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피아노 건반 위에 놓인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이서준, 열네 살. 몸은 유리처럼 얇고 창백했으나 손끝만은 늘 살아 움직였다.
건반을 누르면 소리가 났고, 소리가 나면 그는 잠시 아픈 것도 잊었다.
'몸이 약한 게 죄는 아니다.' 할아버지 이인호는 늘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처음 들은 것이 언제였는지 서준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열이 나서 학교를 며칠씩 결석하고 돌아온 어느 날, 담임이 보낸 가정통신문을 손에 쥔 할아버지가 그 문장을 낮게 읊었던 것만은 또렷했다. 그날 이후로 서준은 그 말을 마음 어딘가에 접어 넣고 다녔다. 몸이 아픈 날에도, 손끝이 떨려 건반을 짚지 못하는 날에도, 그 문장을 꺼내어 펼치면 조금은 견딜 만해졌다.
이인호는 우편배달부였다. 새벽마다 자전거를 끌고 나가 저녁이 되어야 돌아왔다.
비가 오는 날에도, 눈이 쌓인 날에도 그는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무릎이 시큰거린다는 말을 입에 담은 적은 없었으나, 저녁이면 서준이 몰래 훔쳐본 할아버지의 무릎은 늘 붉게 부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엔 늘 서준의 몫으로 무언가를 사 왔다. 물감 한 통, 악보 한 장, 그런 작은 것들이었다.
"오늘은 파란색이 예쁘더구나." 할아버지가 물감을 내밀며 웃었다.
"고맙습니다." 서준은 짧게 답하고 물감을 받아 들었다.
말이 많지 않은 사이였으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가끔 할아버지는 우편함 사이에서 주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 집 담벼락에 핀 꽃이 유난히 붉더라는 이야기, 어느 골목 개가 자신을 보고 꼬리를 흔들더라는 이야기. 거창한 것은 하나도 없었으나 서준은 그 시시한 이야기들을 좋아했다. 할아버지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세상은 언제나 조금 더 따뜻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서준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어머니 한소영은 재혼하여 이복동생 도윤을 낳았고, 서준은 할아버지의 집에 남겨졌다. 방치라 부를 수도 있었으나 서준은 그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있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고 여겼다.
어머니가 명절이면 한 번씩 전화를 걸어왔다. 목소리는 다정했으나 어딘가 서둘러 끝내려는 기색이 묻어 있었다. 도윤이 감기에 걸렸다는 이야기, 이번에 유치원에서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서준은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저 "네, 네."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서운함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나, 그 감정을 굳이 꺼내어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들여다보면 더 아플 것 같아서였다.
서준이 다섯 살이던 해, 열이 펄펄 끓던 밤에 소녀가 나타났다.
붉은 머리, 파란 눈, 얇은 흰 옷을 두른 소녀였다. 이름은 소하라고 했다.
"네가 그리는 것들이 좋다." 소하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 후로 서준은 그녀를 위해 그림을 그렸고, 그녀를 위해 피아노를 쳤다.
남들은 보지 못하는 존재였으나 서준에게는 그것이 유일한 진실이었다.
소하는 늘 창가 쪽 어스름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 그저 서준이 그림을 그리거나 건반을 두드리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고, 어쩌다 한마디씩 감상을 흘렸다.
"오늘 색은 좀 더 짙구나." 소하가 캔버스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린 적이 있었다.
"슬픈 날이라서요." 서준이 붓을 놓지 않은 채 답했다.
"슬픈 날엔 슬픈 그림을 그려도 된다." 소하는 그렇게만 말했다.
그 말이 서준에게는 이상하게도 위로가 되었다. 누구도 슬픔을 감추라고 하지 않은 채로 곁에 있어준다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오늘도 그 애가 왔었니." 할아버지가 물었다. 조롱이 아니라 걱정이었다.
"네." 서준이 짧게 대답했다.
"그래." 할아버지는 더 묻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몇 번인가 서준의 상태를 두고 정신적인 문제를 언급한 적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존재와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의사에게는 우려스러운 증상이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병원을 나서며 서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믿어주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으로 살아갈 수 있다.' 할아버지는 언젠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서준은 그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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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었다. 서준은 캔버스 앞에 앉아 붉은 머리를 그리고 있었다.
손이 떨렸다. 요즘 들어 자주 그랬다. 병원에서는 원인을 찾지 못했다. 그저 몸이 약할 뿐이라고 했다.
'그녀를 그리는 동안엔 아프지 않다.' 서준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붓을 놀렸다.
창밖으로는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방 안의 다른 소음은 없었다. 시계 초침이 째깍거리는 소리, 붓이 캔버스를 스치는 사르륵- 소리만이 정적을 채우고 있었다.
소하는 오늘도 창가 쪽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서준의 손끝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은 왜 말이 없어요." 서준이 붓을 든 채 물었다.
소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옅게 웃었을 뿐이었다. 그 웃음이 어딘가 쓸쓸해 보였으나, 서준은 그것을 굳이 캐묻지 않았다. 소하는 원래도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전화벨이 울린 것은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따르르릉-
서준은 붓을 내려놓고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이서준 학생이죠."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다급함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네, 그런데요."
"이인호 님 보호자 되시나요. 지금 배달 중에 쓰러지셔서 응급실로 옮겼습니다."
서준은 그 자리에서 잠시 굳었다. 손에서 수화기가 미끄러질 뻔했다.
'쓰러지셨다니.' 그 말이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되었다.
붓을 쥐고 있던 손끝에 물감이 그대로 말라붙어 있었다. 그것을 닦아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어느 병원인가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남자가 병원 이름을 불러주었다. 서준은 겉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채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신발을 짝짝이로 신은 것도 몰랐다. 현관문을 열어젖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뒤를 돌아보니 소하가 여전히 창가에 서 있었다. 따라나서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서준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시선이 무엇을 말하는지 서준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금은 그것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계단을 두 개씩 뛰어 내려가며 서준은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쓰러질 리 없다.'
새벽마다 자전거를 끌고 나가던 뒷모습이 떠올랐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멈추지 않았던 그 페달질이 떠올랐다. 그런 사람이 길 위에서 무너졌다는 것이 서준에게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손끝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서준은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아파트 입구를 벗어나 대로변으로 나서자 밤바람이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겉옷도 없이 뛰어나온 몸에 한기가 스몄으나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손을 들어 지나가는 택시를 향해 흔들었다. 한 대, 두 대가 그냥 지나쳤다. 세 번째 택시가 겨우 멈춰 섰다.
"병원 가주세요, 빨리요." 서준이 뒷좌석에 몸을 던지듯 앉으며 말했다.
기사는 서준의 얼굴을 힐끗 보더니 아무 말 없이 속도를 냈다. 열네 살짜리 아이가 새벽에 혼자 다급하게 병원을 외치는 것이 심상치 않아 보였던 모양이었다.
택시를 잡아탄 그의 눈앞으로 밤거리의 불빛이 스쳐 지나갔다.
가로수와 간판들이 뒤섞여 흐릿한 선으로 흘러갔다. 그 사이사이로 할아버지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물감을 내밀며 웃던 얼굴, "그래." 하고 짧게 답하던 얼굴, 병원을 나서며 손을 꼭 잡아주던 그 손의 온도까지도.
'그런 사람이 쓰러질 리 없다.' 서준은 그 생각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것은 믿음이라기보다는 애원에 가까웠다.
병원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이, 그날 처음으로 서준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차창에 이마를 붙인 채 서준은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눈을 감으면 할아버지가 쓰러지는 장면이 떠올랐고, 눈을 뜨면 낯선 밤거리의 불빛만이 흘러갔다. 어느 쪽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택시가 응급실 입구 앞에 멈춰 섰다. 문이 열리기도 전에 서준은 몸을 반쯤 일으켰다. 기사가 요금을 말했으나 서준의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지폐를 던지듯 내밀고는 곧바로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응급실 입구의 자동문이 스르륵- 열렸다. 형광등 불빛이 눈을 찔렀다. 소독약 냄새가 코를 스쳤다. 그 냄새를 맡는 순간, 서준의 다리에서 힘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간호사 하나가 서준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이인호 님 보호자분이세요?" 간호사가 물었다. 그 목소리에 담긴 조심스러움이, 서준의 심장을 더욱 세게 조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