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아버지, 원수는 갚겠습니다

3화

현진도장은 팔짱을 낀 채 천마세가의 정문을 바라보며, 시간을 끄는 것이 자신의 진짜 목적이라는 사실을 감춘 채 짐짓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의 등 뒤로 늘어선 성회의 무인들은 저마다 검을 뽑아 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는데, 그 살벌한 정적이 오히려 눈 덮인 흑암산의 골짜기를 더욱 무겁게 짓누르는 듯했다. 하늘에서는 잿빛 구름 사이로 눈발이 성기게 흩날리고 있었고, 그 눈송이들이 정문 앞에 무릎 꿇려진 인질들의 어깨 위로 쌓여 가는 광경이 마치 얼어붙은 시간을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가주께서 결정을 내리시는 데 그리 오래 걸릴 줄은 몰랐소." 현진도장이 손끝으로 허공을 가볍게 튕기자, 인질들 사이에서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 손짓 하나에 담긴 기운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이무한은 직감했으나,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오히려 저들의 목숨을 재촉할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두 주먹을 움켜쥔 채 이를 악물었다. "물건을 넘기기 전에, 저 사람들부터 풀어주시오." 이무한이 다시 한번 협상을 시도했다. 그의 목소리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는 듯했으나, 미세하게 떨리는 어깨의 근육까지는 감추지 못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진도장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고, 그가 짓고 있던 여유로운 미소마저 서서히 지워져 갔다. "믿음이라는 것은 원래 쌍방이 나누는 것 아니겠소." 그가 나지막이 내뱉은 그 한마디와 함께, 허리춤에 걸려 있던 검이 순식간에 뽑혀 나왔다. 그 검신에 반사된 눈빛이 마치 겨울 태양처럼 차갑게 번뜩이는가 싶더니, 맨 앞줄에 무릎 꿇려진 노파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서걱! 붉은 피가 흰 눈밭 위로 흩뿌려지는 광경에, 이신은 순간 숨이 턱 막혀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노파의 몸이 앞으로 천천히 쓰러지며 눈 위에 남긴 붉은 자국이 마치 매화 꽃잎처럼 번져 나가는 것을, 이신은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은 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것은 그가 태어나 처음으로 목격한 사람의 죽음이었으며, 그 장면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동안 그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버린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미친……." 이무한이 격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으나, 현진도장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다시 검을 휘둘렀다. 쐐액! 쐐액! 연이어 검광이 번뜩일 때마다 무릎 꿇린 사람들이 하나둘 쓰러져 갔다. 그중에는 이무한과 낯이 익은 대장간의 늙은 장인도 있었고, 매일 아침 물을 길어 나르던 아낙도 있었으며, 이신과 함께 산기슭에서 놀던 또래의 대장간 소년도 섞여 있었다. 그 참혹한 살육이 마치 무료한 유희라도 되는 양 현진도장의 얼굴에는 아무런 동요도 비치지 않았고, 오히려 그 무표정함이 지켜보는 이들의 간담을 더욱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 정도면 가주께서도 성회의 진심을 아셨으리라 믿소." 그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을 늘어뜨린 채 태연히 말하자, 이무한의 두 눈에서는 이미 이성의 끈이 끊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의 관자놀이에서 핏줄이 툭 불거져 나왔고, 주먹을 쥔 손등의 뼈마디가 하얗게 변할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신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으나, 대장간 소년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쓰러지는 모습을 목격한 순간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것이 분노인지, 슬픔인지, 아니면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낯선 살의인지 구분할 수 없었으나, 귓속에서 웅웅거리는 이명과 함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의 몸속에 잠들어 있던 지존광계의 기운이 다시금 요동치기 시작했으며, 손끝에서부터 저릿한 감각이 팔뚝을 타고 올라왔다. "신아, 눈을 감아라." 이무한이 다급히 아들의 눈을 손으로 가렸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이신의 두 눈에는 이미 그 참혹한 광경이 지워지지 않을 낙인처럼 새겨진 뒤였고, 그 아이의 작은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아비의 손바닥은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이무한의 등 뒤로 서서히 검붉은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마치 살아있는 짐승처럼 그의 어깨와 등줄기를 타고 넘실거렸는데, 그것이야말로 그가 평생 봉인해 두었던 금단의 심법, 회천귀원공(回天歸元功)의 전조였다. 그 공법은 스스로의 생명력을 태워 순간적으로 전투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대신, 시전자의 수명을 갉아먹는 극악한 필살기로, 이무한조차 지금껏 단 한 번도 실전에서 펼친 적이 없었다. 세가의 오래된 문서에는 그 공법을 두고 "하늘을 되돌리려면 하늘이 그 대가를 반드시 거두어 간다"고 기록되어 있을 만큼, 후대의 그 누구도 함부로 손대지 못한 금기의 무공이었다. "너희가, 감히."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인간의 것이라 하기 어려울 만큼 낮게 가라앉아 있었고, 두 눈에는 핏발이 서린 듯 붉은빛이 감돌았다. 그 순간 흑암산 전체가 뒤흔들리는 듯한 진동이 골짜기를 타고 퍼져 나갔으며, 정문 위에 쌓여 있던 눈더미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현진도장의 표정에서도 처음으로 옅은 긴장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그가 검을 고쳐 쥐며 한 걸음 물러서는 그 짧은 순간, 골짜기를 휘감던 바람의 방향이 문득 바뀌었으니, 그것은 흡사 하늘조차 다가올 파국을 예감하고 몸을 사리는 듯한 조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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