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잔고 무한, 낮에는 노가다

5화

"오빠, 듣고 있어요?" 한소라의 목소리가 다시 흔들렸다. 전화기 너머로 숨소리까지 들렸다.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듣고 있어요. 지금 어디예요?" "저희 가게요. 행복분식 뒤쪽 작업실." "갈게요, 좀만 기다려요." 전화를 끊었다. 손바닥이 이미 축축했다. 현장 반장한테 가서 급한 일이 생겼다고 말했다. 반장은 안전모를 벗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오늘까지만 봐준다. 다음부턴 안 돼." "감사합니다."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몸을 돌렸다. 뛰기 시작했다. 작업복 그대로였다. 흙먼지가 옷깃에 묻어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달려가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시스템을 써서 그냥 돈을 만들어줄까.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까. 무한 자금이 있는데도 그걸 못 쓰는 이 상황이 웃겼다. 실소가 나왔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데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게 무슨 형벌인가 싶었다. 돈은 넘치는데 손을 못 대는 형벌. 행복분식 뒷문으로 들어가니 박선영과 한소라가 작은 작업실 테이블 앞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엔 계약서 몇 장, 통장 사본, 그리고 휴대폰 화면에 뜬 문자메시지들이 흩어져 있었다. 형광등 불빛이 종이 위에 그대로 떨어져서 글자들이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한소라의 눈이 새빨갰다. 울다가 참은 흔적이 뺨에 얼룩처럼 남아 있었다. 박선영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 자세만으로도 이 사람이 지금 얼마나 이를 악물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게 그 사람이 보낸 계약서예요." 한소라가 서류를 내밀었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훑어봤다. 딱 봐도 허술했다. 사업자 등록번호도 가짜였고, 회사 주소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다. 폰트도 문서 전체에서 통일감이 없었다. 급하게 짜깁기한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이거, 등록번호 조회부터 해봤어요?" "네, 방금 알았어요. 존재하지 않는 번호래요." 박선영이 낮게 말했다. "경찰에 신고는 했어요?" "신고했는데, 돈 되찾을 확률이 낮대요. 이런 사기는 회수율이 십 프로도 안 된대요." 십 프로. 삼천만 원 중 겨우 삼백만 원. 그리고 그 삼백만 원도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소리였다. 경찰서에서 무슨 말을 들었을지 상상이 갔다. 접수는 해드리겠습니다, 근데 크게 기대는 마세요. 그런 식이었을 거다. 한소라가 고개를 떨궜다. 어깨가 조금씩 흔들렸다. "저희 이제 전세도 못 살아요. 보증금 다 넣었으니까." 박선영이 조용히 말했다. "괜찮아. 어떻게든 되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두 사람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서로 맞잡고 있었다. 그 손을 보는 순간 뭔가 명치를 짓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 둘을 번갈아 봤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무너지는 걸 보면서도 아무것도 못 하는 게 맞는 걸까. 시스템의 규칙이 다시 떠올랐다. 부당한 자산으로 판단되면 즉시 소멸. 그런데 부당하다는 기준이 정확히 뭔지 나는 몰랐다. 테이블 위에 놓인 통장 사본을 다시 봤다. 숫자가 찍혀 있던 자리가 이제는 텅 비어 있었다. 삼천만 원이 빠져나간 자리는 그냥 숫자 몇 개의 차이였는데, 그 차이가 이 두 사람의 인생 전체를 흔들고 있었다. "저기,"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이 나를 봤다. 눈빛에 기대가 실려 있어서 더 부담스러웠다. "제가 좀 아는 사람이 있어요. 소액으로 급전 빌려주는 쪽. 이자는 좀 세지만 당장 위기는 넘길 수 있을 거예요." 거짓말이었다. 그런 사람은 없었다. 그저 시간을 벌기 위한 말이었다. 시스템을 어떻게 써야 할지, 어떤 명분으로 돈을 만들어야 할지 아직 계산이 끝나지 않았다. 입 밖으로 나온 말이 스스로도 낯설게 느껴졌다. 한소라의 눈이 커졌다. "진짜요? 오빠, 진짜 그런 사람이 있어요?" 목소리에 물기가 섞여 있었다. 방금까지 죽어 있던 눈빛에 순간 빛이 돌아왔다. 그 빛을 보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헛된 희망을 준 건 아닐까. "확실하진 않아요. 알아보고 다시 올게요." 박선영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 눈빛이 날카로웠다. 테이블 위에 팔을 짚은 자세 그대로,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준호 씨는, 그냥 건설 현장 다니는 사람 아니었어요?" 순간 심장이 덜컥했다. 목소리가 담담했지만 그 속에 의심이 섞여 있었다. 박선영이 원래 그런 성격이었다. 날카롭고, 쉽게 넘어가지 않는. 조미애처럼 사람을 쉽게 믿는 타입도 아니었고, 한소라처럼 감정에 휩쓸리는 타입도 아니었다. "현장 다니면서도 아는 사람이야 있을 수 있죠. 세상 넓잖아요." 대답하면서도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 여자는 어딘가 눈치가 빨랐다. 조미애나 한소라처럼 나를 신비로운 사업가로 낭만화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박선영은 그냥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사람이었다. 그 시선이 지금 정확히 나를 관통하고 있었다. [경고: 대상 인물의 의심 수치가 상승했습니다.] [정체 은폐 지수 하락 위험이 감지되었습니다.] 시스템 알림이 정확히 그 순간에 떠올랐다. 이 여자가 위험하다는 걸 시스템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알림창을 보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시스템조차 이 정도로 경고를 준다는 건, 내가 지금 아슬아슬한 줄 위에 서 있다는 뜻이었다. "뭐, 그렇겠죠." 박선영이 더 캐묻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 눈빛이 완전히 풀린 건 아니었다. 의심의 실마리 하나가 방금 그 자리에 걸린 것 같았다. 작업실을 나서는데 다리가 무거웠다. 뭔가 도와야 한다는 마음과, 정체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부딪쳤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지킬 방법이 있을까. 행복분식 앞을 지나며 셔터가 반쯤 내려간 걸 봤다. 장사도 제대로 못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간판 불빛도 반쯤 꺼져 있었다. 저 가게마저 넘어가면 이 두 사람은 정말 바닥으로 떨어진다. 골목을 걸으며 생각했다. 시스템에게 직접 물어봐야 했다. 부당한 자산의 기준이 뭔지, 명분을 어떻게 만들면 되는지. 반지하 방으로 돌아와 시스템 창을 열었다. 방 안은 그대로였다. 낡은 장판, 곰팡이 냄새, 창틀에 낀 먼지. 이 좁은 방에서 무한한 자산을 통제하는 시스템을 다루고 있다는 게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명분을 만들면 돈을 쓸 수 있는 거지?" [질문이 접수되었습니다.] [답변: 소득의 출처가 논리적으로 설명 가능할 경우, 자산 사용이 승인됩니다.] 논리적으로 설명 가능한 출처. 머릿속에서 뭔가 스쳐 지나갔다. 각본. 공모전에서 떨어졌지만, 그 각본을 다른 방식으로 팔 수는 없을까. 아니면 다른 작품을 써서, 더 작은 규모의 대회나 채널에 넘겨서 소액의 상금을 받는 방식은. 그런데 삼천만 원을 그런 식으로 만들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한소라와 박선영에게 남은 시간은 며칠, 길어야 몇 주였다. 상금 백만 원짜리 대회에 열 번을 당첨돼야 그 돈이 나온다는 계산이 나오자 허탈해졌다. "다른 방법 없어?" [추가 정보: 긴급 자산 대출 옵션이 존재합니다.] [단, 이는 미승인 사용으로 분류되며 페널티가 발생합니다.] 페널티. 구체적인 내용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화면을 눌러도 더 이상 정보가 열리지 않았다. 몇 번을 다시 눌러도 같은 문장만 반복됐다. 시스템이 일부러 정보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페널티가 뭔지는 말 안 해주는 거야?" 답이 없었다. 화면은 그대로 멈춰 있었다. 이럴 때마다 시스템이 사람보다 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고 싶지 않은 건 끝까지 말하지 않는다. 창밖으로 다시 그 서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번엔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목덜미가 먼저 반응했다. 소름이 쫙 돋았다. 커튼을 확 열었다. 골목 어귀, 가로등 아래 누군가 서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 형체가 나를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것 같았다. 마치 이쪽을 알아봤다는 듯이. 숨을 멈췄다. 몇 초, 그 이상은 못 셌다. 다음 순간, 그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방금 그건 뭐였을까. 시스템이 말한 확인되지 않은 관측원인가. 아니면 그냥 헛것을 본 걸까. 방금 전까지 분명히 사람의 형체가 있었다. 옷의 재질, 자세, 심지어 고개를 기울이는 각도까지 눈에 선했다. [경고: 비정상적 관측 신호가 최고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시스템의 경고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붉은 글자였다. 지금까지 본 어떤 경고보다 색이 짙었다. 나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이번엔 진짜였다. 뭔가가, 확실히,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창문을 다시 닫았다. 손이 떨려서 커튼을 두 번이나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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