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게이머 출신 남작가 양자

3화

다음 날 오후, 교회에서 사람이 왔다. 똑똑. 노크 소리가 유난히 조심스러웠다. 이준혁이 문을 열어주기 전부터 나는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이며 괜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손님이 온다는 말은 미리 들었다. 소하 교회에서 치유 담당 수녀가 상처를 봐주러 온다고. 그 정도 정보만으로는 별 기대도 긴장도 없었다. 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를 본 순간, 나는 잠깐 숨을 멈췄다. 키가 크고, 파란 눈에 크림색 피부, 분홍빛 입술. 수녀복 위로도 몸매 라인이 은근히 드러났고, 왼쪽 광대뼈에는 작은 점이 하나 박혀 있었다. 걸음걸이마저도 반듯했다. 등 뒤로 늘어뜨린 옅은 금발이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살짝 반짝였다. 이거 진짜 게임 일러스트에서 튀어나온 거 아니야. 또 그 생각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정신을 다잡았다. 지금 이 몸은 열두 살짜리다. 열두 살짜리가 여자를 보고 저런 눈빛을 하면 그건 그것대로 이상하다. 나는 애써 시선을 침대 시트 쪽으로 떨궜다. 무늬도 없는 밋밋한 시트였는데, 그게 그렇게 흥미로울 일이 없는데도 나는 한참 그것만 쳐다봤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소이라고 해요."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존댓말을 쓰는 게 조금 의외였다. 어린애를 상대로도 저렇게 격식을 차리는구나, 싶었다. 이준혁은 그녀를 소하 교회의 치유 담당 수녀라고 소개했다. "상처를 좀 볼게요." 한소이가 침대 옆에 앉으며 말했다. 그녀는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기 시작했다. 손가락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익숙했다. 이런 걸 하루에도 몇 번씩 해본 사람의 손이었다. 손끝이 상처 주변을 스칠 때마다 미묘하게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신성력이라는 걸까. 화면 너머로 보던 것과 실제로 몸에 닿는 것은 완전히 다른 감각이었다. 게임 속에서 이런 연출을 볼 때는 그냥 이펙트 하나 반짝이고 끝이었는데, 실제로는 피부 아래로 서늘한 물살이 흘러 들어오는 것 같았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흠. 화살촉 파편이 조금 남아있네요." 그녀가 상처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붕대 끝을 손끝으로 살짝 눌러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마법 화살은 원래 이래요. 완전히 회수 안 하면 이렇게 파편이 남죠. 다행히 위험한 수준은 아니에요." "파편이 남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내가 물었다. 목소리가 아이답게 나오도록 신경 썼다. 궁금한 게 있으면 궁금한 대로 물어보는 정도는 열두 살짜리도 할 법한 일이었다. "몸에 서서히 흡수돼요. 대부분의 경우엔 아무 문제 없어요. 드물게, 마력에 민감한 체질이면 조금 다르게 반응하기도 하지만." "다르게 반응한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거예요?" "음, 사람마다 달라요. 어떤 사람은 열이 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아예 아무 반응이 없기도 하고요. 극히 드물게는..." 그녀가 말을 하다 말고 잠깐 멈췄다. 손끝으로 상처 언저리를 한 번 더 짚어보더니,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 "아니에요, 이 정도로 걱정할 건 아니에요. 대부분은 그냥 흡수되고 끝나요." 마력에 민감한 체질. 그 말이 묘하게 귓가에 걸렸다. 한소이는 별생각 없이 넘어갔지만, 나는 그 말을 곱씹었다. 이 세계에는 마법이 실재하고, 마력에 대한 체질 차이가 있다. 게임 시스템으로 치면 일종의 스탯이나 특성 같은 거겠지. 만약 그런 히든 스탯이 존재한다면, 지금 내 몸에 박힌 이 파편이 그 스탯을 건드릴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나쁠 건 없다. 오히려 좋을 수도 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었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따져봐야 답이 나올 문제는 아니었다. "옷을 좀 벗어주실래요. 상처 주변까지 확인해야 해서." 한소이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반사적으로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스물세 살 남자의 습관이었다. 여자 앞에서 옷을 벗는 것에 대해 별다른 거부감이 없는 몸에 밴 반응. 병원에서 진료받을 때, 헬스장 탈의실에서, 어릴 적 목욕탕에서. 그런 기억들이 무의식중에 손끝을 움직였다. 단추를 두 개쯤 풀었을 때, 한소이의 표정이 살짝 굳는 게 보였다. "저, 저기."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윗옷만 살짝 걷어서 보여주면 되는데요." 아차. 나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열두 살짜리 아이가 저렇게 자연스럽게, 아무 망설임 없이 옷을 벗으려는 건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며 손을 멈췄다. 손가락 끝이 단추 하나를 쥔 채로 굳어버렸다. "아, 죄송해요. 저... 잘 몰라서." 어설픈 변명이었다. 스스로 듣기에도 궁색했다. 열두 살짜리가 옷을 벗을 줄 몰라서 다 벗으려 했다는 말이 대체 무슨 논리로 성립하는지, 말해놓고 나서도 알 수 없었다. 한소이는 잠시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 눈빛에 담긴 게 뭔지 정확히 읽을 수 없었지만, 적어도 호의적인 건 아니었다. 의심이라고 하기엔 조금 옅고, 그냥 넘기기엔 조금 진한 표정이었다. 파란 눈동자가 나를 위아래로 한 번 훑는 것 같기도 했다. "...괜찮아요. 아이들이 가끔 그러기도 하죠." 그녀가 애써 웃으며 말을 돌렸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도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조심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하나씩 삐끗하다 보면 언젠가는 걸린다. 이 몸은 열두 살이고, 나는 그 안에 들어앉은 스물세 살짜리 어른이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걸 들키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짐작도 안 갔다. 최소한 좋은 방향은 아닐 거다. 한소이는 셔츠를 살짝 걷어 상처 주변을 확인하고, 손바닥에서 옅은 빛을 내며 상처 부위를 문질렀다. 그녀의 손바닥이 노랗고 따뜻한 빛으로 물들었다. 그 빛이 어깨 위에 닿을 때마다 온기가 뼈 안쪽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따뜻한 온기가 어깨를 타고 퍼졌다. 신기했다. 이런 걸 실제로 눈앞에서 보는 건 게임 화면으로 보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다. 화면 속에서는 그냥 이펙트였는데, 지금은 살갗 아래로 파고드는 감각이었다. 간지럽기도 하고, 저릿하기도 하고. 뭐라 설명하기 애매한 느낌이었다. "이 정도면 며칠 내로 아물 거예요. 파편은 자연스럽게 몸에 흡수될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되고요." 그녀가 손을 떼며 말했다. 그리고 이준혁 쪽을 돌아봤다. "남작님, 이 아이 말인데요." "기억이 없다더군." 이준혁이 짧게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뚝뚝했다. 벽에 기대선 자세도, 팔짱을 낀 모양새도 처음 봤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한소이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정말로요?" "...네."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눈을 마주치는 것도, 피하는 것도 둘 다 부자연스러워 보일 것 같아서, 적당히 시선을 그녀의 어깨쯤에 걸쳐두었다. "흠." 그녀는 뭔가 더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잠깐이지만 그 침묵이 길게 느껴졌다. 뭘 물어보려던 걸까. 나이? 이름? 아니면 저 옷을 벗으려던 이유? 어느 쪽이든 지금 이 자리에서 파고들면 곤란한 질문이었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돌아올 수도 있어요. 급하게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아요." 다행히도 그녀는 더 캐묻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방금 전 옷 벗은 실수가 그냥 넘어간 것도, 어쩌면 아이라서 그런가보다 하고 넘긴 것 같았다. 한소이가 짐을 챙기며 문 쪽으로 향했다. 이준혁이 그녀를 배웅하러 따라 나갔다. 문이 닫히기 직전, 복도 너머로 두 사람이 나누는 목소리가 살짝 들렸다. "...정말 괜찮을까요, 저 아이." "괜찮아야지." 그 이상은 들리지 않았다. 문이 완전히 닫혔다. 한소이가 돌아가고 나서,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나무로 짜인 천장은 결이 거칠고, 군데군데 옹이가 박혀 있었다. 그 옹이 자국을 눈으로 따라가며 방금 있었던 일을 곱씹었다. 마법이 있다. 신성력이 있다. 상처가 마법으로 낫는다. 그리고 나는 파편을 몸에 지닌 채 앞으로 살아가야 한다. 마력에 민감한 체질이면 다르게 반응한다던 한소이의 말이 계속 신경 쓰였다. 만약 내가 그 체질이라면? 그렇다면 이 몸에 뭔가 특별한 게 생길 수도 있다는 뜻인가. 게임 속에서 흔히 보던 각성이니 특성이니 하는 단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물론 이게 게임인지 현실인지도 아직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 기대는 이르다.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최소한 지금은. 나는 손을 들어 눈앞에 가져다 대봤다. 딱히 뭔가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 마력이 있다고 해서 손끝에서 빛이 난다거나 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당연한가. 그런 게 그렇게 쉽게 눈에 보이면 다들 이미 알고 있었겠지.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창밖을 바라봤다. 별이 낯설게 배치되어 있었다. 지구의 밤하늘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새삼스럽게 실감 났다. 창틀 너머로 보이는 별자리들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모양이었다. 국자 모양도, 삼태성도 아니었다. 그냥 어지럽게 흩어진 점들일 뿐인데, 그게 오히려 더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걸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는 감각. 돌아갈 수 있을까. 생각해봐야 답이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잠이 몰려왔다. 그리고 잠들기 직전,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이 마을 이름이 소하라고 했지. 그럼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그 여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서리아. 게임 속에서 가장 비극적인 서브 히로인. 백발에, 대현 왕국과의 전쟁에서 아버지를 잃고 복수를 맹세한 마법사 공주. 지금 이 세계관의 타임라인이 게임 초반부와 일치한다면, 그녀는 아직 복수를 시작하기 전일 수도 있었다. 혹은, 이미 시작했을 수도 있고. 만약 이미 시작했다면, 그 복수의 끝에 뭐가 있었는지 나는 알고 있다. 게임 속에서 봤던 결말이 정확히 이 세계에도 적용될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대략적인 흐름 정도는 예측할 수 있었다. 그게 이 세계에서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였다. 미리 안다는 것. 물론 그 무기가 지금 당장 무슨 쓸모가 있는 건 아니었다. 열두 살짜리 몸으로, 이름도 남작가에 얹혀사는 정체불명의 아이 신세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일단은 이 몸에 익숙해지는 게 먼저였다. 나는 그 생각을 끝으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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