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내 피 속 백만 생령

5화

몸을 일으키는 데는 예상보다 훨씬 큰 힘이 들었는데, 옆구리의 상처가 이미 지혈된 것처럼 보이면서도 근육 하나하나가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게 늘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끝에 힘을 줘봤지만 감각이 반쯤밖에 돌아오지 않았고, 그마저도 저릿저릿한 통증이 전기처럼 스쳐 지나갔다. '방금 그 백색 공간이 꿈이었나, 아니면 죽음 직전에 뇌가 보여준 마지막 서비스였나.' 그 새하얀 방과 목소리, 뭔가 중요한 걸 알려준 것 같은데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게 더 억울했다. 마치 시험 전날 밤새 외운 걸 시험지 앞에서 새까맣게 잊어버린 기분이랄까. 그런 생각을 정리할 여유는 없었다. 마차 잔해 밖에서 다가오는 발소리는 이제 넷, 다섯 정도로 늘어나 있었고, 흙을 밟는 소리와 갑옷이 스치는 금속성이 섞여 들려왔다. 그중 하나가 낮게 명령하는 목소리로 무언가를 지시하는 게 들렸다. "안에 확인하고 끝내라." 그 말투에는 감정이랄 것이 없어서, 오히려 더 서늘하게 느껴졌다. 사람을 죽이는 일을 물건 정리하듯 말하는 저 태연함이야말로 진짜 무서운 거 아닌가. "서린 아가씨, 도련님을 데리고 왼쪽으로." 낮게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마차를 몰던 마부였다. 그는 팔 한쪽이 완전히 꺾여 있었으면서도 다른 손으로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 검 끝이 바닥을 짚을 때마다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는데, 그게 두려움 때문인지 출혈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저는 시간을 벌겠습니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정도로 순진한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윤태호가 뒤늦게 마차 잔해 사이에서 몸을 빼내며 헐떡였는데, 그 뚱뚱한 몸으로 여기까지 버텨낸 것 자체가 놀라웠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턱을 타고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숨소리는 마치 낡은 풀무처럼 거칠었다. "자네, 살아 있어야 하네. 자네가 죽으면 내가 뭘 증명하겠나." 나는 반사적으로 그렇게 말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격려였다. 사람 목숨을 담보로 증거 운운하다니, 이건 격려가 아니라 협박에 가까운 거 아닌가. 마부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웃음에는 이미 결심이 서 있는 자의 여유마저 배어 있었다. "살아서 뭘 더 하겠습니까. 뛰십시오." 그 순간 검은 인영 하나가 마차 잔해를 뛰어넘으며 들이닥쳤고, 마부가 검을 들어 그것을 막아섰다. 쇳소리가 밤공기를 찢으며 울렸고, 그 여운이 귓속에서 한참 맴돌았다. 나는 윤서린의 손을 붙잡은 채 그대로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고,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는데, 겉으로는 침착한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얼마나 떨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발밑에서 부서진 마차 파편이 신발 밑창을 뚫고 들어오는 통증쯤 지금은 사치스러운 감각이었다. 윤태호는 헐떡이며 뒤를 따라왔는데, 그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는 걸 들으면서도 나는 속도를 줄일 수 없었다. 저 몸으로 언제까지 버틸까 하는 걱정과, 버텨주지 않으면 셋 다 여기서 끝이라는 계산이 동시에 머릿속을 오갔다. 등 뒤에서 다시 한번 마부의 외마디 신음이 들렸고, 나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굳이 확인하지 않기로 했다. 확인하는 순간 발이 멈출 것 같았고, 발이 멈추면 정말로 끝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숲의 경계로 접어들자 나뭇가지가 얼굴을 긋고 지나갔고, 뺨에 얕은 상처가 나면서 따끔한 감각이 번졌다. 발밑의 지형이 급격히 험해지면서 세 사람 모두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나뭇잎이 발밑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는데, 이 밤중에는 그 작은 소리조차 추격자들에게 위치를 알려주는 신호가 될 것 같아 신경이 곤두섰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윤서린이 처음으로 숨을 몰아쉬며 말했는데, 그 절제된 목소리마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상황의 심각성을 더 실감케 했다. 평소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어디로 가야 할지 아는가?" 내가 묻자 윤서린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그 짧은 동작에서마저 답답함이 배어 나왔다. "이 지역 지형은 저도 낯섭니다. 다만, 추격자들이 대로를 따라 움직일 테니 산길로 붙는 편이 낫습니다." 나는 그 판단에 딱히 반박할 근거가 없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화려한 전략이 아니라 그냥 살아남는 것, 그거 하나였다. 전략이니 계책이니 하는 건 목숨이 붙어 있어야 세울 수 있는 사치품이었다. 윤태호는 뒤를 돌아보며 숨을 헐떡였는데, 그의 눈빛에는 두려움과 동시에 계산이 뒤섞여 있었다. 저 나이에, 저 체구로 지금까지 도망친 것만도 대단한 건데, 저 와중에도 머리는 계속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저들이 원하는 건 나와 내 딸의 목숨이지, 자네는 아닐 수도 있네." 그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나는 픽 웃고 말았다. 이 판국에 남 걱정을 하는 척 자기 살길을 트는 저 화법이라니, 정말 몸은 이렇게 둔한데 잔머리는 어디서 저렇게 빨리 돌아가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럼 저 혼자 도망가라는 말씀입니까, 어르신? 그러기엔 제가 너무 정 없이 이용당해서 억울한데요." 이 와중에도 농담이 나오는 걸 보면 나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인간인가 싶었다.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순간에도 실없는 소리가 튀어나오는 걸 보면, 전생이든 이번 생이든 근본은 안 바뀌는 모양이었다. 윤태호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는데,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 그 태도가 오히려 더 정직해서 웃겼다. 저런 어설픈 발림수는 대체 누구에게 배운 걸까 궁금할 정도였다. 한참을 그렇게 산길을 오르던 중, 발밑의 흙이 갑자기 푹 꺼졌다. 발바닥에 닿아 있던 단단함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 감각은, 짧은 순간이었음에도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울 만큼 선명했다. 나는 균형을 잃으며 앞으로 쏠렸고, 윤서린의 손을 붙잡은 채로 그대로 미끄러지듯 아래로 떨어졌는데, 낙하하는 짧은 순간에도 머릿속은 이상하게 냉정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이 스치는 사이 등이 무언가에 세게 부딪혔고, 충격이 등뼈를 따라 정수리까지 울렸다. 충격이 지나간 뒤에야 나는 우리가 지하로 이어진 어떤 구멍으로 떨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눈앞이 잠시 흐려졌다가 다시 초점이 맞춰지는 그 짧은 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윤태호가 뒤늦게 구멍 위에서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목소리가 점점 초조해지는 걸로 봐선 위쪽 상황도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가 떨어진 곳은 단순한 흙구덩이가 아니었다. 벽면을 이루고 있는 것은 다듬어진 돌이었고, 표면은 오랜 시간 손질된 것처럼 매끈했으며, 습기가 배어 있어 손을 대면 차갑고 축축한 감촉이 느껴질 것 같았다. 그 표면에는 옅게 빛나는 은빛 문양이 반원형으로 새겨져 있었는데, 그 형태가 어딘지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거, 처음 발견됐을 때 근처에 있던 그 문양 아닌가.' 그 문양의 곡선 하나하나가 낯설면서도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을 자극했다. 나는 상처의 통증을 잊은 채 그 문양을 바라보았고, 윤서린 역시 숨을 죽인 채 벽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문양의 한 지점에 오래 머무는 걸 보면서, 저 사람도 뭔가 짐작하는 게 있구나 싶었다. "이곳은……"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위쪽 구멍에서 낯선 발소리가 다가오는 게 들렸다. 흙을 밟는 소리와 함께 낮은 목소리들이 서로 뭔가를 주고받는 게 들렸는데, 그 톤이 확신에 차 있었다. 추격자들이 우리가 떨어진 지점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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