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무공 불구, 태양을 삼키다

1화

각성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건 스물세 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였다. 게시판 제목은 이랬다. "명상 30일이면 진짜 초능력 열립니다 (경험담)". 조회수 삼만 이천, 댓글 사백 개. 절반은 비웃음이었고 절반은 나 같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 글을 믿었다. 정확히는 믿고 싶었다. 글쓴이는 자신을 '깨달은자89'라고 소개했다. 매일 밤 정좌하고 단전에 의식을 집중하면 서른 번째 날 즈음 몸속에서 뜨거운 구슬 같은 게 만들어진다고 했다. 그 구슬이 커지면 손끝에서 전기가 튄다고. 사진 첨부는 없었다. 당연했다. 초능력자가 그런 걸 사진으로 남길 리 없으니까.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날부터 나는 매일 밤 방바닥에 앉아 눈을 감았다. 형광등을 끄고 스탠드만 켜 놓은 채였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 단전이라는 곳에 뭔가 뜨거운 게 뭉친다고 상상했다. 유튜브에서 찾은 명상 음악을 틀어놓기도 했다. 파도 소리와 목탁 소리가 섞인 음악이었는데, 삼십 분쯤 지나면 졸음이 몰려와서 결국 방바닥에 그대로 쓰러져 잔 날도 많았다. 한 달이 지났다. 아무 일도 없었다. 두 달이 지났다.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 괜찮다. 원래 그런 거니까. 그 뒤로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석을 이마에 붙이고 자거나, 특정 주파수의 소리를 들으며 손바닥을 마주쳤다. 432헤르츠였는지 528헤르츠였는지,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아무튼 그런 숫자였다. 편의점에서 파는 이온음료를 마시면 전기 저항력이 생긴다는 괴담도 실천해봤다. 하루에 세 캔씩, 일주일 동안. 배가 아팠던 걸 빼면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그다음엔 단식이었다. 사흘 굶으면 감각이 예민해진다는 말을 어디서 주워듣고 시도했다. 첫날은 배가 고팠고 둘째 날은 어지러웠고 셋째 날엔 그냥 라면을 끓여 먹었다. 감각이 예민해지긴 했다. 라면 냄새에 대한 감각이. 나는 그렇게 서른이 되었다. 세상에 초능력자는 없었고, 나는 여전히 월세 밀린 원룸에 살고 있었다. 편의점 야간 알바로 벌어들이는 돈은 월세와 통신비, 그리고 이따금 사는 명상 관련 서적값으로 다 나갔다. 서점에서 그런 책을 살 때마다 계산대 직원이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쓰면 지는 거였다. 사고가 난 건 그해 겨울이었다. 뉴스에 정체불명의 비행체가 도시 외곽 야산에 떨어졌다는 속보가 떴다. 화면 속 관제탑 관계자는 "미확인 항공기"라고 했지만 인터넷은 이미 UFO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실시간 검색어 1위였다. 커뮤니티마다 사진과 좌표가 돌았다. 대부분은 가짜였지만, 그중 몇 개는 진짜 같았다. 나는 옷도 제대로 안 걸치고 뛰어나갔다. 패딩 안에 잠옷 바지 그대로였다. 서른이 넘어서도 이런 걸 놓칠 수 없었다. 이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으니까. 편의점 사장님한테는 몸이 아프다고 문자만 남겨놓고 왔다. 나중에 잘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때는 하지 않았다. 야산 입구에는 통제선이 쳐져 있었다. 경찰차 두 대와 노란 테이프, 그리고 벌써부터 몰려든 기자들 몇 명이 보였다. 정문으로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다. 나는 뒷산 등산로로 돌았다. 사람들이 다 모르는 길이었다. 예전에 동네 형이랑 몇 번 올라가 본 적 있는, 표지판도 없는 산길이었다. 원래 등산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발이 가벼웠다. 숨이 차지도 않았다. 나는 그걸 그때는 흥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숲을 헤치고 나가자 그것이 있었다. 찌그러진 은색 구체, 표면에서 옅은 초록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크기는 자동차 한 대만 했다. 겉면은 매끈했지만 여기저기 긁히고 눌린 자국이 있었다. 마치 하늘에서 그대로 떨어진 게 아니라, 뭔가에 쫓기다가 처박힌 것처럼 보였다. 갈라진 틈 사이로 뭔가가 보였다. 사람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액체 속에 잠긴 형체였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새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게 조용했다. 다가가지 말아야 했다. 상식적으로. 뉴스에서도, 영화에서도 이런 걸 만지면 꼭 뭔가 잘못되지 않던가. 하지만 나는 그 상식을 서른 몇 년 동안 무시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명상으로 초능력을 얻겠다고 삼 년을 매달린 인간한테 상식이란 이미 오래전에 버린 물건이었다. 손을 뻗었다. 손끝이 캡슐 표면에 닿는 순간, 초록빛이 폭발하듯 커졌다. 눈이 부셨다. 뜨거움도 아니고 차가움도 아닌 감각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마치 온몸의 혈관을 따라 전류 대신 물이 흐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 나는 누워 있었다. 등 밑으로 딱딱한 나무 바닥이 느껴졌다. 천장은 나무 서까래였고, 벽에는 붓으로 그린 듣도 보도 못한 글자가 붙어 있었다. 한지 냄새, 마른 풀 냄새, 은은한 약초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딘가 사극 세트장 같은 냄새였는데,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죽은 건가.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작았다. 손가락도, 손바닥도, 전부 내 것이 아니었다. 손톱 모양도 달랐고 손등의 흉터 하나도 사라져 있었다. 편의점 알바 하다가 튀김기에 데어서 생긴 흉터였는데, 그게 없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옆에 놓인 물그릇에 얼굴을 비춰봤다. 낯선 아이의 얼굴이었다. 새까맣고 짙은 눈썹, 앙상한 볼, 열두 살 즈음으로 보이는 소년. 그런데 이상했다. 그 얼굴이 낯설지가 않았다. 머릿속에 다른 기억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홍수처럼, 한꺼번에, 정리도 안 된 채로. 이름은 강윤. 나이는 열두 살. 청명국이라는 나라의 어느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강태산, 어머니는 백선화. 마을 뒷산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고, 매년 봄이면 그 아래서 장이 열린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가 본 적도 없는 곳인데. 그리고 마을에서 부르는 또 다른 이름 하나가 함께 딸려왔다. 불구. 정확히는 "기(氣)를 거부하는 불구". 무인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나 단전에 기가 전혀 반응하지 않는, 그런 존재라고 했다. 마을 아이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 어머니가 몰래 눈물짓던 밤, 아버지가 훈련장에서 다른 문파의 아이들과 비교하며 짓던 표정까지도 함께 떠올랐다. 유쾌한 기억은 별로 없었다. 두 개의 기억이 한 머릿속에서 겹쳐지는 건 이상한 경험이었다. 마치 서로 다른 두 대의 텔레비전 채널이 동시에 켜져 있는 것 같았다. 하나는 서울 어느 원룸에서 라면을 끓이는 삼십 대 남자의 삶, 다른 하나는 산골 마을에서 검을 들지 못하는 열두 살 소년의 삶. 나는 이도현이었고, 동시에 강윤이었다. 이도현으로서의 서른 몇 해와, 강윤으로서의 열두 해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몸이 이거니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끼익. "일어났느냐." 낮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강윤의 기억 속 그 얼굴, 강태산이었다. 쌍검을 등에 멘 채로 문턱에 서 있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사내였다. 얼굴에는 굵은 흉터가 하나 있었는데, 젊었을 때 문파 간 다툼에서 얻은 것이라고 기억 속 정보가 알려줬다. 눈빛이 복잡했다. 걱정과 실망이 반쪼각씩 섞인 눈이었다. "네." 나는 대답했다. 목소리가 낯설게 갈라져 나왔다. 어색했지만, 다행히 이상하게 들리진 않은 모양이었다. 속으로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 내 아버지라고?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부모님과 각자 다른 도시에서 명절에나 한 번 통화하는 사이였는데. 이 낙차가 감당이 안 됐다. 강태산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의원 말로는 큰 병은 아니라 하더라. 다만…." 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다. 대신 방을 나갔다. 문 닫히는 소리가 뒤따랐다. 다만, 뭘까. 나는 이불을 걷고 몸을 살폈다. 특별히 아픈 곳은 없었다. 손목을 굽혔다 폈다 해봤다. 열두 살짜리 몸치고는 가벼웠다. 근육이랄 것도 별로 없는, 마른 나뭇가지 같은 팔이었다. 서른 몇 해를 살던 몸과는 완전히 다른 무게감이었다. 걸을 때 균형을 잡는 것부터 다시 배워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가슴 안쪽에서 뭔가 미세하게 웅웅거리는 감각이 스쳤다. 찰나였다. 눈앞에 흐릿한 빛의 격자 같은 게 떠올랐다가 곧 사라졌다. 마치 스마트폰 화면이 잠깐 깜빡이다 꺼지는 것처럼. 뭐였지.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한참을 앉아 있었다. 손을 뻗어 다시 그 감각을 붙잡으려 했지만 잡히지 않았다. 물속에서 손을 뻗어 그림자를 잡으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몇 번을 시도해도 결과는 같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창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마당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저녁밥 짓는 냄새가 흘러왔다. 된장국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평범한 산골 마을의 저녁이었다.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다. 죽은 것보다는 낫다. 어쨋든 몸은 있고, 숨도 쉬고, 밥 냄새도 맡을 수 있으니까. 서른 몇 해를 살면서 이보다 못한 처지도 많이 겪어봤다. 낙관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방금 그 빛은 뭐였을까. 강윤의 기억에는 그런 게 없었다. 이 몸은 기를 거부하는 불구였다. 단전에 아무것도 반응하지 않는다고, 마을 의원도, 아버지도, 다들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방금 그건. 나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있었다. 천장의 서까래 무늬를 몇 번이나 세어봤는지 모른다. 이불 속에서 손끝을 조심스레 움직여봤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러다 한 번, 딱 한 번, 아까와 같은 웅웅거림이 다시 스쳤다. 이번엔 조금 더 오래 지속됐다. 눈앞의 격자무늬도 더 선명했다. 무언가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게 뭔지는, 아직 아무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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