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단 한 번의 소환

4화

그날 오후, 도원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마을을 벗어났다. 집을 나설 때 손끝이 이미 차가웠다. 겁이 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손끝은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마을 어귀를 지날 때 노파 하나가 그를 불렀다. 도원은 대답하지 않고 걸음을 서둘렀다. 등 뒤에서 노파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신제 의식이 끝난 다음 날, 마을 사람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조심스러웠다. 누구도 요아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마치 그 이름 자체가 금기가 된 것처럼. 절벽으로 가는 길은 좁고 가팔랐다. 어제 신제 의식이 열렸던 그 자리였다. 발밑의 돌들이 어제와 똑같은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아직도 바닥에는 흰 천의 자락이 떨어져 있었다. 붓끝이 닿았던 그 땅. 도원은 걸음을 멈추고 그 천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손을 뻗어 만져보았다. 젖어 있었다. 밤새 내린 이슬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천을 쥔 손끝이 다시 차가워졌다. 절벽 끝에 섰다.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어젯밤 검은 생물체가 솟아올랐던 자리였다. 지금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잔잔했다. 파도 소리만 낮게 깔려 있었다. 바람에 실려 오는 소금기가 코끝을 스쳤다. 어제와 같은 바다였다. 어제와 같은 절벽이었다. 그런데도 도원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는 절벽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물결이 검게 반짝였다. 어젯밤 그 생물체가 삼켜버린 어둠이 아직 그 물속에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착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도원은 눈을 뗄 수 없었다. 손바닥을 펼쳤다. 문양이 여전히 뜨거웠다. 점. 선. 물결. 탑. 문양의 모양은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만질 때마다 그 열기가 손목을 타고 팔뚝까지 번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요아야." 대답이 없었다. 파도 소리만 되돌아왔다. 도원은 다시 한 번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러나 도원은 알았다. 이곳이라면, 무언가 다를 것이라고. 신제 의식이 벌어진 그 자리, 요아가 사라진 바로 그 절벽이라면. 그는 손바닥을 절벽 쪽으로 향했다. 문양이 미세하게 붉어졌다. 심장 뛰는 소리가 손끝까지 전해졌다. 두근. 두근. 그 박동이 손바닥의 문양과 같은 리듬으로 뛰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문양이 도원의 심장을 대신 뛰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웅— 낮게 울리는 소리가 났다. 도원의 몸속에서 나는 소리인지, 바깥에서 나는 소리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귓속이 먹먹해지고 발밑의 땅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 같았다. 도원은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소금기. 젖은 바위. 오래된 피의 냄새. 낯익은 냄새들이었다. 절벽이라면 늘 이런 냄새가 났다. 어부들의 배에서도, 그물에서도, 신제 의식이 벌어졌던 제단 위에서도. 하지만 그 사이로 낯선 것이 하나 끼어 있었다. 달콤하고 서늘한, 처음 맡아보는 향기였다. 도원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 향기가 코끝을 타고 넘어와 목구멍 깊은 곳까지 퍼졌다. 달았다. 그러나 그 단맛 뒤에는 서늘한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었다. 마치 얼음 위에 흩뿌려진 꽃잎처럼. 이 냄새를, 어디선가 맡아본 것 같았다. 아니, 맡아본 적 없는 냄새인데도 익숙했다. 요아의 웃음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도원의 눈앞이 흐려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아주 작은 빛 하나가 떠올랐다. 별이었다. 낮인데도 하늘 한 조각이 어두워지며 그 별이 선명하게 보였다. 다른 이는 볼 수 없는, 도원의 눈에만 보이는 빛. 도원은 손을 뻗어 그 별을 만지려 했다. 손끝이 허공을 갈랐다.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별은 도원의 손끝을 따라 미세하게 흔들렸다. 마치 반응하듯이. "도원아." 목소리였다. 신제 의식 날 들었던 그 목소리와 같았다. 도원의 숨이 멈췄다. 주변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파도 소리도, 바람 소리도, 심지어 자신의 심장 소리까지도. 오직 그 목소리만이 도원의 귓가에, 아니 머릿속 깊은 곳에 울렸다. "요아야?" "나 여기 있어." 목소리는 여전히 가늘었다. 하지만 분명했다. 도원의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절벽 끝에서 무릎이 꺾일 뻔했다. 그는 간신히 버텼다. "어디야. 어디에 있는 거야." "모르겠어. 그냥, 여기." "여기가 어디야. 바다 속이야? 아니면—" "몰라. 그냥 여기라는 것만 알아. 위도 없고 아래도 없어." 목소리는 가늘고 멀었다. 마치 아주 깊은 물속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도원은 그 말을 들으며 손바닥을 더 힘껏 바다 쪽으로 뻗었다. 문양이 뜨거워질수록 목소리가 조금 더 가까이 들리는 것 같았다. 착각인지 실제인지 알 수 없었다. "춥지 않아?" "모르겠어. 추운 것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기도 해." "무섭지 않아?" "조금." 짧은 대답 뒤에 침묵이 흘렀다. 도원은 그 침묵이 무겁게 느껴졌다. 파도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요아의 목소리가 멈춘 그 짧은 순간에도 세상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요아야, 듣고 있어?" "듣고 있어. 도원아, 목소리가... 점점 흐려지려고 해." "안 돼. 조금만 더 있어봐."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도원의 손끝이 떨렸다. 문양의 열기가 손목을 타고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목소리를, 이 순간을. "내가 데려올게." "어떻게?" "몰라. 하지만 할 거야." "도원아." "응."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함부로 하는 말 아니야. 진심이야." 요아의 웃음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슬픔이 섞인 웃음이었다. 도원은 그 웃음소리에 가슴이 저려왔다. 요아가 웃을 때, 언제나 저런 소리를 냈었다. 살짝 코를 찡그리며, 눈을 반쯤 감으며. "고마워." "고마워할 필요 없어. 내가 원해서 하는 거야." "그래도, 고마워." "요아야." "응." "기다려줄 거지? 내가 갈 때까지." 대답이 조금 늦게 돌아왔다. "기다릴게." "도원아, 조심해." "뭘 조심해?" 대답이 없었다. 별빛이 흔들리며 점점 흐려졌다. "요아야! 뭘 조심하라는 거야! 말해줘!" 도원은 절벽 끝으로 한 발 더 다가갔다. 발밑의 흙이 살짝 무너져 내렸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바닥을 바다를 향해 있는 힘껏 뻗었다. "요아야!" 손바닥의 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별도 사라졌다. 하늘은 다시 평범한 낮으로 돌아왔다. 도원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숨을 몰아쉬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방금까지 손바닥을 채우고 있던 열기가 사라진 자리에는 서늘한 허전함만이 남았다. 바다는 여전히 잔잔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도원은 그 무심한 평온함이 원망스러웠다.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도원은 놀라 몸을 돌렸다. 촌장이었다.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얼마나 오래 지켜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촌장의 옷자락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 몸은 마치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할아버지." 도원은 급히 일어서려 했다. 다리가 후들거려 다시 한 번 주저앉았다. 촌장은 천천히 다가왔다. 눈빛이 복잡했다. 슬픔과 두려움과, 무언가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도원은 그 눈빛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촌장의 얼굴은 오래된 나무껍질처럼 주름 속에 감정을 숨기고 있었다. "목소리를 들었느냐." 도원은 순간 대답을 미뤘다. 거짓말을 할까 잠깐 고민했다. 그러나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요아 목소리였어요." 촌장의 손이 떨렸다. 지팡이를 짚은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그 손이 지팡이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그 아이가... 그렇게 남았구나." 촌장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절벽처럼 깊었다. "할아버지도 알고 계셨어요?" 촌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몸을 돌려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향한 곳은 바로 검은 생물체가 솟아올랐던 그 자리였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신제 의식이란 것은, 단순히 한 아이를 잃는 일이 아니다." "그럼 뭔데요?" 도원은 몸을 일으켜 촌장을 마주보았다.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할아버지, 제발 말씀해주세요. 요아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저 별은 뭔지, 이 문양은 왜 저한테 있는 건지—"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 "때가 언제인데요?" "..." 도원은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더 캐물을 수 없었다. 촌장의 얼굴에 그 이상을 허락하지 않는 무게가 있었다. 마치 어떤 벽이 그 뒤에 세워져 있는 것처럼. "할아버지." "응." "요아는 정말 죽은 거예요?" 촌장은 오래 침묵했다.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파도 소리가 그 침묵을 대신 채웠다. 그리고 마침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 그것이 처음으로, 촌장이 도원에게 보인 확신 없는 대답이었다. 지금까지 촌장은 언제나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마을의 일들을 설명해왔다. 신제 의식도, 마을의 규율도, 바다의 전설도. 그런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확신이 사라져 있었다. 도원은 그 낯선 흔들림에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바람이 불었다. 도원의 손바닥에는 아직도 아주 옅은 미열이 남아 있었다. 마치 방금 만난 별빛의 잔향처럼. 그는 손바닥을 다시 펼쳐 문양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붉은 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촌장은 도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손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노인의 손이었지만, 그 떨림은 단순히 나이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오늘 본 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왜요?" "믿지 않을 것이다. 혹은... 너무 믿을 것이다." 그 말의 의미를 도원은 알 수 없었다. 믿지 않는 것과 너무 믿는 것, 둘 다 위험하다는 뜻일까. 아니면 각각 다른 종류의 위험을 뜻하는 것일까. "할아버지, 그게 무슨 뜻이에요?" 촌장은 대답 대신 몸을 돌려 마을로 향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지팡이가 땅을 짚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도원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결국 따라 일어섰다. 돌아가는 길,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마을 어귀에 다다랐을 때, 촌장이 걸음을 멈추고 다시 한 번 말했다. "도원아." "네." "그 문양이 뜨거워지면, 반드시 나에게 알려라. 혼자서 함부로 절벽에 가지 말고." "오늘처럼요?" 촌장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거운 눈빛으로 도원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그날 밤, 잠들기 전까지 도원의 귓가에는 요아의 마지막 말이 떠나지 않았다. 조심해. 무엇을. 이불 속에서 도원은 손바닥을 몇 번이나 펼쳐보았다. 문양은 이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낮에 느꼈던 그 뜨거움이 정말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꿈이었는지 헷갈릴 정도로. 그러나 요아의 목소리는 분명했다. 가늘고 멀지만, 분명히 살아있는 목소리였다. 기다릴게, 라고 했었다. 도원은 그 약속을 붙잡고 잠들었다. 창밖으로 바닷바람 소리가 낮게 스며들었다. 그 소리 속에 요아의 목소리가 섞여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 답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도원은, 그 밤이 지나기 전에 자신이 다시 그 절벽으로 향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