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밤에 잠에서 깼다. 손끝이 아렸다.
화살 맞은 자리, 정확히는 파편이 박혀 있다는 그 자리가 얼어붙는 것처럼 시렸다. 나는 이불을 걷고 손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 마디마다 하얀 서리가 얇게 앉아 있었다. 숨을 죽였다. '이게 뭐지.' 스물세 살 정하준으로 살아온 시간 동안 이런 건 겪어본 적이 없었다. 게임 속에서나 보던 이펙트가, 지금 내 손등 위에서 실제로 피어나고 있었다.
손을 폈다 접었다. 서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방 안 공기가 점점 서늘해지는 게 느껴졌다. 창문 안쪽에 김이 서리듯 하얀 얼음 무늬가 번져갔다. 나는 손끝으로 이불을 슬쩍 만져보았다. 이불 자락에도 서리가 옮겨붙어 있었다. 마른 천 위에 얼음 결정이 반짝이는 걸 보고 있자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잠깐 헷갈렸다. 꿈이라기엔 손끝이 너무 아팠다. '진정해. 소리 내지 마.' 심장이 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했다. 이 세계관에서 마력이란 건 대체로 두 갈래로 나뉜다. 신성력처럼 외부에서 끌어와 쓰는 것과, 몸 안에 내재된 것을 다루는 것. 후자 쪽은 흔히 재능이라 불리며, 아주 드물게 나타난다고 설정집에 적혀 있었다. 문제는 적어도 내가 플레이하며 확인한 원작에서는, 이 몸의 주인에게 그런 재능이 있다는 설정이 공개된 적이 없었다는 거다. 정하준은 원작에서 조연 중의 조연에 불과했고, 출신이나 혈통도 제대로 다뤄지지 않은 배경 인물이었다. 그런 몸이 지금 손끝에서 서리를 뿜어내고 있다는 건, 내가 알지 못했던 설정이 숨어 있었거나 원작에 없던 변수가 끼어들었다는 뜻이었다. '설마 화살 파편 때문인가.' 나는 우선 그 가능성에 무게를 실었다. 지금으로서는 다른 설명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하준아." 이준혁이었다. 잠옷 위에 겉옷을 대충 걸친 채였다. 손에는 등불을 들고 있었다. 남작은 방 안 공기를 느끼자마자 멈춰 섰다. 창문에 낀 성에를 보고, 다시 침대 위 나를 보았다. 눈이 커졌다.
"이게…" 그가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이불 밖으로 얼굴만 내밀었다. 표정을 최대한 어리게, 겁먹은 것처럼 만들었다. 사실 절반은 진짜였다. "무서운 꿈을 꿨어요." 목소리를 떨었다. 절반은 연기였다.
이준혁이 등불을 내려놓고 다가왔다. 침대맡에 무릎을 꿇더니 내 손을 잡았다. 뜨거웠다. 사람 체온이 이렇게 뜨거웠나 싶을 정도로. "손이 얼음장이구나." 그가 중얼거렸다. "괜찮으냐. 아픈 데는."
"모르겠어요."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이거 어떻게 설명하지.' 머릿속이 바빠졌다. 게임 지식을 뒤졌다. 이 세계에서 마력에 민감한 체질이 존재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화살 파편이 몸속에서 서서히 흡수된다는 것도. 그렇다면 지금 이 서리는 그 파편이 반응한 결과일 가능성이 컸다. 다만 그걸 열두 살 기억상실 아이 입으로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이준혁은 내 손을 계속 쥔 채 방 안을 둘러보았다. 창틀, 벽지, 침대 다리까지. 뭔가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다 다시 나를 보았다. "혹시 어디 다른 데도 아프지 않으냐. 배라든가, 머리라든가." 그가 묻는 말투에 조바심이 묻어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진짜로 다른 곳은 아프지 않았다. 손끝만 시렸다.
이준혁은 한참 내 손을 쥐고 있더니 결심한 얼굴로 일어섰다. "내일 아침 일찍 소이 수녀를 부르겠다. 오늘은 자거라." 그는 창문에 낀 성에를 손끝으로 쓸어보고는, 그것이 녹지 않고 오히려 손끝을 시리게 하자 미간을 좁혔다. "이상한 일이군."
'이상한 정도가 아니지.' 나는 속으로 대꾸했다.
그는 등불을 다시 들고 문가로 향하다가 멈춰 섰다. "혹시 무섭거든 나를 부르거라. 옆방에 있을 테니."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조심스러웠다. 나는 이불을 다시 덮고 눈을 감았다. 손끝의 서리는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녹아들었다. 그 촉감을 기억해두려 애썼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뭘 근거로 대응해야 할지 미리 알아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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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한소이가 왔다.
수녀복 자락에서 향냄새가 났다. 그녀는 내 침대맡에 앉아 손목을 짚었다. 눈을 감고 한참 집중하는 얼굴이었다. 그 손끝에서 옅은 빛이 새어 나왔다. 신성력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눈으로 보고 있자니, 이 세계가 게임이 아니라 진짜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실감이 났다. "신성력이 이상하게 반응하네요." 그녀가 눈을 떴다. "보통 사람은 이렇지 않은데."
"어떻게 다른가요?" 이준혁이 물었다. 팔짱을 낀 채 문가에 서 있었다.
한소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화살 파편이 몸속에서 흡수되는 과정에서, 마력을 그냥 흘려보내는 게 아니라 붙잡아두고 있어요. 마치 그릇처럼요." 그녀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흔히 말하는 '마력 친화 체질'이라는 게 있어요. 백 명 중 한 명 정도 될까요. 그런 체질을 가진 사람은 몸에 스며든 마력을 자기 것처럼 다룰 수 있게 되기도 하죠."
"그럼 이 아이는…" 이준혁이 말끝을 흐렸다.
"확신할 순 없어요. 하지만 어젯밤 일이 그 증거일 수 있죠." 한소이가 내 손을 다시 잡았다. 따뜻한 손이었다. 조금 전 이준혁의 손보다는 덜 뜨거웠지만, 사람 체온이라는 게 이렇게 든든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무서웠지?" 그녀가 나를 향해 물었다. 존댓말이 아니라 그냥 아이 대하듯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연기가 아니었다.
한소이는 몇 가지를 더 확인했다. 맥박, 체온, 눈동자 반응. 실무적이고 사무적인 손길이었다. 손전등 대신 촛불을 켜서 눈동자에 비추고, 손목 안쪽을 눌러가며 맥이 뛰는 간격을 셌다. 마치 병원 진료를 받는 기분이었다. 다만 청진기 대신 신성력이 쓰인다는 것만 달랐다. 그 사이사이 나를 보는 눈빛에 미묘한 것이 섞여 있었다. 열두 살 아이가 화살에 맞고, 마력 파편을 몸에 지니고, 그런데도 겁에 질린 것치고는 지나치게 침착하게 상황을 받아들인다는 걸 눈치채고 있는 것 같았다. '들키면 안 되는데.' 나는 시선을 피했다.
"손끝에 이상 반응이 있을 때, 통증이 먼저였나요, 아니면 서리가 먼저였나요?" 한소이가 물었다. 질문이 꽤 구체적이었다.
"통증이 먼저였어요." 나는 사실대로 답했다. 거짓말을 섞을 이유가 없었다.
"흠." 그녀가 짧게 메모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신경 자극이 마력 발현의 방아쇠가 될 가능성이 있겠네요. 이런 경우는 사실 기록에도 잘 없어서, 저도 정확히 뭐라 단정 짓기가 어려워요."
"당분간 무리한 움직임은 삼가는 게 좋겠어요." 그녀가 결론을 내렸다. "파편이 완전히 흡수될 때까지는, 마력이 불규칙하게 튀어나올 수 있으니까요."
"그게 얼마나 걸리는지 아나?" 이준혁이 물었다.
"사람마다 달라요. 짧으면 한 달, 길면 몇 년." 한소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흔한 경우가 아니라서요. 저도 문헌으로만 봤지 실제로 겪는 건 처음이에요."
"몇 년이라니." 이준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동안 계속 이런 일이 반복된다는 뜻인가?"
"반복될 수도, 아예 한 번으로 끝날 수도 있어요. 예측이 안 돼요." 한소이가 담담하게 말했다. 의사가 환자 보호자에게 예후를 설명하는 말투와 똑같았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 성직자보다는 의사에 더 가까운 사람이구나.'
이준혁은 그 말에 표정이 복잡해졌다. 걱정과, 뭔가 다른 감정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나는 그 표정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이 사람, 나를 진짜 무슨 특별한 존재로 보기 시작했구나.' 부담스러웠다. 동시에, 이 부담이 나를 지켜주는 방패가 될 수도 있겠다는 계산이 스쳤다. 스스로가 역겨웠다. 열두 살 몸으로 이런 계산이나 하고 있다니.
한소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혹시 몸에 이상이 더 있으면 바로 사람을 보내주세요. 저도 좀 더 알아볼게요. 이런 체질에 관한 오래된 기록이 수도원 서고에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녀는 방을 나서기 전 나를 돌아보았다. "무섭다고 숨기지 말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 다시 아이 대하는 말투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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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 이준혁은 나를 데리고 저택 뒤뜰로 나갔다. 사람이 없는 조용한 곳이었다. 나무 그늘 아래 벤치 대신 큰 바위가 하나 놓여 있었고, 그는 그 위에 앉아 나를 옆에 앉혔다. 바위는 오전 내내 볕을 받아서인지 따뜻했다. 엉덩이 아래 온기가 느껴졌다.
"한 번 더 해볼 수 있겠느냐."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젯밤처럼."
"어떻게 하는 건지 몰라요."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정말 몰랐다. 어젯밤 그건 통증과 함께 저절로 튀어나온 것이었다.
"손을 한번 펴보아라."
나는 손을 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몇 분을 그렇게 있었다. 손바닥을 뒤집어보고,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보고, 눈을 감고 집중해보기도 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열두 살 아이의 손이었다. 이준혁이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손끝으로 턱을 괴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은근히 부담스러웠다.
"다시 한번 눈을 감고 해보아라." 그가 말했다.
나는 시키는 대로 했다.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러다 문득, 어젯밤의 감각을 떠올렸다. 통증. 그 아릿한 느낌. 나는 상처 부위를 손으로 눌렀다. 손가락 끝으로 상처 언저리를 지그시 눌렀다. 그러자 손끝에 다시 그 시린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서리가 아주 조금, 손톱 끝에만 얇게 앉았다. 마치 겨울날 창문에 입김을 불면 잠깐 생겼다 사라지는 무늬처럼, 아주 미미하고 연약한 흔적이었다.
"오." 이준혁이 낮게 감탄했다. 그는 몸을 앞으로 숙여 내 손끝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손을 대보려다가, 다칠까 봐 그런지 멈칫하고 거두어들였다. "방금 그건 어떻게 한 것이냐?"
"아픈 데를 눌렀어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통증이 방아쇠구나.' 나는 속으로 정리했다. '아니면 감정의 격변이거나.' 조건을 확인했다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통제 불가능한 것보다는, 통제 가능한 것이 훨씬 덜 무서웠다. 게임 설정을 다시 떠올려봤다. 마력 친화 체질은 대개 각성 초기에 감정이나 통증 같은 강한 자극에 반응한다고 되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점차 의지로 제어할 수 있게 된다는 서술도 있었던 것 같은데, 확실하진 않았다. 원작에서 다루지 않은 조연의 설정이니 확신할 수가 없었다.
"신기하구나." 이준혁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에는 신기함과 걱정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 "혹시 아프게 해서 이런 걸 계속 확인하는 건 좋지 않을 것 같다. 오늘은 이만하자."
나는 손을 다시 이불처럼 무릎 위에 덮었다. 손톱 끝에 남은 서리를 슬쩍 문질러 없앴다. 이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러다 문득 뭔가 생각난 듯 나를 돌아보았다.
"하준아, 혹시 몸 안에서 뭔가 목소리가 들리거나, 이상한 기억 같은 게 떠오르진 않느냐?"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마 마력에 대해 뭔가 아는 게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아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반은 거짓말이었다. 목소리는 없었지만 기억은 있었다. 다만 그게 이 세계 사람으로선 상상도 못 할 종류의 기억이라는 게 문제였다.
이준혁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럼 됐다." 그의 표정에서 안도와 아쉬움이 동시에 스쳤다. 나는 그 낙차를 놓치지 않았다. 이 사람은 내가 뭔가 특별한 사람이길 바라면서도, 동시에 평범한 아이이길 바라는 것 같았다. 두 마음이 부딪히는 걸 눈치채지 못한 척했다.
그때 저택 정문 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다각다각. 다각다각.
이준혁이 몸을 일으켰다.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이 시간에 손님이 올 리가 없는데." 그가 중얼거리며 정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뭔가 예감이 좋지 않은 듯, 그는 허리춤의 검집을 슬쩍 확인했다. 저택 남작이 정오도 안 된 시간에 검부터 확인한다는 건, 평범한 손님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손끝에 남은 서리를 문질러 없앴다.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병사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와 이준혁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갑옷은 흙투성이였고, 숨은 턱까지 차 있었다. "남작님, 서쪽 밭에서… 정탐꾼으로 의심되는 자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말에 뒤뜰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나는 이준혁의 등이 잠시 굳는 것을 보았다. 넓은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보였다.
"정탐꾼이라니." 이준혁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확실한가?"
"밭 근처 수풀에 숨어 있던 걸 순찰조가 발견했습니다. 저희 쪽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습니다."
이준혁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나를 돌아보았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 걱정이나 신기함이 아니라, 경계와 긴장으로 가득 찬 눈이었다. "하준아, 너는 방으로 들어가 있거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몸을 움직이면서도 머릿속은 딴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정탐꾼이라니. 지금 이 시기에.' 원작 시나리오 어딘가에 이 저택이 등장한 적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보려 했지만, 정하준이라는 배경 인물이 얽힌 사건이 워낙 사소해서 세부까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평화롭던 이 저택에, 뭔가 큰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