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응급실 앞 복도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했다.
서준은 숨을 몰아쉬며 안내판을 따라 뛰었다. 심장이 목까지 올라온 듯 뛰었다. 발이 바닥에 닿는 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휴대폰에 찍힌 발신자는 병원이었다. 낯선 번호, 낯선 목소리, 그리고 단 한 문장.
"보호자분, 빨리 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서준의 세계는 반쪽이 잘려나간 듯했다.
택시 안에서 서준은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창밖으로 스치는 간판들이 흐릿하게 번져 보였다.
'할아버지는 어제도 괜찮으셨는데.' 서준은 속으로 되뇌었다. 어제 저녁, 할아버지는 평소처럼 식탁에 앉아 국을 뜨며 말없이 서준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응급실 입구에 도착하자 간호사가 그를 막아섰다.
"이인호 님 가족분이신가요."
"손자입니다." 서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간호사는 잠시 말을 골랐다. 그 침묵이 서준에게는 이미 답이었다.
말을 고르는 그 몇 초가 서준에게는 몇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들어가 보세요."
그 말과 함께 간호사는 시선을 피했다. 그것마저도 답이었다.
서준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문고리가 차가웠다. 손끝에 닿는 그 냉기가 유난히 선명하게 느껴졌다.
하얀 시트 위에 누운 할아버지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작아 보였다. 늘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던 흰머리가 헝클어져 있었고, 그 모습이 낯설어서 서준은 순간 이 사람이 정말 자신의 할아버지인지 의심했다.
숨소리는 없었다.
시트를 걷어내는 소리도, 기계음도 들리지 않았다. 방 안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의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뇌졸중이었습니다. 도착했을 때 이미..."
그다음 말은 서준의 귀에 닿지 않았다.
의사의 입술이 계속 움직이고 있었지만 어떤 소리도 서준의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물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말이 많지 않은 사이였으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서준은 그 문장을 속으로 되뇌었다.
할아버지는 늘 그렇게 말했었다. "말은 적어도 마음은 통하면 되는 거다." 저녁 밥상에서, 학교 준비물을 챙겨주면서, 성적표를 받아보면서도 할아버지는 그 한마디면 충분하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었다.
이제는 충분하지 않았다. 다시는 그 말을 나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서준은 그저 할아버지의 손을 붙잡았다. 손은 이미 온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디, 굳은살이 박인 그 손을 서준은 놓지 못했다. 어릴 적 그 손을 잡고 학교에 갔던 기억이, 시장을 걸었던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왔다가 아무 소용 없이 흩어졌다.
+++
장례식장은 사흘 내내 향냄새로 가득했다.
조문객들의 발소리와 낮은 곡소리가 뒤섞여 복도를 채웠다. 서준은 상복을 입은 채 그 복판에 서 있었다. 몸은 그곳에 있었지만 정신은 어딘가 다른 곳을 헤매고 있었다.
한소영은 검은 옷을 입고 나타났다. 오랜만에 보는 어머니였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것이 몇 달 전이었는지 서준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많이 힘들었지." 한소영이 서준의 등을 두드렸다. 그 손길엔 온기가 없었다.
손끝이 스치듯 가볍게 지나갔을 뿐, 그 이상의 무게는 담겨 있지 않았다.
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저렇게 담담할 수 있는 건가.' 서준은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그 생각을 지웠다.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여력조차 없었다.
이복동생 도윤이 상복 사이를 뛰어다녔다. 아직 여덟 살, 슬픔이라는 것을 알기엔 어린 나이였다.
도윤은 검은 옷이 답답한 듯 자꾸 옷깃을 잡아당기며 이 자리에서 저 자리로 뛰어다녔다. 어른들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도윤은 신경 쓰지 않았다.
"형, 나중에 피아노 쳐줘." 도윤이 서준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서준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 어떤 것도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도윤의 눈에는 이 모든 상황이 그저 낯선 어른들의 소란처럼 보이는 듯했다. 서준은 그것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슬픔을 모른다는 것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축복일 수도 있었다.
조문객들이 하나둘 다녀갔다. 대부분은 서준을 향해 형식적인 말을 건넸다.
"참 착한 손자였다며." "이제 어떻게 살려고." 그런 말들이었다.
누구도 서준의 눈을 오래 들여다보지 않았다.
어른들은 서준의 어깨를 두드리고 봉투를 건네고는 곧 다른 조문객과의 인사에 몰두했다. 서준은 그 흐름 속에서 그저 고개를 숙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슬픔을 나눌 사람이 없다면, 그것은 슬픔이 아니라 형벌이다.' 서준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빈소 한쪽에 놓인 국화 향이 코끝을 스칠 때마다 서준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한소영이 상주 자리에 앉아 손님을 맞았다. 겉으로는 침착했으나 서준은 그 침착함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손님이 위로의 말을 건넬 때마다 한소영은 적절한 순간에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 동작이 너무나 정확해서 마치 연습한 것처럼 보였다.
'저 사람은 나를 방치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슬퍼하는 척을 한다.' 서준의 속에서 그런 생각이 조용히 자라났다.
할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수술을 받았을 때도 한소영은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는 누구보다 슬픈 유족처럼 앉아 있었다.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그럴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자 조문객의 발길도 뜸해졌다. 서준은 빈소 한쪽 구석에 앉아 향이 타들어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붉은 불씨가 재가 되어 떨어지는 모습이, 자신의 마음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
발인이 끝난 밤, 서준은 텅 빈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 익숙한 냄새가 코끝에 스쳤다. 할아버지가 늘 쓰던 로션 냄새였다. 그 냄새가 아직 집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서준을 더욱 무너뜨렸다.
할아버지의 방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어둠을 바라보며 서준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을 뻗었다가 도로 거두어들이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결국 문을 열지 못한 채 서준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피아노 앞에 앉았다. 손이 건반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건반은 차갑고 매끄러웠다. 평소라면 손끝이 저절로 움직였을 그 자리에서, 오늘은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슬퍼하고 있구나." 익숙한 목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붉은 머리의 소하가 창가에 서 있었다. 창문을 열지 않았는데도, 언제나처럼 그녀는 소리 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서준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알고 있다." 소하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소하의 발걸음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마치 바닥을 밟지 않고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이제 저에게는 아무도 없어요." 서준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말을 뱉는 순간 서준은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할아버지는 떠났고, 어머니는 처음부터 곁에 없었고, 도윤은 아직 어렸다.
"내가 있다." 소하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은 닿을 듯 닿지 않았다.
"내가 있는 한, 너는 혼자가 아니다."
그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지만, 서준의 귀에는 다른 어떤 위로보다 크게 울렸다. 조문객들이 건넨 형식적인 말들과는 달랐다. 소하의 말에는 무게가 있었다.
서준은 그 말에 매달렸다. 다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녀를 위해서라면.' 서준은 그렇게 결심했다.
그 결심이 마음속에서 뿌리를 내리는 순간, 서준은 자신이 그동안 붙잡고 있던 다른 것들을 하나씩 놓아버리는 기분을 느꼈다.
학교도, 병원도, 어머니의 형식적인 방문도, 그날 이후로 서준에게는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
오직 캔버스와 건반, 그리고 그녀만이 진실이었다.
소하가 곁에 있는 동안만큼은, 세상의 다른 소음들이 모두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 결심이 곧 자신을 무너뜨릴 시작이라는 것을, 서준은 알지 못했다.
창밖의 달빛이 소하의 붉은 머리카락을 비추었다. 서준은 그 빛깔이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느껴지는지, 서준은 아직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