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새벽 공기는 언제나 물기를 머금은 채 산문(山門) 돌계단 틈으로 스며들었고, 이끼 냄새와 향로에서 흘러나오는 침향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찔렀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시각이라 사방은 푸르스름한 빛으로 가라앉아 있었고, 처마 끝에 매달린 물방울이 뚝, 뚝 소리를 내며 떨어질 때마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귓가에 박혔다.
나는 청풍문(靑風門) 후원의 낡은 우물가에 서서 두레박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밧줄은 세월에 닳아 손바닥에 스칠 때마다 거친 감촉을 남겼고, 우물 안쪽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냄새는 흙과 돌이 뒤섞인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나는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걸음의 무게와 속도만 들어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으니까.
"오라버니, 오늘도 물 긷는 거야?"
하다린이었다. 아직 잠이 덜 깬 얼굴로 눈을 비비면서도, 목에 걸린 붉은 끈의 구슬만은 습관처럼 만지고 있었다. 그 손짓이 하도 자연스러워서, 나는 저것이 언제부터 저 애의 버릇이 되었는지조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물 안 기르면 세수도 못 하는데, 그럼 네 얼굴은 누가 씻겨주냐."
"내가 알아서 해!"
볼을 부풀리며 쏘아붙이는 그 모습에 나는 픽 웃고 말았다. 나이는 나보다 두어 살 어렸지만, 저 성질만큼은 문내에서 당해낼 자가 없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사숙 한 분이 다린을 두고 "저 계집아이 성정이 화기(火氣)를 닮았다"고 혀를 내두른 적도 있었으니.
두레박을 마당 항아리에 쏟아붓고 나니, 물비린내가 은은하게 퍼졌다. 하다린은 물동이 옆에 쪼그려 앉아 손을 담그고는, 차갑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 물로 씻으면 정신이 확 든다니까."
"난 그냥 이불 속이 좋아."
청풍문은 한때 이 산자락 일대를 아우르던 도문(道門)이었다고, 사숙들은 술만 들어가면 그리 말했다. 백여 년 전에는 문하 제자가 수백에 이르렀고, 인근 세 개 현(縣)의 관아에서까지 자문을 구하러 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남은 건 다 허물어진 전각 몇 채와, 늙은 도인 셋, 그리고 나와 하다린뿐이었다.
향불조차 아끼느라 하루에 한 번밖에 피우지 못하는 형편이었으니, 문파의 위세라는 것도 그저 옛말로만 남아 있는 셈이었다. 대전 기둥에는 벌레 먹은 구멍이 숭숭 나 있었고, 후원의 담장은 반쪼가리만 남아 바람을 그대로 통과시켰다. 겨울이면 그 틈으로 눈이 들이쳐 마당에 쌓일 정도였다.
그날도 다르지 않은 아침이라 생각했다. 우물물을 긷고, 하다린과 함께 마당을 쓸고, 낡은 경전을 필사하는 하루가 될 거라고. 나는 그렇게 마음을 놓은 채로 빗자루를 들었고, 하다린은 옆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낙엽을 쓸어 담았다.
"오라버니, 저기 봐. 청송(靑松) 사숙이 또 마당에 약초 널어놨어."
"밟지 마라. 지난번에 밟았다가 크게 혼났잖아."
"안 밟았어! 그냥 발끝으로 살짝 건드린 거지."
그렇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마당을 반쯤 쓸었을 때, 대전 쪽에서 낡은 목종(木鐘) 소리가 울렸다. 평소라면 점심 공양을 알리는 신호였지만, 아직 정오가 되기 전이었다. 나는 빗자루를 세워두고 하다린과 눈을 마주쳤다. 그 애의 얼굴에도 의아함이 스쳤다.
"오늘 무슨 일 있어?"
"몰라. 가보자."
정오가 채 되기 전에 청현(靑玄) 사숙이 우리 둘을 대전(大殿)으로 불러들였을 때, 나는 그 얼굴에서 평소와는 다른 무거운 기색을 읽어낼 수 있었다. 청현 사숙은 본디 말수가 적은 이였으나, 그날은 그 침묵조차 평소와는 결이 달랐다.
대전 안은 향내보다 먼지 냄새가 더 짙었고, 벽에 걸린 낡은 진법도(陣法圖)는 색이 다 바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대전 중앙에 놓인 신상(神像) 역시 금박이 벗겨져 나무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나는 그 신상을 볼 때마다 문파의 지난 시절과 지금의 초라함이 겹쳐 보여 마음이 편치 않았다.
청송 사숙과 청무(靑武) 사숙도 함께 자리해 있었다. 두 분 모두 평소와 달리 입을 다문 채 시선을 바닥에 두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무언가를 견디고 있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청현 사숙은 한참을 말없이 우리를 바라보다가, 결국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서하야, 다린아. 너희 둘에게 사명을 내리겠다."
사명이라는 말이 그렇게 무겁게 들린 적은 없었다. 나는 그 단어 하나에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본문의 재정이 더는 너희 둘을 먹여 살릴 형편이 아니다. 그러니 하산하여 백하성(白河城)에 가서, 요괴로 인한 민초들의 고통을 없애주는 것으로 사명을 대신하라."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사명이라는 명분이었지만, 이건 결국 추방이었다. 몇 마디의 격식으로 감싼 파문(破門)이나 다름없었다.
"사숙, 그건..."
"더 묻지 마라. 이것이 본문이 너희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다."
청현 사숙의 목소리는 단호했으나, 그 눈빛만큼은 차마 나를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었다. 그 흔들림이 오히려 나를 더 서글프게 만들었다. 최소한의 미안함이라도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배려라니.'
나는 속으로 되물었으나,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내지 못했다. 청송 사숙이 힐끔 나를 쳐다보다가 다시 시선을 피했고, 청무 사숙은 그저 낡은 지팡이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이미 세 분 사숙 사이에서 합의된 결정이라는 뜻이었다.
옆에 선 하다린이 내 소매를 슬며시 잡아당겼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오라버니, 우리 진짜 쫓겨나는 거야?]
전음으로 묻는 그 목소리에 나는 차마 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그 애의 손을 마주 잡아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청현 사숙은 그런 우리를 보며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열었다.
"백하성은 예로부터 요물의 폐해가 심한 곳이다. 관아에서도 손을 쓰지 못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들었다. 너희가 그곳에서 공을 세운다면, 그것으로 우리 문파의 이름 또한 다시 세상에 알려질 수 있을 것이다."
말은 그럴듯했으나, 나는 그 말속에 담긴 진짜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우리를 먹일 곡식이 부족하다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대전을 나서는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웠다. 하다린은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내 뒤를 따라왔다.
그날 오후, 우리는 각자의 짐을 꾸렸다. 내 몫은 낡은 목검과 몇 장의 부적, 그리고 스승들이 물려준 진법서 한 권이 전부였다. 목검의 손잡이는 오랜 세월 손에 익어 반질반질했고, 부적은 습기를 먹어 귀퉁이가 살짝 눅눅했다. 나는 그것들을 마른 천으로 다시 감싸 배낭 깊숙이 밀어넣었다.
하다린의 짐이라 해봐야 목재 상자 하나가 더 있을 뿐이었는데,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는 나조차 자세히 알지 못했다. 다만 그 상자를 다룰 때마다 하다린의 손목에 감긴 붉은 끈의 구슬이 은은하게 빛을 낸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그거 뭐야?"
"몰라도 돼."
몇 번을 물어봐도 그 애는 늘 그렇게 대답하며 상자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더 캐묻지 않았다. 저마다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는 걸, 나도 모르지 않았으니까.
짐을 다 꾸리고 나니 어느새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마당에 드리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고, 낡은 전각의 기와 위로 노을이 붉게 스며들었다. 그 풍경이 오늘만큼은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 매일 보던 것들인데도, 이제 곧 떠나야 한다는 사실 하나로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다.
산문 앞에 섰을 때, 늙은 도인 셋이 나란히 서서 우리를 배웅했다. 청송 사숙은 마른 나물 몇 줌을 하다린의 손에 쥐여주며 "가는 길에 배고프면 씹어라" 하고 짧게 말했고, 청무 사숙은 그저 우리 둘의 어깨를 한 번씩 두드려주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청현 사숙은 마지막으로 낡은 은자 몇 냥을 내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부디 몸을 아끼고, 도의(道義)를 잊지 말라."
"...예, 사숙."
나는 고개를 숙였지만, 그 인사가 진심에서 우러난 것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은자를 쥔 손바닥이 차갑게 식어가는 걸 느끼면서도,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려 했다.
돌계단을 내려가며 뒤를 돌아보았을 때, 청풍문의 낡은 현판이 안개 속으로 서서히 지워지고 있었다. 마치 그곳에 있던 시간 전부가, 그 안개와 함께 흩어져버리는 것 같았다. 열두 해를 살았던 곳이었다. 우물가에서 물을 긷던 아침들, 하다린과 마당을 쓸며 나누었던 시시한 이야기들, 사숙들의 잔소리와 술주정까지도 이제는 안개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하다린이 내 손을 꼭 붙잡았다.
"오라버니, 무서워."
"괜찮아. 나 있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작 내 손끝도 차갑게 식어 있다는 걸 그 애가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산 아래로 뻗은 길은 안개에 잠겨 끝이 보이지 않았고, 발밑에서 부서지는 자갈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든 바람이 옷깃을 흔들 때마다, 나는 목검의 손잡이를 무의식적으로 다시 고쳐 쥐었다. 앞으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는 불안이 발걸음마다 스며들었다.
"오라버니, 백하성은 어떤 곳이야?"
"나도 몰라. 가봐야 알겠지."
"거기 요괴가 진짜 많아?"
"사숙 말씀대로라면 그렇겠지."
하다린은 그 말에 입을 꾹 다물고는, 상자를 품에 더 꼭 끌어안았다. 나는 그 애의 옆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앞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때 등 뒤, 산문 쪽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듯한 낮은 굉음이 들려왔다.
- 쿠구궁...
나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지만, 안개는 이미 산문을 완전히 가려버린 뒤였다. 소리는 분명 대전 쪽에서 울려온 것 같았는데, 그 방향조차 안개 속에서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방금 그 소리는...'
가슴 한복판이 서늘하게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단순히 낡은 전각의 기둥이 무너지는 소리였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청현 사숙과 두 분 사숙이 아직 그 안에 있었으니까.
하다린도 걸음을 멈춘 채 창백해진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애의 손이 내 소매를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오라버니, 저 소리..."
"...가만있어."
나는 숨을 죽이고 안개 너머를 응시했다.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새소리조차 뚝 끊긴 듯한 정적이 산자락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그 침묵이 오히려 방금의 굉음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