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정탐꾼이라는 말에 이준혁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어디서." 그가 짧게 물었다.
"서쪽 밭 근처입니다. 순찰대가 발견했는데, 도망치다 붙잡혔습니다." 병사가 다급하게 보고했다. 숨이 턱까지 차 있었다. 여기까지 뛰어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근처에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그자가 아이를 인질로 잡으려 했습니다."
"아이는." 이준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지금 도망치는 중이라고 합니다. 정탐꾼이 뒤쫓고 있습니다."
이준혁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나는 그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사흘 전, 늑대가 마을 가축을 물어 죽였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화가 아니었다. 결정을 내린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구간으로 향했다. 걸음이 빨랐다. 병사 두 명이 급히 뒤를 따랐다. "하준이는 안에 있거라." 그가 나를 향해 말했다. 명령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발걸음은 이미 저 멀리 있었다.
말발굽 소리가 마당을 울리고, 대문 밖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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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에 있지 않았다.
말이 안 된다는 건 나도 알았다. 열두 살짜리 몸으로, 정탐꾼이 있는 서쪽 밭까지 뛰어가는 게 정상은 아니었다. 뛰어봐야 다치기밖에 더하겠나. 이성은 그렇게 계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어릴 적, 아니 정확히는 스물세 살까지 살면서도 남을 위해 위험을 감수한 적이 없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배지은이 임신했다고 전화했을 때도 나는 게임을 하면서 건성으로 대답하고 끊었다. 그런 인간이었다. 회사에서 후배가 야근에 시달릴 때도, 모른 척 먼저 퇴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발이 저절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유는 나도 몰랐다.
마당을 가로질러, 담벼락 옆의 개구멍 같은 틈으로 빠져나갔다. 열두 살 몸이라 다행이었다. 서른셋의 몸이었으면 어깨가 걸려 넘어졌을 거다.
서쪽 밭은 저택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흙길을 따라 뛰는 동안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것처럼 뛰었다. 밀이 자라다 만 밭 사이로, 남루한 옷을 입은 남자가 여자아이의 팔을 붙들고 있는 게 보였다. 여자아이는 여덟 살쯤 되어 보였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신발 한 짝이 벗겨진 채였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아이가 흐느꼈다.
남자의 손에는 단검이 들려 있었다. 날이 흐릿하게 빛을 반사했다. 병사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밭 사이에 숨어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나서면 안 돼. 나는 열두 살 아이야.' 이성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몸이 떨렸다.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몸은 이미 흙바닥을 밟고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발밑에서 마른 밀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바스락.
남자가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 아이 놔줘요." 나는 소리쳤다.
목소리가 떨렸다. 남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험악한 얼굴이었다. 광대뼈에 오래된 흉터가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순간 당황했다가, 이내 비웃음을 지었다. "꼬마가 여기 왜 나와."
"놔주면 아무 말도 안 할게요." 나는 말도 안 되는 협상을 시도했다. 무릎이 후들거렸다. 스스로도 우스운 협상이라는 걸 알았다. 저 남자가 여덟 살짜리 인질에 이어 열두 살짜리까지 붙잡는다고 손해 볼 게 뭐가 있겠나.
남자는 웃으며 단검을 아이의 목에 더 가까이 댔다. "저리 꺼져. 안 그러면 이년부터 죽인다."
아이가 숨을 멈추듯 흐느낌을 삼켰다. 그 소리가 오히려 더 무서웠다.
그 순간, 손끝이 아렸다.
어젯밤과 같은 감각이었다. 두려움이 통증처럼 온몸을 관통했다. 손이 저절로 떨리면서, 손톱 끝에서 하얀 서리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손등의 솜털까지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걸 본능적으로 밀어냈다. 정확히 뭘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저 남자와 아이 사이의 거리를 얼려버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파직.
남자의 발밑 흙바닥이 순식간에 하얗게 얼어붙었다. 서리가 부챗살처럼 퍼져나가는 게 보였다. 그가 놀라 발을 헛디뎠다. 균형을 잃으면서 단검을 놓쳤다. 쇳소리가 짧게 울렸다.
챙그랑.
아이가 그 틈을 타 팔을 빼내고 나를 향해 달려왔다. 작은 몸이 부딪히듯 안겨왔다. 나는 그 애를 붙잡을 힘도 없어서, 그냥 함께 넘어질 뻔했다.
"이런 미친…" 남자가 얼어붙은 발을 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발을 빼내려 애썼지만 서리가 신발째로 흙을 붙잡고 있었다. 그는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눈에 살기가 돌았다. 나는 그 눈빛을 보고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저 남자가 나한테 달려들 수도 있다는 걸.
다행히 그럴 시간은 없었다.
그때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다각다각. 점점 커졌다. 이준혁이었다. 그는 상황을 한눈에 파악하고 말에서 뛰어내려 남자를 제압했다. 순식간이었다. 팔을 꺾고 무릎으로 등을 누르는 동작이 군더더기 없었다. 남자가 신음을 흘리며 흙바닥에 짓눌렸다. 병사들도 뒤이어 도착해 남자를 포박했다. 밧줄이 손목을 감는 소리가 들렸다.
이준혁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이 밭바닥의 서리를 훑고, 다시 내 손끝을 보았다. 나는 손을 등 뒤로 급히 숨겼다. 늦었다. 이미 다 본 뒤였다.
"…네가 한 거냐." 그가 낮게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이가 내 뒤에서 여전히 울고 있었다. 그 흐느낌만이 정적을 채웠다. 병사들도 곁눈질로 나를 보고 있었다. 시선이 여러 개 얹히는 게 느껴졌다.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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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박된 정탐꾼은 저택으로 끌려갔다. 남자는 끌려가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나를 노려보는 것 같기도 했고, 그저 억울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다시 볼 일은 없을 것 같았으니까.
이준혁은 나를 따로 방으로 불렀다. 문을 닫은 뒤, 그는 한참 나를 내려다보았다. 방 안은 조용했다. 창밖에서 병사들이 오가는 발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밖에 나가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의 목소리엔 화가 아니라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죄송해요." 나는 고개를 숙였다. 진심이었다. 동시에, 그의 다음 말이 두려웠다.
"그 얼음. 네가 한 게 맞느냐."
나는 잠시 침묵했다. 거짓말할 여지가 없었다. 이미 다 본 사람 앞에서 발뺌하는 건 오히려 더 의심을 사는 짓이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인정하는 것도 두려웠다. 이 세계에서 마력을 가진 아이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아직 다 알지 못했다.
"…모르겠어요. 그냥, 무서워서 손이 저절로 그렇게 됐어요." 반은 진실이었다.
이준혁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췄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이 아니라 놀라움과, 어떤 확신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너는 특별한 아이구나." 그가 낮게 말했다. "소이가 말한 마력 친화 체질이라는 것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저는 그냥…"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괜찮다." 이준혁이 내 어깨를 잡았다. 손이 크고 뜨거웠다. "오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마. 목격한 병사들에게도 입단속을 시킬 것이다." 그의 눈빛이 단호해졌다. "네가 이런 힘을 가졌다는 게 알려지면, 위험해질 수 있다. 정탐꾼도 그렇고, 이 마을에 첩자가 더 있을지 모른다."
'입단속.' 나는 속으로 그 단어를 곱씹었다. 위험한 결정이었다. 목격자들의 입을 막는다는 게 얼마나 큰 리스크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사람 입은 원래 새는 법이고, 병사가 몇이었는지도 정확히 몰랐다. 하지만 이준혁의 표정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이미 결심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탐꾼은 어떻게 되나요." 나는 물었다.
"오늘 밤 안으로 처리할 것이다." 그의 목소리가 단단하게 굳었다. "조용히."
나는 그 말의 무게를 알았다. 처형이라는 뜻이었다. 이 세계에서 정탐꾼에게 어떤 처벌이 내려지는지 정확히는 몰랐지만, 이준혁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미 마음을 정했고, 나는 그것을 묵인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 그게 옳은 건지 그른 건지는, 그 순간엔 판단할 여유가 없었다.
"하준아." 이준혁이 내 두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여전히 뜨거웠다. 굳은살이 만져졌다. "오늘부로 확실히 정하마. 너는 내 아들이다. 서류상으로도, 마음으로도."
그 말에 나는 순간 멍해졌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아들이라니.' 스물세 살까지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런 무조건적인 선언을 받아본 적이 있었나 생각해봤다. 없었다. 부모님과도 데면데면했고, 명절에도 겨우 얼굴만 비추는 사이였다. 여자친구들에게도 책임감 있게 대한 적이 없었다. 그런 내가, 이 낯선 세계에서 처음으로 누군가의 '아들'로 확정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겨우 그 말만 뱉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연기가 아니었다.
이준혁은 내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서 쉬거라. 오늘 놀랐을 테니." 그는 문을 열고 나가면서 병사에게 뭔가를 낮게 지시했다. 문틈으로 "밭 근처는 아무도 얼씬 못 하게 해라"라는 말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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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나는 창가에 앉아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 창고 근처에서 병사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횃불이 몇 개 흔들리고 있었다. 정탐꾼이 끌려가는 뒷모습도 언뜻 스쳤다.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나는 눈을 돌렸다. 보고 싶지 않았다.
똑똑.
한소이가 문을 두드렸다. "약을 발라줄게요." 그녀는 들어와 내 손을 살폈다. 서리가 앉았던 자리를 유심히 보았다. 손끝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오늘 있었던 일, 남작님께 들었어요."
"…네." 나는 짧게 답했다.
한소이는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조금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진료를 보는 눈빛이 아니라, 뭔가를 가늠하는 눈빛이었다. "당신, 진짜 열두 살 맞아요?"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눈빛은 진지했다.
나는 심장이 덜컹했다. "…네?"
"아니에요." 그녀가 웃으며 손을 저었다. 하지만 그 웃음이 아주 짧게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온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냥, 요즘 애답지 않게 침착해서요." 그녀는 약을 마저 바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끝에서 화한 약초 냄새가 났다. 문을 나서기 전, 그녀는 한 번 더 나를 돌아보았다. "조심해요. 마력이 튀는 체질은, 눈에 띄기 쉬우니까."
그녀가 나가고 문이 닫혔다.
나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들킬 뻔했다.' 다행이었다. 이번엔.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넘어갈 수 있을까. 한소이의 눈빛은 단순한 걱정이 아니었다. 뭔가를 캐고 있는 눈빛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더 알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정탐꾼이 있었다는 것은, 이 마을에 또 다른 눈이 있을지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눈이 향하는 곳이 어디일지, 나는 왠지 알 것 같았다.
창밖에서 낮게 울리던 말소리가 뚝 끊겼다. 이어 짧은 신음, 그리고 완전한 정적.
나는 이불을 더 끌어올렸다. 잠은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