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그로부터 보름 남짓, 다행히 별다른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사는 그날 이후로 부쩍 신중해진 듯했다. 밤마다 몸을 뒤척이며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그녀는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멀리 간다, 저 우리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며 낮게 중얼거렸고, 실제로도 양 떼가 있는 우리와는 멀찍이 떨어진 방향으로만 움직이려 애쓰는 눈치였다. 나는 그런 아사의 변화가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편했는데, 마치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고요함처럼, 그 평온함이 언제 또 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최노인의 의심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처음엔 나를 흘겨보는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더니, 며칠이 지나면서부터는 다시 예전처럼 무뚝뚝하게 일을 시키고 지팡이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정도로 돌아왔으니, 나로서는 그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다시 낮 동안 목양 일을 하며 그럭저럭 평온한 나날을 이어갔고, 나는 그 평온함 속에서 이 청랑국이라는 낯선 세계에도 조금씩 적응해가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곤 했다.
"오늘은 저 언덕 너머 초지까지 가서 풀을 뜯겨야 하니께, 단단히 준비혀."
최노인이 그렇게 말하며 지팡이를 짚고 앞장서 걷는 걸 보며, 나는 설이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뒤를 따랐다. 설이의 하얀 털은 아침 이슬에 살짝 젖어 반들거렸고, 녀석은 내 손길에 낮게 그르렁거리며 꼬리를 흔들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녀석의 얼굴을 마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설이는 이제 완전히 우리의 일원이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양 떼 주변을 맴돌며 길을 잃은 녀석들을 몰아주기까지 했다. 무리에서 벗어나려는 어린 양이 있으면 귀신같이 알아채고는 앞을 가로막아 방향을 틀게 만들었고, 가끔은 낮게 짖어 다른 양들에게 신호를 보내기도 했으니, 그 든든함에 최노인도 요즘은 설이를 향해 대놓고 육포를 던져주며 "옜다, 잘했다" 하는 칭찬까지 아끼지 않았다. 처음엔 그렇게 무뚝뚝하던 노인이 개 한 마리에게는 저리도 살가운가 싶어 나는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났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뒤를 따를 뿐이었다.
언덕을 오르는 길은 제법 가팔라서, 발을 디딜 때마다 마른 풀잎이 서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바람은 선선했고, 저 멀리 초지 위로는 아지랑이가 아른거리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양 떼는 그 익숙한 길을 따라 순순히 걸음을 옮겼는데, 이따금 게으른 녀석 하나가 걸음을 멈추고 풀을 뜯으려 하면 설이가 쏜살같이 달려가 그 앞을 가로막곤 했다.
그렇게 저물어가는 오후, 언덕 위에 걸터앉아 잠시 숨을 돌리던 나는 문득 최노인이 낮게 흥얼거리는 노랫가락을 들으며 물었다. 그 가락은 어딘가 구슬프면서도 정겨운 데가 있어서, 나는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원래부터 여기서 사셨어요?"
"그럼 어디서 살았겠어. 나도 젊었을 적엔 이런 촌구석 말고 왕성 근처에서 살아볼까 궁리도 했었지만서도, 인연이 안 닿았지 뭐여."
최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저물어가는 햇살이 그의 주름진 얼굴 위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는데, 그 표정에서 나는 처음으로 이 까칠한 노인에게도 나름의 사연이 있었으리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했다. 왕성이라... 그 말속에 담긴 어떤 미련 같은 것이, 노인의 목소리 끝에 살짝 걸려 있는 듯도 했다.
"어떤 인연이었는데요?"
내가 조심스레 물었지만, 노인은 곧 표정을 지우고는 다시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와 지팡이로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저기 양 새끼나 몰아와."
탁!
지팡이가 옆구리를 찌르는 소리와 함께, 노인은 더 이상의 대화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지고 걸어가버렸다. 나는 괜스레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의 뒷모습에서 더는 캐물어선 안 될 것 같은 단호함이 느껴져 나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렇게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가 흘러가는 듯했다. 양 떼를 몰아 우리로 돌아오는 길, 노을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설이는 앞장서서 신이 난 듯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저녁을 먹고 짚더미 위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도, 나는 그날이 그저 또 하루의 평범한 마무리이려니 여겼다.
그러나 그날 밤, 나는 이상하게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짚더미 위에 누워 뒤척이던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낮에 최노인이 지었던 그 씁쓸한 웃음을 자꾸만 떠올렸고, 동시에 가슴 한구석이 까닭 모르게 술렁이는 기분에 시달렸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오두막 밖으로 나가 밤바람을 쐬기로 했는데, 그때 문득 저 멀리서 낮은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온 것 같아 걸음을 멈췄다.
아우우우우...
그 소리는 길게 이어지다가 뚝 끊겼는데, 마치 무언가에 목이 졸린 듯한 끝맺음이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어둠 속에 귀를 기울였다.
[다른 늑대다. 낯선 냄새군.]
아사의 목소리에 긴장이 서려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경계하는 목소리를 낸 건 처음이라, 나는 저도 모르게 손끝이 저릿해지는 걸 느끼며 어둠 속을 응시했다. 저 멀리 언덕 능선 위로, 달빛에 비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우리 오두막 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 형체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고, 짐승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깨 언저리가 유난히 크고 뒤틀려 있는 듯한 실루엣이었는데, 달빛을 등지고 서 있어서 그런지 윤곽조차 온전히 잡히지 않았다.
"저게... 뭐야?"
내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모르겠다. 하지만 좋은 기운은 아니야.]
아사의 대답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목소리에도 두려움 비슷한 것이 섞여 있다는 걸 느꼈다. 신수라 불리는 존재조차 저리 경계하는 상대라면, 대체 어떤 것이란 말인가.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림자를 응시했다.
그 그림자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둠 속으로 스르르 사라져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서 있다가,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끼며 겨우 오두막 안으로 돌아와 다시 자리에 누웠지만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심장이 아직도 쿵쿵거리며 뛰고 있었고, 방금 본 그 그림자가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사, 방금 그거... 정말 늑대였을까?"
[......]
아사는 잠시 침묵하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 존재, 어쩌면 치우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치우? 아까 말했던 그 전쟁신?"
[그래. 나를 저주한 자다. 이 청랑국 어딘가에 그의 흔적이 남아있다 해도 이상할 게 없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 평온한 일상 뒤에 무언가 거대한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최노인이 살아온 이 작은 오두막과 초원, 설이와 함께하는 평화로운 나날들,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아주 얇은 살얼음 위에 놓여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럼... 그 저주라는 게 대체 뭔데? 왜 아직도 나한테 말을 안 해주는 거야?"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
"그 소리 좀 그만해. 매번 때가 되면, 때가 되면... 대체 언제가 때인데?"
[......]
아사는 다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답답해서 나는 몇 번이고 더 캐물으려 했지만, 몸의 피로가 밀려오면서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그러나 그 예감을 미처 정리하기도 전에, 나는 서서히 의식을 잃어갔다.
그리고 그날 밤, 사달이 나고야 말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낯선 냄새와 함께 눈을 떴다. 비릿하고 축축한, 처음 맡아보는 냄새였다. 손에 뭔가 끈적한 것이 묻어있는 걸 느끼고 시선을 내리는 순간, 나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손끝에서부터 팔뚝까지, 온통 붉은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이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떨리는 손을 눈앞에 들어 올린 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애써 부정하려 했다.
[......]
아사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 침묵이 무엇보다 불길하게 느껴져서, 나는 떨리는 손으로 몸을 일으켜 오두막 밖으로 뛰쳐나갔다. 문을 밀치고 나가는 순간, 아침 공기 속에 섞인 그 비릿한 냄새가 더욱 진하게 코를 찔렀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보고 말았다.
오두막 앞마당, 항상 최노인이 아침마다 지팡이를 짚고 서 있던 그 자리에, 최노인이 쓰러져 있었다. 목덜미가 깊게 찢겨나간 채로,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몸으로.
우뚝!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 서서, 눈앞의 광경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저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
대답은 없었다.
설이가 그 곁에서 낮게 낑낑거리며 최노인의 옷자락을 코로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마치 어서 일어나라는 듯, 아니 어쩌면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믿고 싶지 않다는 듯.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목이 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침 햇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화롭게 초원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그 눈부신 햇살이, 오늘따라 유난히 잔인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내 손에 묻은 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