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시간이 흘렀다. 서준은 열여섯이 되었다.
계절이 몇 번 바뀌었는지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캔버스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바깥의 시간은 그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봄에 피었던 꽃이 언제 졌는지, 여름이 얼마나 무더웠는지, 그런 것들은 이제 그의 삶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
창작에 몰두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몸은 야위어갔다. 처음에는 옷이 조금 헐렁해진 정도였으나, 어느 순간부터는 손목의 뼈가 도드라져 보일 정도가 되었다. 손목은 가늘어져 시계가 헛돌았다. 아버지가 사준 손목시계였다. 서준은 시계가 흘러내릴 때마다 손목을 살짝 흔들어 위로 밀어 올렸다. 그 동작이 어느새 습관이 되어 있었다.
거울을 볼 일은 거의 없었다. 씻을 때 잠깐 마주치는 얼굴이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었으나, 서준은 그것을 오래 들여다보지 않았다. 얼굴이 야위었다는 것보다, 그 얼굴에 남은 표정이 예전과 다르다는 사실이 더 신경 쓰였다. 웃음이 줄었고, 눈빛은 늘 캔버스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학교는 이미 자퇴한 지 오래였다. 처음 자퇴서를 냈을 때, 담임교사는 몇 번이나 말렸다. "그림은 취미로도 할 수 있는 거잖니." 담임의 말에 서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취미라는 말이 얼마나 얕은 단어인지, 그는 알고 있었으나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한소영은 주 1회 집을 찾아왔으나, 그마저도 형식적인 안부에 가까웠다. 처음에는 매일 들여다보던 그녀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방문 횟수는 줄었고, 방문할 때의 표정도 조금씩 무뎌졌다. 서준은 그것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편이 편했다.
"밥은 챙겨 먹고 있니." 한소영이 냉장고를 열어보며 물었다.
냉장고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반찬통 몇 개와 물병이 전부였다.
"네." 서준은 캔버스에서 눈을 떼지 않고 답했다.
"거짓말도 참." 한소영이 냉장고 문을 닫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아. 병원에 가보자."
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병원이라는 말이 이제는 지긋지긋했다. 이전에도 몇 번 병원에 끌려간 적이 있었으나, 매번 돌아오는 결과는 같았다. 정상입니다. 특별한 이상은 없습니다. 그런 말들이 오히려 그를 더 지치게 만들었다.
한소영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거실 소파에 잠시 앉아 있다가 돌아갔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서준은 다시 붓을 들었다. 손끝이 조금 떨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서준은 그림을 그리다 붓을 놓쳤다. 붓이 바닥에 떨어지며 물감이 튀었다.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손가락에 힘을 주려 해도 감각이 아득했다. 마치 자신의 손이 아닌 것처럼, 그 손은 명령을 거부했다.
'왜.' 서준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되물었다. 붓을 다시 쥐어보려 했으나, 손끝이 떨리기만 할 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한소영이 결국 그를 끌고 병원으로 향했다. 서준은 저항하지 않았다. 저항할 힘조차 없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
병원 진료실은 하얗고 무감각했다. 형광등 불빛이 눈을 찔렀고, 소독약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서준은 그 냄새가 싫었다. 병원 특유의 그 냄새는 언제나 그에게 무언가를 강요당하는 느낌을 주었다.
의사는 서준의 차트를 훑어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몇 장의 검사 결과지를 넘기던 손이 멈추었다.
"검사 결과는 다 정상입니다." 의사의 목소리엔 짜증이 배어 있었다.
"혈액검사도, 신경검사도 특별한 소견이 없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야위었나요." 한소영이 물었다. 목소리에 걱정이 섞여 있었다.
"글쓰기나 그림 같은 걸 너무 많이 하는 건 아닌가요." 의사가 서준을 흘겨보며 말했다.
"밤낮없이 그런 걸 붙잡고 있으면 몸이 못 견디죠. 요즘 애들이 그런 게 많더라고요. 몰입하다가 몸을 상하게 하는 경우."
의사의 말투에는 진심 어린 우려보다는 습관적인 훈계가 더 많이 담겨 있었다. 서준은 그런 말투를 이미 여러 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서준은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내가 아픈 이유는 붓을 놓지 않아서가 아니다.' 서준은 속으로 그렇게 여겼으나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말해도 믿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그림 속의 존재를 설명할 방법이 그에게는 없었다. 설명한다 해도 정신병자로 취급받을 것이 뻔했다.
"손목이 이렇게 가늘어질 정도로 밥을 안 먹으니 당연하죠." 의사가 덧붙였다. "체중이 지난번보다 3킬로그램이나 더 빠졌어요. 이 나이에 이런 체중은 위험합니다."
한소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서준아, 정말 밥은 먹고 있는 거니."
서준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는 것이 정확했다.
"영양제나 처방해 드릴게요. 스트레스성인 것 같으니 정신과 상담도 한번 받아보시고요." 의사가 형식적으로 덧붙였다.
조롱은 아니었으나 서준에게는 조롱처럼 들렸다.
'저 사람은 내가 무엇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지 절대 알지 못한다.'
서준은 그 자리에서 조용히 무기력함을 삼켰다. 처방전을 받아드는 한소영의 손이 살짝 떨렸으나, 서준은 그것을 보지 않으려 시선을 피했다.
진료실을 나서는 길, 한소영이 걸음을 멈추고 서준을 바라보았다.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그녀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아니에요." 서준은 짧게 답했다.
더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한소영도 알고 있었다, 아들이 더는 자신에게 무언가를 나누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
집으로 돌아온 밤, 서준은 다시 캔버스 앞에 앉았다.
손이 떨렸지만 붓을 놓지 않았다. 처방받은 영양제 봉투는 식탁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뜯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창가에 앉아 있는 소하의 실루엣이 어스름한 방 안에서 흔들렸다. 그녀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서준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나타났고, 그리기를 멈추면 서서히 옅어졌다.
"오늘 병원에서 뭐라던." 소하가 창가에 앉아 물었다. 그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모른다고 해요. 스트레스라고요." 서준이 씁쓸하게 웃었다.
"영양제 처방받았어요. 정신과 상담도 받아보라고 하더라고요." 서준이 덧붙였다. 말투에 자조가 섞여 있었다.
"내가 널 아프게 하는 것 같아 미안하구나." 소하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서준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췄다. 붓을 든 손이 캔버스 위에서 정지했다.
'미안하다니. 그녀가 왜 미안해야 하지.'
의문이 처음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 고개를 들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품지 않았던 종류의 의문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의 곁에 있었고, 그것이 당연하다고만 여겼다. 그런데 그녀가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는 순간, 서준은 처음으로 그 관계의 형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서준이 서둘러 말했다.
"당신을 위해 그리는 게 유일하게 제가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니까요."
말을 뱉고 나서야 서준은 그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문장인지 깨달았다. 유일하게 느낄 수 있는 것. 다른 무엇도 아니라 오직 그것뿐이라는 말이었다.
소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담긴 것이 위로인지 죄책감인지, 서준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표정은 언제나 옅은 미소를 유지했으나, 그 미소 뒤에 무엇이 있는지 서준은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왜 미안하다고 했을까.' 서준은 다시 붓을 움직이며 생각했다. '그녀가 나를 아프게 한다면, 그것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다. 내가 원해서 그린 것이다.'
그 생각으로 스스로를 다독였으나, 마음 한구석에 남은 의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 밤 서준은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천장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몸을 뒤척였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그녀는 진짜인가. 아니면 내가 만들어낸 환상인가.'
한 번도 품지 않았던 의심이었다. 그것이 마음속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서준은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졌다.
문득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오래전, 그림을 처음 배우던 어린 시절에 들었던 말이었다. "네가 그리는 것이 무엇인지보다, 왜 그리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도 완전히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어렴풋이 그 말의 무게가 느껴졌다.
새벽 무렵, 그림을 마무리하던 손끝에서 붉은 것이 비쳤다.
캔버스 위로 핏방울이 떨어졌다.
서준은 그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손끝이 갈라져 피가 배어나온 것이었다. 언제부터 상처가 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두려웠다.
핏방울이 캔버스 위에 번져 붉은 얼룩을 만들었다. 그림 속 소하의 옷자락 근처였다. 서준은 그것을 지우려 손을 뻗었으나, 이내 멈추었다. 마치 그 붉은 얼룩이 그림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듯한 이상한 감각이 들었다.
'이대로 계속하면 안 된다.' 어딘가에서 그런 경고가 들려오는 듯했으나, 서준은 그 경고를 무시했다. 붓을 다시 들었다. 손끝의 상처에서 피가 더 배어나왔지만, 서준은 멈추지 않았다.
창가에 앉은 소하가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에서 걱정과 다른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서준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캔버스에서 눈을 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