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무공 불구, 태양을 삼키다

2화

다음 날 아침, 나는 강윤으로서의 하루를 처음 살아보았다. 눈을 뜨자 천장의 나무 무늬가 낯설었다. 낡은 서까래, 삭은 흙벽, 창호지 문 틈으로 들어오는 옅은 빛. 지구에서 서른 몇 해를 살며 본 천장과는 결이 달랐다. 익숙해지는 데 며칠은 걸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 그 생각을 접었다. 며칠 안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몸이었다. 마을 이름은 도림촌이었다. 청명국 북부,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이었고 근방에는 청운문이라는 무가(武家)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강태산은 그 문파에서 무사로 일했고, 어머니 백선화는 창을 다루는 여무사였다. 아들 강윤이 여덟 살에 기 감응 검사를 받았고, 결과는 무반응. 이후로 마을에서는 그를 "불구"라 불렀다. 무인의 자식이 기를 못 느낀다는 건, 이 세계에서는 걷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취급을 받는 일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강윤의 기억을 통해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이미 4년이나 익숙해진 낙인이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강윤의 기억 속엔 골목에서 마주친 또래 아이들이 있었다. 나무 막대기를 검처럼 휘두르며 "불구야, 오늘도 검 못 잡냐" 하고 낄낄대던 얼굴들. 강윤은 그때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골목을 벗어났다고 했다. 그 기억을 떠올리는 지금의 나는,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화를 내기엔 이미 너무 오래된 상처였다. 대신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무반응이었던 놈이 이젠 진짜로 다른 걸 갖게 됐으니, 저 골목 애들 얼굴이 좀 볼만하겠다는. 마당으로 나가니 백선화가 창을 손질하고 있었다. 창날에 기름을 먹이는 손길이 정교했다. 손목을 꺾는 각도, 헝겊을 쥔 손가락의 힘,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움직이지 않았다. 무사의 손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손을 멈췄다. "몸은 좀 어떠니." "괜찮아요." 나는 짧게 대답했다. 그녀는 잠시 나를 살피듯 바라보다 다시 창날로 시선을 돌렸다. "아침 먹고 방에서 좀 쉬어라. 어제 열이 좀 있었으니." 그녀의 목소리엔 걱정이 담겨 있었지만, 과하지 않았다. 딱 필요한 만큼의 온기였다. 나는 그게 오히려 고맙게 느껴졌다. 지구에서 서른 몇 해를 살았던 나로서는, 이런 종류의 무심한 배려가 오래간만이었다. 부엌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강태산이었다. 어깨에 걸친 낡은 무복, 허리에 찬 쌍검. 그는 마당을 지나며 나를 한번 흘깃 보고는 "일어났냐" 한마디만 던지고 문파로 향했다. 부자간의 대화라기엔 너무 짧았지만, 강윤의 기억 속에서도 늘 이 정도였다. 무뚝뚝한 남자였다. 나쁘게 말하면 무심했고, 좋게 말하면 그게 이 사람 나름의 배려였다. 나는 그 등을 잠시 바라봤다. 넓은 등이었다. 저 등 뒤에 뭐가 있는지, 아직은 아무것도 몰랐다. 밥을 먹었다. 잡곡밥에 된장국, 나물 몇 가지. 화려하지 않았지만 뜨끈했다. 지구에서 편의점 도시락으로 때우던 아침과는 확실히 달랐다. 한 숟갈 뜰 때마다 강윤의 몸이 반응했다. 배가 고팠다는 뜻이었다. 몸은 새것이지만, 배고픔은 어디서나 똑같이 절박한 감각이었다. 방으로 돌아왔다. 이불에 눕자마자 어제의 그 빛이 다시 떠올랐다. 이번엔 도망가지 않고 눈을 감고 그 감각을 따라가 보았다. 처음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 서서히, 눈꺼풀 안쪽에 격자무늬 같은 것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각성 진행 중… 12%] 글자였다. 정확히는 눈앞이 아니라 머릿속에 새겨지는 문장 같은 것이었다. 나는 숨을 죽였다. [숙주 종족: 크립톤 (미확인)] [에너지원: 항성광(태양광) — 현재 축적량 12%] [경고: 에너지 부족. 지속적인 태양광 노출 필요] 크립톤이라는 단어가 낯설었다. 지구 만화책에서 본 이름이었다. 슈퍼맨. 그 우주선, 그 캡슐. 설마. 나는 픽 웃음이 나왔다. 이 나이 먹고 초능력 하나 얻겠다고 별짓을 다 했는데, 결국 정답은 외계인 배양 캡슐에 손을 댄 거였다니. 허탈했지만, 부정할 수도 없었다. 빨래처럼 볕에 널려야 힘이 차는 몸이라니. 마당 한구석에 걸린 젖은 옷가지들이 떠올랐다. 나도 저것들과 다를 게 없다는 뜻이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처지였지만, 지금은 웃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안 그러면 정말 억울해서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경고]라는 글자가 눈에 걸렸다. 지속적인 태양광 노출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 말은 곧, 지금 이 방구석 이불 속에서는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나는 눈을 떴다. 방 안은 여전히 그늘졌고, 창호지 문 사이로 빛이 옅게 스며들고 있었다. 저 빛으로는 부족한 걸까. 일단 확인부터 해야 했다. 나는 몸을 일으켜 마당으로 나갔다. 정오의 볕이 마당 한가운데 쏟아지고 있었다. "쉬라고 했더니." 백선화가 창을 손질하던 손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잠깐 볕만 좀 쐬고요." 나는 마당 한가운데 섰다. 눈을 감고 볕을 정면으로 받았다. 피부에 닿는 열기가 평소보다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뜨거움이 아니라, 흡수되는 감각. [축적량 13%] 숫자가 올라갔다. 확실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몇 분을 더 서 있었다. 백선화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봤지만, 나는 모른 척했다. 지금 이걸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태양을 받으면 힘이 쌓인다고 말하면, 아마 진짜 "불구"보다 더 이상한 애로 낙인찍힐 것이다. [축적량 14%] 느리다. 무척 느렸다. 이 속도로는 며칠을 볕 아래 서 있어야 할지 몰랐다. 계산을 해봤다. 하루에 이 정도씩 오른다면, 100퍼센트가 되는 데 대략 며칠. 손가락으로 셈해보다가 그만두었다. 셈이 나올수록 한숨만 나왔다. 이 세계엔 태양광 패널도 없고, 충전기도 없었다. 그냥 몸으로 서서 버티는 수밖에.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나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처음으로 뭔가가 나에게, 그러니까 강윤의 이 몸에 반응하고 있었다. 볕 아래 서 있는 동안 마당 구석에서 닭이 몇 마리 돌아다녔다. 백선화가 창날을 손질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스윽, 스으윽. 헝겊이 쇠를 문지르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배경으로 서 있으니,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낯선 세계, 낯선 몸, 낯선 힘. 그런데도 이 마당의 소리 하나는 이상하게 익숙했다. "강윤아." 백선화가 나를 불렀다. 목소리에 뭔가 다른 무게가 담겨 있었다. 나는 눈을 뜨고 그녀를 봤다. "내일 청운문에서 다시 사람이 온다더구나. 기 감응을 한 번 더 봐준다고." 심장이 조금 빨라졌다. 강윤의 기억 속에서 이 "재검"이라는 단어는 늘 실패와 함께 있었다. 몇 번을 다시 검사받아도 결과는 같았다. 무반응. "…네." 나는 대답했다. 백선화는 창을 내려놓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손을 뻗어 내 이마에 얹었다. "열은 다 내렸네." 그녀가 짧게 웃었다. 그 웃음이 어색하게 다정했다. "걱정 말아라. 이번에도 안 되면, 다른 길을 찾으면 된다." 다른 길이라는 말에 뭔가 뭉클한 게 있었다. 이 여자는 아들이 낙인찍혀도, 세상이 뭐라 해도, 늘 이런 식으로 옆을 지켰다. 나는 잠시 그녀의 손을 이마에 얹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강윤의 기억에도 이 손길이 여러 번 있었다. 재검이 실패할 때마다, 이 손이 이마를 짚었다. 그때마다 강윤은 울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지금의 나도, 울 이유는 없었다. 아직은. "저녁엔 아버지도 오시나요." 나는 물었다. 원래 강윤이라면 묻지 않았을 질문이었지만, 나는 아직 이 집의 온도를 다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오늘은 늦으실 게다. 문파에 일이 좀 있다더구나." 백선화가 대답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표정에 살짝 그늘이 스쳤다. 그 그늘의 의미는 아직 몰랐다.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 당장은. 오후 내내 나는 틈틈이 마당으로 나갔다. 볕이 좋을 때마다 서 있었다. 백선화는 두 번 더 나를 쳐다봤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재검을 앞두고 아들이 뭐라도 해보려 애쓴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로는 맞는 말이었다. 방향은 완전히 다르지만. [축적량 15%] [축적량 16%] 숫자가 조금씩 올랐다. 해가 기울면서 볕의 세기도 약해졌다. 마지막으로 마당에 섰을 때는 이미 노을이었다. 붉은 빛이 마당 흙바닥에 길게 깔렸다. 그 빛도 흡수가 되는지 궁금했지만, 숫자는 더 오르지 않았다. 직접 쬐는 것과 노을은 다른 모양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니 몸이 무거웠다. 낯선 하루를 낯선 몸으로 버틴 대가였다. 백선화가 상을 치우며 말했다. "일찍 자라. 내일 검사받으려면 몸이 개운해야지." "네." 나는 대답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밤이 되었다. 나는 이불 속에서 다시 그 문장을 떠올렸다. [축적량 17%] 낮 동안 마당에 서 있던 시간이 헛되진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17퍼센트라는 숫자는 초라했다. 이 속도라면 100퍼센트를 채우는 데 대체 얼마나 걸릴지 셈이 서지 않았다. 슈퍼맨은 태어날 때부터 완충 상태였을 텐데, 나는 방전된 배터리를 주워서 겨우 충전기에 꽂은 꼴이었다. 그것도 충전기가 태양이라는, 어디로 들고 다닐 수도 없는 물건. 내일, 청운문의 감응 도구가 이 낯선 힘을 어떻게 읽어낼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무반응으로 4년을 살아온 이 몸이, 이번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무반응을 보일지, 아니면 도구가 미쳐 날뛸 만큼 이상한 반응을 보일지. 둘 다 좋은 그림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 몸을 또다시 "불구"로 낙인찍을지, 아니면 전혀 다른 이름으로 부를지, 아무도 몰랐다. 나는 눈을 감았다. 창호지 문 밖으로 달빛이 옅게 비쳤다. 저 달빛으로는 축적량이 오르지 않는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밤은 그냥, 아무 숫자도 뜨지 않는 어둠 속에서 잠을 청하기로 했다. 내일 아침, 청운문에서 사람이 온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