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잔고 무한, 낮에는 노가다

3화

다음 날부터 나는 두 가지 삶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낮에는 현장에서 벽돌을 쌓고, 밤에는 이준호의 낡은 노트북 앞에 앉아 시나리오를 썼다. 몸은 하나인데 살아야 할 삶은 두 개였다.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 작업복을 걸치고, 저녁 여섯 시에 씻고 나면 다시 다른 사람이 되어야 했다. 벽돌을 나르던 손으로 자판을 두드리는 게 어색했다. 손끝에 굳은살이 박여서 키보드 소리가 유난히 딱딱하게 들렸다. 전생의 기억이 이렇게 쓸모 있을 줄은 몰랐다. 두목 딸을 만나러 다니면서 보고 들었던 방송국 뒷이야기, 시청률에 목매는 제작진들의 회의, 대본 리딩 자리에서 스쳐 지나가듯 배운 구조들. 그걸 하나씩 끄집어내 이 세계의 언어로 옮겼다. 기억이라는 게 참 이상했다. 필요할 때는 흐릿한데, 이렇게 절박할 때는 갑자기 선명해졌다. 어느 작가가 회의실에서 했던 말, 어느 PD가 대본을 던지며 소리쳤던 대사, 그런 파편들이 머릿속에서 하나씩 떠올랐다. 그걸 놓치지 않으려고 메모장을 열어놓고 손이 가는 대로 받아 적었다. 제목은 <두 여자의 마카롱>. 마포구 어딘가 반지하에서 시작한 두 여자의 창업기, 사기와 배신과 우정을 다룬 시트콤 각본이었다. 박선영과 한소라를 보면서 힌트를 얻은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둘이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나눠 먹으며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던 장면, 그게 그대로 대본 속 한 장면이 됐다. 물론 그 사실을 본인들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알면 뭐라고 할지 눈에 뻔했다. "내 얘기 팔아먹었냐"고 소라가 눈을 부라릴 게 상상이 됐다. 그럼 나는 아니라고 잡아떼겠지. 시치미 떼는 것도 이제 익숙했다. 자정이 넘어 초고를 마무리했을 때, 시스템이 알림을 띄웠다. [각본 초안이 감지되었습니다.] [관련 공모전 정보를 열람하시겠습니까?] "어, 되네." 놀라웠다. 시스템이 이렇게 능동적으로 정보를 던져주는 건 처음이었다. 평소엔 물어봐야 겨우 한 줄씩 내놓던 놈이. 알림을 눌렀다. [별빛엔터테인먼트 신인 작가 발굴 공모전] [접수 마감: 3주 후] [1차 통과율: 약 2%] 2퍼센트. 숨이 턱 막혔다. 백 명 중 두 명. 그런데 이 판이 원래 그런 판이었다. 방송가라는 곳은 늘 그랬다. 재능 있는 사람은 넘치고, 자리는 손톱만큼밖에 없었다. 전생에서도 그 좁은 문을 뚫으려고 몇 년씩 원고를 붙들고 있는 사람들을 봤다. 그중 대부분은 결국 다른 일을 찾아 떠났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시스템이 다시 경고를 띄웠다. [경고: 창작물의 원천이 전생의 기억일 경우, 지적재산권 귀속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경고: 해당 리스크는 정체 노출 위험도를 상승시킵니다.] "이건 또 뭔 소리야." 혼자 방에 앉아 중얼거렸다. 지적재산권. 원천.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전생 어딘가에 존재했을 작품을 가져다 쓰는 게 문제가 된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완전히 새롭게, 이 세계에는 없는 조합으로 다시 써야 한다는 뜻이었다. 골치가 아팠다. 노트북 화면에 떠 있는 초고를 다시 읽어봤다. 전생 어느 작품에서 본 듣던 대화 톤, 어느 시트콤에서 본 인물 배치가 여기저기 섞여 있었다. 하나씩 짚어내면서 지워야 할 부분에 표시를 했다. 표시가 늘어날수록 원고는 점점 구멍투성이가 됐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 세계와 전생의 방송 문화가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전생의 어떤 작품 하나를 통째로 베끼는 게 아니라, 여러 작품의 구조와 트렌드를 뒤섞어 새로운 걸 만들면 될 것 같았다. 완전한 창작은 아니지만, 완전한 도둑질도 아닌 그 어딘가. 그 애매한 지점을 찾아 밤새 문장을 뜯었다 붙였다 했다. 밤새 각본을 뜯어고쳤다. 대사 하나를 바꾸면 앞뒤 흐름이 어긋났고, 흐름을 맞추면 또 다른 장면이 어색해졌다. 새벽 세 시쯤엔 커피도 소용이 없어져서 찬물로 세수를 하고 다시 앉았다. 새벽 다섯 시, 눈이 뻑뻑해질 때쯤 다시 시스템 알림이 떠올랐다. [경고: 최근 72시간 내 수면 시간이 규정 미달입니다.] [건강 지표 하락이 예상됩니다.] "안다, 알아." 대답할 필요도 없는데 대답이 튀어나왔다. 요즘 시스템과 대화하는 게 습관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이게 정상은 아니겠지. 혼자 사는 놈이 시스템 알림에 혼잣말로 답하고 있으니. 누가 보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날 오후, 현장에서 잠깐 쉬는 시간에 반장이 나를 불렀다. 나는 벽돌 더미 옆에 앉아 눈을 감고 있다가 눈치를 챘다. "이준호, 요즘 얼굴이 왜 그래. 밤에 뭐 하고 다니냐." 목소리에 걱정보다 짜증이 더 섞여 있었다. 나는 장갑을 벗으며 대충 웃어넘겼다. "그냥 이것저것 좀 알아보고 있어요." "뭘 알아봐, 딴생각 말고 일이나 잘해. 다음 주에 큰 공사 들어간다, 정신 차려." "네, 알겠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다른 계산이 돌아갔다. 공모전 마감이 3주. 큰 공사는 다음 주부터. 낮에는 벽돌을 쌓고 밤에는 대본을 쓰는 생활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감이 안 왔다. 몸이 두 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진심으로 들었다. 반장은 내 어깨를 툭 치고 다시 자재 쪽으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물통을 들어 남은 물을 다 마셔버렸다. 목이 탔다. 몸도 마음도 함께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날 밤, 시스템에 별빛엔터테인먼트에 대한 정보를 추가로 요청했다. 이번엔 순순히 정보가 열렸다. [별빛엔터테인먼트] [국내 3위권 드라마·예능 제작사] [최근 3년간 신인 작가 발굴 비율: 0.3%] [심사위원 구성: 기성 작가 5인, 편성 담당 PD 3인] 0.3퍼센트. 아까 본 2퍼센트는 1차 통과율이었고, 최종적으로 계약까지 이어지는 비율은 그보다 훨씬 낮았다. 숫자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읽을 때마다 벽이 더 두꺼워지는 것 같았다. 이게 진짜 벽이라는 게 뭔지 실감이 났다. 노트북 화면에 커서가 깜박였다. 써놓은 각본이 갑자기 초라해 보였다. 전생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지식 몇 조각으로 이 벽을 뚫을 수 있을까. 회의감이 스쳤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몇 분 동안 아무것도 치지 못하고 그냥 화면만 봤다. 그런데 그때, 창밖에서 다시 그 서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목덜미부터 시작해서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커튼을 살짝 열어 밖을 봤다. 골목은 조용했다. 가로등만 홀로 켜져 있었다. 아무도 없는데, 분명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었다. 확신이 들었다. 처음 느꼈을 때는 착각인가 했는데, 이번엔 아니었다. [경고: 비정상적 관측 신호가 재감지되었습니다.] [관측원의 정체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관측원이라니. 시스템 자체도 그게 뭔지 모른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이 시스템보다 상위에 있는, 아니면 완전히 다른 종류의 무언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커튼을 다시 닫았지만, 그 시선은 밤새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노트북을 덮지도 못하고, 잠들지도 못한 채 새벽을 그대로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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