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한소영은 아들의 방을 청소하다가 캔버스 뒤편에 쌓인 습작들을 발견했다.
처음엔 그저 낡은 그림 몇 장이라고 생각했다. 캔버스와 캔버스 사이, 벽과 가구 틈에 꽂혀 있던 종이 뭉치를 꺼내다가 그녀는 손을 멈췄다. 하나같이 같은 얼굴이었다. 붉은 머리, 파란 눈, 얇은 흰 옷. 색이 조금씩 다르고 각도가 조금씩 다를 뿐, 그 얼굴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게 다 뭐야.' 그녀는 그림들을 한 장씩 넘기며 손이 떨렸다. 처음엔 열 장쯤일 거라 짐작했다. 스무 장을 넘겼을 때 숫자를 세는 걸 그만두었다. 수십 장, 수백 장이었다. 서랍 안쪽, 옷장 바닥, 책상 밑까지 뒤져보니 종이는 끝없이 나왔다. 날짜가 적힌 것도 있었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서준이 다섯 살이었을 때였다. 그 시절의 필체라기엔 지나치게 정교했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이런 눈매를, 이런 옷 주름을 그릴 수 있었을 리 없었다.
한소영은 그림들을 방바닥에 죽 늘어놓았다. 순서대로 놓고 보니 얼굴은 점점 정교해졌지만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웃는 얼굴은 초기 몇 장에만 있었다. 나중의 그림들은 하나같이 시선을 피하거나,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는 그날 저녁, 병원의 정신과 의사를 다시 찾았다.
"아들이 다섯 살 때부터 같은 대상을 계속 그려왔어요." 그녀가 그림 몇 장을 내밀었다.
의사는 그림들을 훑어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종이를 넘기는 손끝이 점점 느려졌다.
"이 정도로 오래, 이 정도로 일관된 대상이라면... 단순한 상상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의사가 조심스레 말을 골랐다. "환각일 가능성도 있고, 혹은 극심한 몰입이 실제 신체 소모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체 소모요?" 한소영이 되물었다.
"쉽게 말해, 정신이 몸을 갈아먹는 겁니다." 의사가 서류를 덮었다. "드물지만 있는 증례입니다. 창작이든 강박이든, 몰두 대상이 사라지지 않으면 몸이 버티지 못합니다."
"그럼 이 대상을... 없애면 되는 건가요?" 그녀가 물었다.
"대상이 실재한다면 그렇겠지요." 의사가 그녀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하지만 실재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아드님의 내부에 있는 겁니다. 그 경우엔 없애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한소영은 그 말을 듣고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대상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었으니까. 병원을 나서며 그녀는 그림 뭉치를 가방에 다시 집어넣었다. 붉은 머리 소녀의 얼굴이 종이 사이로 삐죽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애써 보지 않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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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은 그 무렵부터 걷는 것도 힘들어졌다.
다리에 힘이 빠졌다. 방 안에서 캔버스로 걸어가는 몇 걸음마저 숨이 가빴다. 예전에는 밤을 새워 그림을 그려도 다음날 아침이면 멀쩡히 회복되던 몸이었다. 이제는 아침이 와도 몸이 그대로였다. 오히려 더 무거워질 뿐이었다.
'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그는 벽을 짚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벽을 짚은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계단 하나를 오르는 데도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생각해보니 이상한 규칙이 있었다. 소하가 창가에 나타난 날은 언제나 몸이 더 무거웠다. 나타나지 않은 날은, 아주 드물었지만, 조금은 나아졌다. 그는 그것을 우연이라 여기려 애썼다. 며칠을 돌이켜보아도 우연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정확했다. 소하가 밤늦게 왔던 날은 다음날 아침 손끝에 감각이 없었고, 그녀가 오지 않은 날은 적어도 손을 쥐고 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서준은 그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 인정하는 순간 무언가가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나를 아프게 하는 게 아니다.' 그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나는 그녀를 위해 그리는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그 밤, 그는 붓을 쥔 손이 저절로 떨리는 것을 보았다. 붓이 캔버스에 닿기도 전에 손끝에서 붉은 것이 배어 나왔다. 이제는 상처가 있어야만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손끝을 살펴봐도 베인 자리 하나 없었다. 그런데도 붉은 것은 방울져 흘러 캔버스 위로 떨어졌다.
뚝-
한 방울이 흰 천 위에 스며들었다. 그는 그것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색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섬유 사이로 번져갔다.
'이건 아니다.'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그는 붓을 놓지 않았다. 놓는 순간 소하가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라지는 것이 두려운지, 그림이 끊기는 것이 두려운지, 그는 이제 그 둘을 구분할 수 없었다.
+++
창가엔 여전히 소하가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예전보다 더 어두웠다. 말을 걸어도 대답이 짧아졌고, 시선을 자주 피했다. 흰 옷자락이 바람도 없는데 흔들렸다. 그 모습이 마치 곧 흩어질 안개처럼 보였다.
"소하님." 서준이 힘겹게 붓을 들며 말했다. "제가... 잘못하고 있는 걸까요."
소하는 한참 침묵했다.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니."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잘못한 건 내 쪽이다."
"무슨 말씀이세요." 서준이 물었다. 목소리에 의문이 섞였다.
소하는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 모습이 마치 도망치는 것 같았다. 서준은 몇 번이고 다시 물었지만, 그녀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붓을 쥔 손이 저려왔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말씀해주시면..." 서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고치겠습니다."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다." 소하가 낮게 답했다. 그 목소리엔 처음 듣는 종류의 피로가 담겨 있었다.
서준은 처음으로 의심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이분은 정말 존재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스쳤다가, 이내 자책이 뒤따랐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죄스럽다.'
아버지는 살아 계실 적 이런 말을 했었다. '왜 그리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무엇을 위해 붓을 드는지 모르면, 붓이 너를 삼킨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서준은 그저 화구를 정리하며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때는 그 말의 무게를 알지 못했다. 서준은 그 말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말이 불쑥 떠올랐다.
그는 왜 그리는지 알고 있었다. 소하를 위해서였다. 붓을 들 때마다 그것 하나만은 명확했다. 그런데 소하는, 무엇을 위해 여기 있는 걸까. 그 물음을 던지고 나서야 그는 깨달았다. 자신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그것을 물은 적이 없었다는 것을.
그 물음엔 답이 없었다. 창가의 그녀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흐려지는 달빛 속으로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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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서준은 방바닥에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한소영이 문을 열었을 때 그는 캔버스 밑에 웅크려 있었다. 손엔 붓이 그대로 쥐어져 있었다. 방 안엔 물감 냄새와 함께 비릿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녀는 그 냄새의 정체를 알아채기도 전에 이미 아들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다.
"서준아!"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다. 아들의 몸은 차가웠다. 흔들어도 반응이 없었다. 뺨을 두드려도 눈꺼풀 하나 떨리지 않았다.
"서준아, 눈 좀 떠봐! 엄마 목소리 들려?" 그녀가 다시 소리쳤다. 손이 사정없이 떨렸다. 휴대폰을 찾는 손끝이 자꾸 미끄러졌다.
구급차가 오는 십여 분이 그녀에게는 영원 같았다. 도윤이 방문 앞에서 울먹이며 서 있었다. 어린 동생은 형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문틀만 붙잡고 있었다.
"형 죽는 거야?" 도윤이 물었다.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한소영조차 그 질문에 답할 자신이 없었다.
구급대원들이 들어와 서준을 들것에 옮기는 동안, 그녀는 캔버스 위에 놓인 그림을 흘깃 보았다. 붉은 방울이 스며든 흰 천 위로, 소하의 얼굴이 반쯤 그려진 채 멈춰 있었다. 마치 그리다 만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의해 멈춰진 것처럼 보였다.
응급실에서 의사가 나와 말했다.
"영양 결핍과 극심한 탈수입니다. 당장 입원해야 합니다." 의사의 목소리엔 다급함이 배어 있었다. "이 정도면 며칠 전부터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을 겁니다. 보호자분은 몰랐습니까?"
한소영은 그 물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몰랐다고 하기엔 너무 오래 방치했고, 알았다고 하기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한소영은 아들의 병상 옆에서 그림 뭉치를 끌어안고 있었다. 붉은 머리 소녀의 얼굴이 수백 개나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종이 하나하나가 그녀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대체 누구야, 넌.' 그녀는 그 그림들을 향해 그렇게 되물었지만,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병실의 불빛 아래서 종이 위의 얼굴은 그저 조용히 그녀를 마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서준은 병상에 눕혀진 채로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그의 손끝은 여전히 붉게 젖어 있었다. 간호사가 손을 닦아내려 했지만, 닦아낸 자리에서 또다시 붉은 것이 배어 나왔다. 마치 상처가 몸 안쪽 어딘가에 있는 것처럼, 겉으로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데도 피는 멈추지 않았다.
한소영은 그 손을 붙잡고 있다가, 문득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창밖, 병실 유리창 너머로 무언가 붉은 것이 스쳐 지나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