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천마세가의 정문 앞, 이른 새벽부터 몰려든 짙은 안개가 채 걷히기도 전에 어느새 백여 명에 달하는 성회의 무인들이 반원을 그리며 늘어서 있었다. 저마다 검을 허리에 찬 채 정연한 대오를 이루고 선 그들의 모습은 언뜻 위풍당당해 보였으나, 그 뒤로는 흑암산 아래 마을에서 끌려온 것이 분명한 양민 수백 명이 밧줄에 줄줄이 엮인 채 무릎을 꿇려져 있어, 그 대비가 오히려 섬뜩한 위화감을 자아냈다. 아이를 품에 안은 아낙의 어깨가 추위와 두려움으로 잘게 떨리고 있었으며, 노인들의 마른 기침 소리가 간간이 정적을 깨뜨렸으니, 그 광경을 본 이무한의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이신은 처음 목격했다.
대열의 맨 앞에 선 노인은 백발을 정갈하게 틀어 올리고 학창의를 걸친 모습이 얼핏 고고한 도인처럼 보였으나, 그 눈빛만은 살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어 도무지 정파의 인물답지 않은 위화감을 풍겼다. 그가 바로 성회의 장로, 현진도장(玄眞道長)이었다. 그의 뒤에 시립한 무인들의 검집에는 성회를 상징하는 은빛 문양이 새겨져 있어, 정파의 명분을 앞세운 자들이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리고 있었다.
"천마세가의 가주를 뵙습니다." 현진도장이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췄으나, 그 목소리에는 조롱에 가까운 여유가 묻어 있었다. 마치 이미 승패가 정해진 대국을 지켜보는 자의 태도였다. 이무한은 애써 분노를 억누르며 앞으로 나섰다. 그의 발걸음마다 눈이 서걱서걱 밟히는 소리가 났는데, 그 소리조차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를 가르지 못할 만큼 정문 앞의 침묵은 짙었다.
"이 무슨 무례요. 아무런 통첩도 없이 무고한 백성을 끌어다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성회는 대체 무슨 셈속이오." 그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그 안에는 억누른 살기가 서려 있었다. 현진도장은 뒷짐을 진 채 천천히 걸어 나오며, 마치 자신이 정의의 사자라도 되는 양 태연히 입을 열었다.
"세가에 보관된 훼체취령과(毁體聚靈果)를 내어주시면, 이 사람들은 무사히 돌려보내드리겠소." 그의 말투는 담담했으나,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소름 끼치는 것이었으니, 마치 사람의 목숨을 물건 값 매기듯 논하는 자의 태연함이었다.
훼체취령과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이무한의 낯빛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그것은 천마세가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절세의 영약이자, 잘못 다루면 오히려 복용자의 몸을 파괴하는 극악한 성질을 함께 지닌 물건으로, 세가 안에서도 오직 가주만이 그 보관처를 알고 있었다. 대대로 가주에서 가주로만 은밀히 전해지던 비밀이 어찌 외부에 새어 나갔단 말인가. 이신은 아버지의 등이 순간적으로 굳는 것을 보았는데, 평소 태산처럼 흔들림 없던 그 넓은 등판이 이토록 위태로워 보인 적이 없었다.
"그 물건이 어찌 밖에 알려졌단 말이오." 이무한이 낮게 되물었으나 현진도장은 그저 엷은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으니, 세가 내부에 첩자가 있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침묵 속에서 이신은 아버지의 옆얼굴에 스치는 낭패감을 처음으로 보았다.
이신은 무릎 꿇린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낯익은 얼굴들을 발견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세가 아래 저잣거리에서 떡을 팔던 노파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매번 그를 향해 웃어주던 대장간의 소년 역시 밧줄에 손목이 쓸려 벌겋게 부어오른 채 겁에 질려 있었다. 그 어린 얼굴이 자신을 알아보고는 입술을 달싹이는 것을 본 순간, 이신의 심장은 마치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협상은 없소." 이무한이 마침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세가의 보물을 내어주는 순간, 저들의 목숨도 함께 사라진다는 걸 내 어찌 모르겠소." 그것은 오랜 세월 강호를 겪어온 자만이 알 수 있는 확신이었다. 인질을 앞세운 협상이 어디 한두 번 본 수작이던가.
현진도장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과연, 천마세가의 가주답게 눈치가 빠르시구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조롱도 아닌, 순수한 감탄과도 같은 것이 섞여 있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더 잔혹하게 들렸다. 그가 손을 슬쩍 들어 올리자, 그 뒤에 도열해 있던 성회 무인들의 검끝이 일제히 인질들의 목덜미를 겨누었다. 쇠붙이가 부딪치는 서늘한 쇳소리가 정문 앞을 스산하게 훑고 지나갔다.
바람이 골짜기를 타고 세차게 불어오며 정문 앞에 쌓인 눈발을 흩날렸는데, 그 서늘한 기운 속에서 이신은 처음으로 자신의 몸속에서 각성한 빛의 힘이 두려움과 함께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손끝이 저릿하게 저려오고, 심장 박동이 귓속에서 울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으니, 그것이 공포인지 혹은 다른 무엇인지 그 자신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이무한은 아들을 뒤로 물리며 낮게 속삭였다. "신아, 무슨 일이 있어도 물러서 있거라." 그 목소리에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아버지의 음성 속에 처음으로 두려움과 비슷한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그 말속에 담긴 절박함을, 이신은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한 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정문 앞을 채운 백여 명의 무인들과 그 뒤로 늘어선 수백의 인질들, 그리고 뒷짐을 진 채 여유롭게 미소 짓는 현진도장의 모습이 잿빛 하늘 아래 하나의 그림처럼 정지해 있었다. 협상은 이미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고, 그 파국의 신호탄이 곧 터지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