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밥값도 없는 1급 사냥꾼

4화

안이현이 쓰러진 자리에서 피가 번지고 있었다. 검붉은 액체가 흙 위로 퍼져나가는 모습이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다. 안명희가 바로 그쪽으로 달려갔다. 발소리가 다급했다. "이현아, 정신 차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대답이 없었다. 안명희가 이현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이현아. 눈 떠봐." 숨은 쉬고 있었다. 가늘지만 분명한 호흡이었다. 다행히도 완전히 끝은 아니었다. 안명희가 그제야 손을 멈췄다. 그녀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도 다가가지 못했다. 발이 땅에 붙은 것 같았다.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검은 형체는 다시 모습을 감췄다. 사라진 게 아니라, 시야 어딘가에 숨어 있는 느낌이었다. 공기 자체가 무거웠다.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움직이지 마." 한서준이 낮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여유가 없었다. 그의 손끝에서 옅은 빛이 맴돌았다. 2급 능수의 힘이었다. 빛은 손끝을 따라 실처럼 흘렀다. 방어와 탐지를 동시에 하는 능력이라고 예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빛조차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저건 뭐예요?" 내가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몰라. 등급표에 없는 놈이야." 한서준의 대답이 짧았다. 평소라면 뭔가 더 설명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미분류 개체 감지] [예상 등급: 산정 불가] 또 그 문구가 떠올랐다. 산정 불가라는 말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등급이 있다는 건 대응할 방법이 있다는 뜻이었다. 등급이 없다는 건, 아무도 그 힘을 재본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그때, 숲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또박또박, 일정한 속도. 짐승도, 검은 형체도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나는 순간 희망을 품었다가 곧바로 의심했다. 이런 상황에 태연하게 걸어올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그건 우리보다 훨씬 강한 존재라는 뜻일 것이다. 회색 망토가 나무 사이로 나타났다. 키가 크고 마른 체형, 냉정한 눈빛. 걸음걸이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왼손 약지에 낀 반지가 스치는 빛에 반짝였다. 그 반지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3대장님." 한서준이 다급히 외쳤다. 목소리에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안명희도 순간 표정이 밝아졌다. "서하람 대장님!" 서하람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등장했다. 21살, 심마대 3대장. 5급 능수 정점. 소문으로만 들었던 존재가 눈앞에 있었다. 나는 그 이름을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등급표 최상위권, 실전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 없는 사람. 말로만 듣던 존재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물러나."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명령이라기보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투였다. 한서준과 안명희가 즉시 물러났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었다. 평소 훈련받은 대로 반응하는 것 같았다. 나는 반응이 늦었다. 발이 그때까지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너도." 서하람이 짧게 나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등급 없는 존재를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닌 걸 보는 눈빛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무시당한 건지, 신경 쓸 가치조차 없다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 어쨌든 나는 몸을 움직여 뒤로 물러났다. 검은 형체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엔 서하람 정면이었다. 형체가 팔을 뻗어 후려쳤다. 콰앙! 굉음이 숲 전체를 울렸다. 나뭇가지들이 흔들리고, 흙먼지가 튀어 올랐다. 하지만 서하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대신 반지가 빛났다. [제約解放 - 1단계] 짧은 고지문이 시야에 떠올랐다. 형체의 팔이 반쯤 사라졌다. 마치 그 자리의 존재 자체가 지워진 것처럼. 잘려나간 게 아니었다. 그냥 없어졌다. "저게 뭐예요." 내가 중얼거리자 한서준이 대답했다. "5급 능수 정점의 힘이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그의 목소리에도 경외와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같은 능수인데도, 저 힘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형체가 다시 움직였다. 남은 한쪽 팔로 다시 서하람을 향해 뻗었다. 필사적인 움직임이었다. 서하람이 손을 들었다. 두 번째 빛. 형체의 나머지 팔이 지워졌다. 이번에도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존재가 삭제됐다. "저건 우리랑 완전히 다른 차원이네요." 나는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격차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같은 능수라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한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몇 년을 훈련해도 저 근처에도 못 갈 거야." 그 말이 위로처럼 들리진 않았다. 오히려 현실을 더 확실하게 박아넣는 느낌이었다. 형체가 마지막 발악처럼 몸을 뒤틀며 서하람을 향해 돌진했다. 팔도 없이, 그저 몸통만으로 부딪히려는 듯했다. 그 처절함이 오히려 섬뜩했다. 서하람이 손을 뻗었다. [제約解放 - 2단계] 형체가 그대로 흩어졌다. 연기처럼, 혹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숲이 다시 원래의 소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새소리, 바람 소리. 방금까지 있었던 공포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서하람이 손을 거두며 우리를 돌아봤다. "3구역에 미분류 개체가 왜 나왔는지 조사가 필요하겠군." 감정 없는 목소리였다. 마치 방금 벌어진 일이 일상적인 업무의 일부인 것처럼 들렸다. "대장님, 저희 조원이 부상당했습니다." 안명희가 다급히 말했다. 목소리에 초조함이 배어 있었다. 서하람이 안이현 쪽을 잠깐 봤다. 시선이 스쳐 지나가는 정도였다. "살아 있으면 됐다." 그 말이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동료의 부상을 대하는 태도가, 마치 결과 보고서를 읽는 것 같았다. 사람 목숨을 두고 하는 말이 저렇게 가벼울 수 있나. 안명희도 순간 표정이 굳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앞에서는 반박할 자격조차 없다는 걸 아는 눈치였다. "강도훈." 서하람이 갑자기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놀라서 그를 쳐다봤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지 궁금했지만 물을 틈이 없었다. "등급 미배정인 채로 실전 배치를 받았군." "네." 목소리가 작게 나왔다. "운이 나빴다면 지금 여기 죽어 있었을 거다." 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등급 없는 채로 저 검은 형체와 마주쳤다면, 나는 지금 안이현처럼 쓰러져 있었을 거다. 아니, 그보다 더 나쁜 상황일 수도 있었다. 서하람의 시선이 다시 나를 훑었다. 평가하는 눈빛도, 동정하는 눈빛도 아니었다. 그냥 사실을 확인하는 눈빛이었다. "운이 좋았던 거다. 그뿐이야." 그 말이 오히려 더 무겁게 다가왔다.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말은, 다음에는 운이 없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서하람이 몸을 돌렸다. "복귀해. 오늘 일은 보고서에 남긴다." 그가 숲 저편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겨우 숨을 내쉬었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자칫하면 주저앉을 것 같았다. 안명희가 안이현을 부축해 일으켰다. "이현아, 걸을 수 있어?" 이현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의 공포는 몸에 새겨진 듯했다. 그의 눈빛이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저게 대체 뭐였을까요." 내가 묻자 한서준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표정도 여전히 굳어 있었다. "등급표에 없는 놈이 나왔다는 건, 예정에 없던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야." 그의 표정이 평소와 달리 어두웠다. "단순 입단 시험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걸음을 옮겼다. 발밑에서 흙이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아저씨를 떠올렸다. 흔들리던 손, 갈라진 기침 소리. 왜 갑자기 그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그저 지금 벌어진 일들과 뭔가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뭔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예감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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