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2등은 거절하겠습니다

4화

현관문을 열자마자 어머니, 오미경 씨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날아왔다. "도현아, 너 요즘 밤에 어디 갔다 오는 거야?" 나는 신발을 벗다 말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발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균형이 살짝 흔들렸는데, 그 순간 발바닥이 살짝 회색빛으로 굳는 게 느껴질 정도로 당황했다. 심장이 쿵, 하고 한 박자 늦게 뛰기 시작했다. 들켰나. 아니, 정확히 뭘 들켰다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반사적으로 죄책감부터 밀려왔다. 요 며칠 새벽마다 몰래 빠져나가 인적 없는 강변을 뛰고, 밤늦게까지 옥상에서 능력 실험을 하고 돌아온 게 하루이틀이 아니었으니까. "그, 그냥… 운동하고 왔어요." 나는 말끝을 흐리며 거실로 들어섰다. 목소리가 예상보다 더 갈라져 나와서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 어머니는 팔짱을 낀 채 소파에 앉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평소와 달리 심각해서,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어머니는 평소라면 잔소리를 하다가도 금세 웃으며 넘어가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눈매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운동? 새벽 다섯 시부터? 그리고 오늘은 밤 열 시가 넘어서 들어와?"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다가왔다. 슬리퍼 끄는 소리가 거실 바닥을 타고 유난히 크게 울렸다. "엄마가 눈치 없는 사람인 줄 알아? 요즘 너 밥도 제대로 안 먹고, 살은 쭉쭉 빠지는데 근육만 늘고, 방에서는 이상한 노트 쓰면서 밤새우고. 도대체 뭐 하는 거야?" 나는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시선을 떨궜다. 어머니의 러버 능력, 몸을 고무처럼 늘리고 굽히는 그 힘이 지금 이 순간에는 마치 나를 붙잡아 옭아매는 것처럼 느껴져서 손끝이 차갑게 식는 걸 느꼈다. 실제로 잡힌 것도 아닌데 목덜미가 조여드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전생의 기억이 있어서, 이 세계가 원작이라는 걸 알아서, 그래서 이번 생만큼은 다르게 살고 싶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엄마…"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저, 화랑영웅학교 입시… 1위 하고 싶어요." 그 말을 뱉는 순간 거실 안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서늘해진 것 같았다. 어머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빤히 바라보았고, 나는 그 침묵이 견디기 힘들어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벽시계 초침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 침묵 속에서 시간이 유독 느리게 흘렀다. "1위?" 어머니가 되물었다. 목소리에 어이없다는 기색과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너, 원래 상위권이면 충분하다고 했었잖아. 실기 3등급, 필기 2등급 정도면 어디 가서도 부끄럽지 않은 성적이라고, 네 입으로 그렇게 말했었잖아. 근데 갑자기 1위? 왜 이렇게까지 무리를 하는 건데." 맞는 말이었다. 나 스스로도 몇 달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방어형 능력으로 후방에서 조용히 버티다가, 남들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안전하게 졸업하는 것. 그게 원래 계획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그 순간 마침 현관문이 열리며 아버지, 한석주 씨가 들어섰다. 퇴근하고 돌아온 아버지는 거실의 무거운 공기를 감지했는지 넥타이를 풀던 손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이 녀석이 이상한 소리를 하잖아요. 화랑영웅학교 1위 하겠다고." 어머니가 팔짱을 낀 채 말하자 아버지의 시선이 곧장 내게 꽂혔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이번만큼은 도망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컸다. 무릎이 살짝 떨렸는데도, 발을 옮겨 물러서지는 않았다. "…이유가 뭔데." 아버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암석 주먹 능력을 가진 아버지는 평소 말수가 적었지만, 그 짧은 물음 안에 담긴 무게가 얼마나 큰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저런 눈으로 물을 때는, 대충 얼버무린 대답으로는 넘어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목이 타는 것 같아 입술을 한 번 축이고 나서야 말이 이어졌다. "그냥… 남들이 정해놓은 순위 안에서 만족하고 싶지 않아요. 제 능력이 방어형이라고, 후방 지원용이라고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데, 저는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기 싫어요. 남들이 저를 어디까지라고 정해놓은 그 선 안에서만 살고 싶지 않아요." 원작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지만, 이 말만큼은 거짓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이 실망인지 안도인지 가늠이 되지 않아서, 나는 아버지의 눈빛만 더듬듯 살폈다. "그래서 몸을 그렇게 혹사시키는 거야?" 어머니가 다시 끼어들었다.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요즘 네 팔 좀 봐. 멍자국이 없는 날이 없더라. 엄마는 네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그게 제일 걱정이야. 1등이고 뭐고, 엄마는 그냥 네가 무사히 학교 다니는 걸로 충분해." 그 말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어머니의 걱정이 진심이라는 걸 알기에, 더 마음이 아팠다. "…죄송해요. 근데 저 진짜 이번엔 후회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그렇게 말했다. 목이 메어오는 걸 참으며 겨우 뱉은 말이었다. 후회하고 싶지 않다는 그 말 속에는, 두 분은 절대 알 수 없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거실에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벽시계 초침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려오는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부모님의 반응을 기다리며 손끝을 떨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바라보았고, 아버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의 삼각형 안에서 나는 마치 심판대에 오른 기분이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아버지였다. "…좋아. 대신 조건이 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걱정과 함께, 어딘가 흥미로워하는 듯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마치 오래전에 잊고 있던 무언가를 다시 발견한 사람의 표정 같기도 했다. "네 훈련, 이제부터 내가 검증한다. 무리하다 다치는 것보다는, 제대로 된 방식으로 강해지는 게 낫지 않겠어? 지금처럼 혼자 새벽에 나가서 되는대로 몸만 굴리는 건, 강해지는 게 아니라 망가지는 거야." 그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아버지가 직접 훈련을 봐주겠다는 뜻이었고, 그건 내가 예상치 못한 방향의 전개였다.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두려움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긴장이었다. "…여보." 어머니가 아버지를 돌아보며 뭔가 말을 하려다 삼켰다.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남편의 얼굴에서 어떤 확신을 읽었는지 더 이상 반대하지는 않았다. "…감사합니다." 나는 겨우 그렇게 대답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다른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아버지가 직접 훈련에 개입한다는 건, 내 능력의 한계와 가능성을 훨씬 더 가까이서 지켜본다는 뜻이었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내가 숨기고 있는 진짜 비밀, 그러니까 전생의 기억까지 눈치챌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내가 원작을 알고 있다는 걸. 이 세계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누가 어떤 결말을 맞는지, 그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다는 걸. 그날 밤 나는 잠자리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방 안의 온도가 유독 낮게 느껴졌고,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도 손끝의 냉기는 가시지 않았다. 내일부터는 아버지의 눈을 마주하며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 시선 속에서, 나는 얼마나 더 나 자신을 숨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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