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잔고 무한, 낮에는 노가다

1화

총구가 나를 향했을 때, 나는 웃고 있었다. 기억나는 건 그것뿐이다. 두목의 딸과 마지막으로 나눈 통화, 그리고 어두운 골목, 그리고 화약 냄새. 그 다음엔 아무것도 없었다. 죽음이란 게 이렇게 허무한 거였나.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특별한 최후를 맞을 거라고. 영화처럼, 드라마처럼, 적어도 누군가는 내 이름을 기억할 거라고. 그런데 눈을 떴다. 천장에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낡은 벽지, 시큼한 냄새, 등 밑에 눌린 얇은 요. 창문 틈으로 새어드는 회색빛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팔이 내 팔이 아니었다. 가늘고, 근육이 덜 붙은, 열아홉쯤의 몸. 손끝이 떨렸다. 이게 내 손이라고? "뭐야, 이거." 목소리도 내 것이 아니었다. 조금 높고, 여물지 않은 소리. 내가 알던 저음의 굵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낯선 코, 낯선 턱선. 광대뼈가 도드라졌고 턱은 좀 더 좁았다. 벽에 걸린 깨진 거울로 다가갔다. 발걸음이 휘청거렸다. 몸에 익지 않은 다리는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거기 비친 얼굴은 분명 내가 아니었다. 멍했다. 눈, 코, 입, 하나씩 뜯어봤지만 어디에도 익숙함이 없었다. 이건 남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 얼굴 위로 내 표정이 겹쳐졌다. 당황한 표정, 그건 확실히 내 것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떠올랐다. [시스템에 접속되었습니다.] [대상: 이준호 (19세)] [초기 자산: 0원] [특수 권한: 무한 소득 계좌 개설] 나는 그 글자를 세 번 다시 읽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헛것이 아니었다. 눈을 비벼도, 고개를 흔들어도 글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떠 있었다. 마치 허공에 새겨진 것처럼, 손을 뻗으면 만져질 것처럼 선명했다. "이게 뭔데." [임무: 합법적 소득 구축] [경고: 정체 노출 시 모든 권한 및 자산이 즉시 소멸합니다.] [경고: 부당하게 취득된 자산으로 판단될 경우 동일하게 처리됩니다.] 속이 뒤틀렸다. 죽어서도 팔자가 사나운 건가. 자산은 무한이라는데 그걸 쓰는 방법이 정해져 있고, 정해진 방법을 어기면 다 사라진다니. 이게 선물인지 형벌인지 구분이 안 됐다. 전생에서 온갖 편법으로 돈을 굴리던 놈한테 합법적으로만 벌어라, 이건 대체 무슨 악취미인가. 방문을 열자 곧바로 알았다. 여긴 서울, 어느 반지하 자취방이었다.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목만 보이는, 그런 곳. 옆에 놓인 안전모와 작업복이 눈에 들어왔다. 흙이 튀어 얼룩진 작업복, 접힌 자국이 선명한 헬멧. 헬멧에 붙은 스티커, '대한건설 이준호'. 이준호. 그게 지금의 내 이름이었다. 방을 한 바퀴 훑었다. 작은 밥솥, 라면 몇 봉, 벽에 붙은 달력에는 붉은 동그라미가 몇 개 그려져 있었다. 월급날인가. 서랍을 열어보니 통장이 하나 나왔다. 잔액 팔만 삼천 원. 웃음이 나왔다. 실소였다. 전생에서는 조폭 두목 딸이랑 놀아나던 놈이, 이번 생에서는 팔만 원 들고 시작하는 건설 노동자라니. 신은 참 공평하게 사람 놀리는 재주가 있었다. 통장 옆에는 낡은 수첩도 있었다. 넘겨보니 하루 일당과 지출이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이준호란 놈, 성실했구나. 성실했는데도 팔만 삼천 원이라니. 세상이 참 야박했다. [임무를 확인하셨습니까?] 시스템이 다시 물었다. 대답할 방법도 몰라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이게 소리로 대답해야 하는 건지, 생각으로 해야 하는 건지 헷갈려서 결국 입을 열었다. "확인했다, 됐냐." [확인되었습니다. 소득 구축을 시작하십시오.] [단, 소득의 원천이 명확하지 않을 경우 페널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페널티. 그 단어가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게 사라진다는 건지 시스템은 말해주지 않았다. 그냥 경고만 던지고 침묵했다. 원래 시스템이란 것들이 다 이렇게 불친절한 건가. 매뉴얼도 없고, 고객센터도 없고, 그냥 던져놓고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불친절한 것도 아주 전통이 있네." 혼잣말을 내뱉고 나서 픽 웃었다. 이 상황에서도 농담이 나오는 걸 보면 내 성격은 죽어서도 안 죽었나 보다. 밖으로 나가려는데 배가 고팠다. 지갑을 뒤지니 지폐 몇 장, 동전 몇 개가 나왔다. 이준호의 삶은 넉넉하지 않았다. 몸에 밴 기억이 그랬다. 아침 일찍 현장에 나가고, 점심은 근처 분식집에서 때우고, 저녁엔 소주 한 병으로 하루를 지운다. 그 기억이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마치 남의 옷을 입고 그 옷 주인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는 느낌이었다. 문을 열고 계단을 올랐다. 반지하 특유의 습한 공기가 코를 찔렀다. 밖으로 나오자 아침 햇살이 눈을 찔렀다. 익숙한 서울의 풍경이었다. 전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거리, 다르지 않은 사람들. 그런데도 모든 게 낯설게 느껴졌다. 이 몸으로 처음 걷는 길이었으니까. 골목을 걸으며 생각했다. 전생의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드라마, 영화, 시나리오, 방송 트렌드. 그쪽 방면으로 밥벌이를 하던 놈은 아니었지만, 곁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것들이 있었다. 두목 딸이 방송국 관계자들과 얽혀 있었으니까. 룸살롱 접대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들, 촬영장 뒷이야기들, 대본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그때는 그냥 흘려듣던 이야기였다. 누구 드라마가 왜 망했는지, 어떤 대본이 편성을 못 받았는지, 어떤 작가가 뜰지 안 뜰지. 술자리에서 안주 삼아 씹던 이야기들이 이제는 머릿속에서 하나씩 재조합되고 있었다. 이걸 팔면 되지 않을까. 합법적인 소득. 각본. 공모전. 방송사. 심사위원들이 뭘 좋아하는지, 어떤 소재가 통하고 어떤 소재는 안 통하는지, 그 바닥의 흐름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직접 써본 적은 없지만, 어깨너머로 배운 감각이라는 게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머릿속에 계획이 어렴풋이 그려졌다. 노트북 한 대, 시간, 그리고 그 감각. 그거면 충분할 것 같았다. 팔만 삼천 원으로 시작해서 뭘 할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어쩌면 몸뚱이 하나만 있으면 되는 일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 순간, 시스템이 다시 알림을 띄웠다. [경고: 현재 위치에서 비정상적 관측 신호가 감지되었습니다.] 걸음이 멈췄다. 등 뒤로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신경이 곤두선다. 뭔가가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 골목 어귀, 가로등 밑에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분명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없었다. 지나가는 행인 몇 명, 담벼락에 붙은 전단지, 쓰레기봉투 몇 개. 평범한 골목의 아침 풍경이었다. 그런데도 목덜미가 서늘했다. "뭐야." 혼잣말이 새어 나갔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시스템도, 골목도, 이제 막 태어난 이 낯선 삶도, 전부 침묵했다.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데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건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뭔가가, 분명히 뭔가가 이 낯선 몸뚱이를, 이제 막 시작된 이 두 번째 삶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 서늘한 감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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