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단 한 번의 소환

3화

새벽빛이 창틀 사이로 스며들었다. 얇고 창백한 빛이었다. 방 안의 먼지가 그 빛줄기 속에서 천천히 떠다니고 있었다. 도원은 눈을 떴다. 몸이 무거웠다. 팔다리가 물에 젖은 솜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어젯밤 절벽에서의 일이 아직 몸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손바닥이 뜨거웠다. 펼쳐 보았다. 붉은 탑 문양이 그대로 있었다. 어제보다 흐릿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선 하나, 점 하나, 위로 뻗은 뾰족한 형상까지 그대로였다. 손끝으로 살짝 눌러보았다. 미열이 느껴졌다. 마치 안에서 무언가가 아주 얕게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았다. 들숨과 날숨의 간격이 사람의 것과는 조금 다른, 느리고 낮은 박동이었다. 도원은 그 박동에 손끝을 대고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밖에서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어 누군가의 발소리. 부엌에서 그릇 부딪는 소리도 났다. 마을이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요아의 창문이 떠올랐다. 어젯밤에도 어두웠다. 지금도 어두울 것이다. 도원은 몸을 일으켰다. 목덜미가 뻐근했다. 이불을 걷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문지방을 넘는 순간 다시 손바닥이 저릿하게 울렸다. 도원은 잠시 멈춰서 손을 접었다가 펴 보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 착각이었을까. 밖으로 나갔다. 마당에 촌장이 서 있었다. 지팡이를 짚은 채로. 등이 더 굽어 보였다. 어젯밤 그 일 이후로 하룻밤 사이에 십 년은 더 늙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눈가에는 자지 못한 사람의 붉은 기운이 남아 있었다. "몸은 어떠냐." "괜찮아요." 촌장은 도원의 손을 잡아 펼쳤다. 문양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눈빛이 흔들렸다. 주름진 손가락이 문양의 가장자리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혹은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듯한 손짓이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음." "이게 뭔지 아세요?" 촌장은 손을 놓았다. 지팡이를 고쳐 짚었다. "오늘은 아이들을 모아 놓았다. 가서 인사를 나누어라." "왜요?" "신제 의식이 끝났으니, 이제부터는 너희가 이 섬을 지킬 힘이다." 짧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 속에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도원은 그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지킬 힘이라는 말이 마치 자신에게는 조금 비껴가는 말처럼 들렸다. 손바닥의 그림 하나로 무엇을 지킨다는 것인지, 도원은 짐작할 수 없었다. 촌장은 몸을 돌려 걸어갔다. 지팡이 끝이 흙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도원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마을 중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길가에는 몇몇 어른들이 나와 있었다. 빗자루를 든 아주머니가 도원을 보더니 잠시 손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이내 시선을 피하고 다시 마당을 쓸었다. 그 짧은 눈빛 속에 무엇이 담겨 있었는지, 도원은 알 수 없었다. 마을 중앙 공터에는 여섯 살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여덟 명. 어제 함께 절벽에 섰던 아이들이었다. 요아가 없어 아홉이 아니라 여덟이었다. 아침 햇살이 공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흙바닥 위로 아이들의 그림자가 짧게 드리워져 있었다. 아이들은 팔뚝을, 손목을, 어깨를 서로에게 들이대며 자랑하고 있었다. 웃음소리가 담을 넘어 퍼졌다. "봐. 이게 내 거야." 남성(南笙)이 팔뚝을 걷어 보였다. 번개 모양의 굵은 선 문양이었다. 어제 밤 마을을 덮친 생물체 앞에서 스스로 팔을 부풀렸던 그 문양이었다. 문양 주변으로 옅은 정전기 같은 불꽃이 파직 하고 일었다가 사라졌다. "나는 힘이야. 한 시간 동안 팔이 몇 배로 커져." "거짓말. 진짜 커지는 거 봤어?" "봤다니까. 어제 그 검은 거 밀어낼 때 봤잖아." 다른 여자아이가 발뒤꿈치를 들어 보였다. 발바닥에 파도 모양의 문양이 있었다. 아이는 옆에 놓인 물동이 위로 살짝 발을 얹었다. 물이 튀지 않았다. 발바닥이 물 표면에 살짝 눌려 있을 뿐이었다. "나는 물 위를 걸을 수 있어. 아까 해봤어. 안 빠졌어." "연못에서?" "응. 오리처럼 둥둥 뜨는 게 아니라 진짜로 걸었어. 발이 안 젖었다니까." 또 다른 남자아이가 눈을 크게 떴다. 산봉우리 쪽을 가리키며 손가락을 뻗었다. "나는 멀리 보여. 저 산꼭대기에 있는 나무 잎사귀 개수도 셀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세 봐." "음… 잠깐, 다시 보자." 아이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가 공터를 채웠다. 서로의 능력을 확인하며 들떠 있는 얼굴들이었다. 하나같이 눈에 보이는, 손에 잡히는, 즉시 쓸 수 있는 힘들이었다. 어떤 아이는 돌을 손으로 만져 순식간에 뜨겁게 데웠고, 어떤 아이는 바람을 일으켜 흙먼지를 둥글게 말아 올렸다. 각자의 힘을 서로에게 보여주며 감탄과 놀림이 뒤섞였다. 도원은 조금 떨어진 곳에 조용히 서 있었다. 손바닥을 옷 속에 감춘 채였다. 소맷자락을 꽉 움켜쥔 손끝이 조금씩 저려왔다. 남성이 다가왔다. 어젯밤 물었던 질문을 다시 던졌다. "어젯밤 그 빛, 네 손이었지." "응." "어떤 능력이야?" 도원은 잠시 머뭇거렸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빛이 났다는 것 외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다시 쓰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모르겠어." "모른다고?" 남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팔뚝의 문양이 다시 한번 파직 소리를 내며 옅은 빛을 냈다. "그럼 그때 빛은 뭐였어." "바다 쪽으로 손을 뻗었더니, 빛이 나왔어. 그게 그 검은 걸 밀어냈어." "그게 다야?" "응." "한 번밖에 안 써본 거야?" "응." 남성은 팔을 걷은 채로 팔짱을 꼈다.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그 표정 뒤로 다른 아이들도 하나둘 모여들었다. 도원의 손을 궁금해했다. "보여줘." "그림이라며. 궁금하다." 도원은 잠시 손끝을 옷 속에서 머뭇거렸다. 숨기고 싶었지만, 여덟 명의 시선이 이미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도원은 손바닥을 펴 보였다. 탑 모양의 붉은 문양이 드러났다. 아침 햇살 아래 문양의 붉은 선이 아주 흐릿하게 빛났다. 아이들은 잠시 침묵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문양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한 아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뭐야. 그림이잖아." "움직이지도 않네." "빛만 나는 거야? 그럼 등불이랑 뭐가 달라." "나 저거보다 우리 집 등불이 더 밝을 것 같은데."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발뒤꿈치에 파도 문양이 있는 여자아이도 킥킥거렸다. 산꼭대기를 보던 아이는 아예 배를 잡고 웃었다. 남성은 웃지 않았다. 대신 미묘한 눈으로 도원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비웃음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짙은 것은 의심이었다. "넌 그거 쓸 수 있는 거 맞아? 아까는 겨우 한 번 빛났을 뿐이잖아." 도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능력이 정확히 무엇인지, 다시 쓸 수 있는지, 아니면 그것으로 끝난 것인지. 손바닥을 다시 오므려 접었다. 문양이 손안에 갇힌 채 감춰졌다. "됐어. 그만 놀려." 한 아이가 말했지만, 그 말투에도 웃음이 섞여 있었다. 놀림을 멈추려는 말이 아니라 놀림을 끝맺는 말이었다. 촌장이 다가와 아이들 사이를 갈랐다. 지팡이 끝이 아이들 발 앞의 흙을 두드렸다. "각자의 힘은 각자의 것이다. 비교할 필요 없다." 말은 그랬지만, 아이들의 눈빛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도원을 보는 시선에는 여전히 의아함과 얕은 무시가 섞여 있었다. 몇몇은 이미 관심을 돌려 다시 서로의 능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도원의 존재는 그 원 바깥으로 슬쩍 밀려나 있었다. 공터를 벗어난 뒤 도원은 혼자 걸었다. 발끝이 저절로 요아의 집 쪽으로 향했다. 골목을 두 번 돌고, 낡은 우물가를 지나고, 이끼가 낀 돌담을 따라 걸었다. 걸음마다 흙바닥에서 마른 냄새가 피어올랐다. 흙냄새. 마른 풀 냄새. 어디선가 아침밥 짓는 냄새도 섞여 있었다. 익숙한 골목이었다. 몇 번이고 이 길을 지나며 요아와 함께 걸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골목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요아의 집이 보였다. 창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당의 화분이 며칠째 물을 못 먹은 듯 시들어 있었다. 잎사귀 끝이 누렇게 말라 있었고, 흙은 갈라진 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도원은 그 앞에 오래 서 있었다. 대문 틈새로 안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마루 위에 신발 한 짝이 뒤집힌 채 놓여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요아야." 대답은 없었다. "요아야, 나 왔어."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문풍지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왔다. 손바닥이 다시 뜨거워졌다. 아까보다 더 뜨거웠다. 심장이 뛰는 속도에 맞춰 미열이 점점 짙어졌다. 마치 몸속에서 무언가가 요아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반응하는 것 같았다. 도원은 손을 펴 보았다. 문양의 붉은 선이 아주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반응하듯이. 선 하나가 미세하게 굽어지는 것도 같았다. 착각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작은 움직임이었다. 그 순간, 바람도 없는데 마당의 시든 화분 잎이 살짝 흔들렸다. 도원은 숨을 멈췄다. 분명 아무도 없었다. 대문도 잠겨 있었고, 마당 어디에도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 누군가 지나간 것 같은 기척이 있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고, 발밑에서 올라오는 것 같기도 했다. 도원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골목은 비어 있었다. 담벼락도, 흙바닥도, 모두 그대로였다. 무릎이 살짝 꺾였다. 도원은 그 자리에 웅크려 앉았다. 손바닥을 가슴에 바짝 붙였다. 심장 박동과 손바닥의 미열이 겹쳐서 마치 하나의 리듬처럼 뛰고 있었다. 미열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조금씩 뜨거워지고 있었다. 도원은 웅크린 채로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 순간, 아주 낮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웅— 땅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것 같은, 아주 낮고 긴 울림이었다. 도원의 손바닥 문양이 그 울림에 맞춰 미세하게 붉게 빛났다가 다시 잦아들었다. 도원은 눈을 떴다. 시든 화분의 마른 잎이 다시 한번, 이번에는 더 뚜렷하게, 스스로 몸을 뒤척이듯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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