 묘하게 고소한데." 내가 묻자 미소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산에서 나는 뿌리랑 곡물을 같이 넣은 거예요. 몸보신에 좋다고 해서 특별히 부탁했어요." 몸보신이라니, 어감이 마치 한의원에서 들을 법한 표현이라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죽을 반쯤 넘겨 삼켰을 무렵, 손끝의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숟가락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래도 스스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때 문이 다시 열리며 이번엔 다른 인물이 들어왔다. 열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였는데, 은은한 푸른빛이 도는 눈동자와 정갈하게 땋아 넘긴 머리, 그리고 걸음걸이마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가 한눈에도 보통 상인의 딸과는 다른 격을 드러내고 있었다. 옷차림 역시 화려하진 않았지만 옷깃 끝까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서,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쓰는 사람이라면 성격도 만만치 않을 거라는 생각이 스쳤다. "강도현 님이시죠. 저는 윤서린이라 합니다. 윤태호의 딸입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발음 하나하나가 또렷해서, 오히려 그 절제된 어조가 사람을 위축시키는 데가 있었다. '이 나이에 저런 태도라니, 우리 회사 임원들보다 더 무게감이 있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속으로 굴리면서도 짐짓 여유로운 투로 인사를 받았다. "강도현이오. 신세를 많이 지고 있구먼." 그녀는 옅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침대 옆 의자에 조용히 앉았고, 미소는 눈치껏 쟁반을 챙겨 방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 안엔 순식간에 다른 종류의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곳은 선월국입니다. 남쪽으로는 대연제국과 경계를 마주하고 있고, 서쪽은 산맥으로 막혀 있어 실질적으로 대연제국의 그늘 아래 놓인 소국이지요." 그녀의 설명은 마치 미리 준비해 둔 보고서를 읽는 듯 매끄러웠다. 한 문장씩 끊어질 때마다 억양의 변화조차 거의 없어서, 나는 이 소녀가 이런 설명을 얼마나 많이 반복해왔을지 궁금해졌다. "제국의 눈치를 살피며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나라라는 뜻이오?" 내가 되묻자 그녀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국경 지역에서는 이미 제국군의 순찰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조세권조차 일부는 제국에 위임된 상태입니다." "그럼 이 저택도 온전히 안전한 곳은 아니란 소리군." 내 말에 그녀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들어 올렸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게 맞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은 이 나라의 앞날이 그리 길지 않다고 판단하셨습니다. 그래서 대연제국으로의 망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망명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나는 숟가락을 든 채로 잠깐 멈추었는데, 이건 단순히 아픈 몸을 회복시켜주는 자선사업이 아니라는 게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역시 세상에 공짜 밥은 없지.' 세상 어디를 가도 밥 한 그릇에는 값이 붙어 있다는 걸 다시 확인한 셈이었다. "그런데 그 계획에 내가 왜 필요한 거요?" 질문을 던지자 그녀의 눈빛이 아주 잠깐, 정말 짧게 흔들렸다가 다시 평온해졌다. 그 짧은 균열이 오히려 그녀가 하려는 말의 무게를 짐작하게 만들었다. "신족 강림지에서 발견되셨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대연제국 황실의 이목을 끌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나는 헛웃음이 나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서울에서 회사원으로 살다가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인간이 어느 날 신족 후보가 되어 있다니, 이건 이력서 경력란에 뭐라고 적어야 할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특기란에 '익사 직전 이계 강림'이라고 적으면 면접관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신족은 오래전 이 대륙에 강림했다고 전해지는 존재들입니다. 그 혈통이 옅게라도 남아 있는 이는 대연제국 황실에서 특별한 예우를 받습니다." "그럼 그 혈통이란 게 눈에 보이는 무슨 표식 같은 게 있는 거요?" 내가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는 드뭅니다. 대개는 강림지 근처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정황 증거로 취급됩니다." "그러니까 증명할 방법은 마땅치 않다는 거군. 그럼에도 다들 그걸 믿는다는 게 신기하구먼." 내 말에 그녀는 처음으로 아주 옅게 입꼬리를 움직였는데, 그게 웃음인지 비웃음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믿음이란 본래 증명보다 필요에서 시작되는 법입니다." 그 대답이 묘하게 날카로워서, 나는 이 소녀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은 걸 알고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이어서 자신의 모친 역시 그 혈통의 일부를 이었다는 것까지, 정보는 담담하지만 무게 있게 쌓여갔다. '그러니까 나는 신분 세탁용 낙하산인 셈인가.' 나는 그 결론에 도달하면서도 겉으로는 흥미로운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는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거요? 대충 신족 흉내라도 내야 하나?" 짐짓 가벼운 투로 물었지만 속으로는 이 질문의 답이 결코 가볍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잠시 침묵했는데, 그 침묵이 오히려 어떤 대답보다 더 많은 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이야기가 한창 이어질 무렵, 문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미소가 다시 뛰어들어와 편지 한 장을 윤서린에게 내밀었다. 숨을 몰아쉬는 걸 보니 꽤 급하게 뛰어온 모양이었다. 그녀는 봉인을 뜯어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는데, 그 절제된 얼굴에서 처음으로 감정의 균열이 보였다. 종이를 쥔 손끝이 미세하게 힘을 준 것도 눈에 들어왔다. "도시주의 아들, 장가온이 만찬에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저와… 강도현 님을 함께 부르는군요."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고, 미소마저 눈치를 보며 슬쩍 뒷걸음질을 쳤다. 나는 그 이름을 곱씹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벌써 시작인가.' 사흘 만에 눈을 뜬 몸으로 낯선 이름의 초대장을 받는다는 게, 이 세계가 나를 봐주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뜻처럼 느껴졌다. 윤서린은 편지를 접어 소매 안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그 짧은 동작 사이로 나는 그녀의 눈동자가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계산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준비하실 게 많습니다. 오늘 안으로 다시 뵙겠습니다."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섰고, 나는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다시 이불 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죽 그릇은 이제 다 식어 있었지만, 배 속의 허기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저 초대장 뒤에 감춰진 무언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