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이무한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검붉은 기운이 마치 살아 있는 짐승처럼 그의 몸을 휘감았는데, 그 기운이 짙어질수록 그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가고 얼굴에는 순식간에 깊은 주름이 패어들어 마치 몇 년의 세월을 단숨에 건너뛴 듯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불과 반각 전까지만 해도 흑단 같던 머리칼이 서리 내린 갈대처럼 희끗해지고, 형형하던 눈빛 아래로는 검버섯 같은 그늘이 내려앉으니, 이신은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면서도 도무지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평생 자신을 안고 무공을 가르치던 그 손이, 지금은 마치 죽음을 앞둔 노인의 손처럼 뼈마디가 앙상하게 드러나 보였던 것이다.
"아버님, 안 됩니다!"
이신이 목이 찢어질 듯 소리쳤으나 이무한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현진도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 뒷모습이 어찌나 결연한지, 이신은 순간 아버지의 등이 자신이 알던 것보다 훨씬 좁고 여위어 보인다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으나, 아버지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만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쾅!
두 사람이 격돌하는 순간 골짜기 전체가 뒤흔들리며 눈 쌓인 나뭇가지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이무한의 일장이 마치 태산이 무너지듯 현진도장의 가슴을 향해 짓쳐들자, 그 여파만으로도 인근 무인들 몇이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고, 나머지는 감히 그 근처에 다가서지도 못한 채 안색이 하얗게 질려 뒷걸음질을 쳤다. "저, 저것이 정녕 사람의 힘이란 말인가……."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렸으나, 그 목소리는 바람에 실려 이내 흩어지고 말았다.
"이럴 수가……."
현진도장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여유가 사라지고 당혹감이 스쳤는데, 그것은 만마경 후기의 고수인 그조차도 예상치 못한 위력이었다. 그가 급히 검을 세워 막았으나 팔뚝이 저릿하게 울리며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서야 했으니, 지난 삼십 년간 강호를 종횡하며 단 한 번도 이런 굴욕을 당한 적이 없던 그로서는 실로 낯선 감각이었다.
이무한은 연이어 붕권(崩拳, 마치 무너지는 산이 짓누르듯 내지르는 권법)을 펼치며 현진도장을 몰아붙였고, 그때마다 검붉은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 나와 주변의 눈발을 순식간에 증발시켰다. 그의 주먹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마치 천둥이 대지를 가르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으며, 그 여파로 골짜기 양편의 절벽에서까지 돌가루가 부스스 떨어져 내릴 지경이었다.
휘이잉! 콰과광!
이신은 그 압도적인 광경에 넋을 잃은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는데, 평생 온화하기만 했던 아버지에게서 이런 파괴적인 힘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고도 두려웠다. 문득 어린 시절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검법의 기초를 배우던 기억이 떠올랐으나, 그 기억 속의 온화한 얼굴과 지금 눈앞의 처절한 모습이 도무지 겹쳐지지 않아 이신은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현진도장은 연신 뒷걸음질을 치며 검을 놀렸으나, 이무한의 공세는 마치 끝없이 밀려드는 파도처럼 한 치의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검이 몇 번이나 이무한의 옷깃을 스쳤음에도 정작 살갗에는 닿지 못했으니, 마치 폭풍 속에서 촛불 하나를 지키려 애쓰는 형국과 다르지 않았다.
"이 늙은이가 감히 내 아들 앞에서."
이무한이 나지막이 내뱉은 한마디에는 부성(父性)이 극한의 분노로 화한 흔적이 역력했다. 그 목소리는 낮았으나 마치 얼음장 밑을 흐르는 급류처럼 서늘한 살기가 배어 있어, 곁에서 듣던 이신조차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 압도적인 우세 뒤편에는 아무도 모르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회천귀원공은 시전자의 생명력을 대가로 짧은 시간 동안 무한에 가까운 힘을 끌어올리는 대신, 그 지속 시간이 다하는 순간 술자의 내력이 급격히 붕괴하여 오히려 이전보다 더 큰 약체가 되어버리는 치명적인 반동을 지니고 있었으니, 마치 타오르던 장작불이 마지막 불꽃을 다 태우고 나면 차디찬 재만 남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것을 이무한 자신도 익히 알고 있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들을 지킬 수만 있다면 그 대가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현진도장은 몇 차례 궁지에 몰리는가 싶더니, 문득 입가에 서늘한 미소를 되찾으며 검을 거두고 멀찍이 물러섰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더 이상 당혹감이 아니라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여유가 스며들어 있었다.
"과연 천마세가의 가주로다. 허나……."
그가 하늘을 힐끗 올려다보며 말끝을 흐리는 그 순간, 이신은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골짜기 위로 낮게 드리운 잿빛 구름 사이로 눈발이 다시 흩날리기 시작했는데, 그 눈송이 하나하나가 마치 시간을 재는 모래알처럼 느껴져 이신의 심장을 옥죄었다. 마치 그 노인이 시간이 자신의 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그의 눈빛에는 조급함 대신 기묘한 확신만이 서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무한의 검붉은 기운이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