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청운문에서 온 사람은 회색 도복을 입은 중년의 사내였다. 이름은 몰랐다. 강윤의 기억에도 없는 얼굴이었다. 도복 소매 끝에 청운문 특유의 구름무늬가 수놓아져 있었고, 걸음걸이마다 발밑에서 흙먼지가 일었다. 마당 한가운데 놓인 작은 청동 원반이 감응 도구라는 것이었다. 원반은 지름이 손바닥 두 개만 했고, 표면에 새겨진 문양이 낡아서 반쯤만 알아볼 수 있었다.
"손을 얹어라." 사내가 말했다. 목소리에 미리 결론을 정해둔 듯한 무심함이 있었다.
이미 답을 알고 온 사람의 목소리였다. 나는 잠깐 그 얼굴을 올려다봤다. 사내는 나를 보지 않았다. 원반만 보고 있었다.
나는 원반에 손을 얹었다. 청동 표면은 차가웠고, 손바닥에 닿는 순간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는 듯했다. 아마 그냥 기분이었을 것이다.
백선화와 강태산이 마당 가장자리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빛이 달랐다. 강태산은 팔짱을 낀 채 무표정했고, 백선화는 손끝을 살짝 쥐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소매 속에서 미세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원반은 잠시 침묵했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사내가 원반 위로 몸을 숙여 표면을 살폈다. 손끝으로 원반 가장자리를 한 번 훑고, 그다음엔 아예 원반을 뒤집어 뒷면까지 확인했다. 나는 그 손이 원반을 만지는 동안 미묘하게 고개를 갸웃하는 걸 봤다.
"역시." 사내가 혀를 찼다. "기의 반응이 전혀 없습니다. 이전과 같군요."
강태산의 표정이 굳었다. 턱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백선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쥐고 있던 손끝을 풀었다가 다시 쥐었다.
예상했던 결과였다. 나는 오히려 안심했다. 만약 원반이 내 안의 그 태양광 에너지 격자를 "기"로 잘못 읽어서 뭔가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면, 훨씬 더 골치 아픈 일이 됐을 것이다. 청운문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이것저것 조사를 하겠다고 나섰을 테고, 그럼 숨길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불구라는 낙인은 익숙했다. 낯선 정체가 드러나는 것보다는 백배 나았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강태산이 물었다. 목소리가 낮고 딱딱했다.
"기가 없는 몸에 다른 방법이 있을 리 없지요." 사내가 짐을 챙기며 대답했다. "청운문에서도 손쓸 방도가 없습니다. 그만 포기하시는 게 낫습니다."
포기라는 말이 마당에 잠깐 떠 있다가 가라앉았다. 강태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내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그가 대문을 나설 때까지 아무도 배웅하지 않았다. 강태산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나에게 말없이 등을 돌렸다. 등을 돌리는 그 동작이 유독 느렸다. 나는 그게 무슨 감정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실망인지, 지침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백선화는 잠깐 나를 쳐다봤다가 아무 말 없이 강태산을 따라 안채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마당에서 나는 원반이 놓여 있던 자리를 내려다봤다. 흙바닥에 원반 모양의 눌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자국을 발끝으로 슬쩍 문질러 지웠다.
그날 오후, 나는 뒷산으로 향했다. 몰래였다. 강윤의 기억 속 뒷산은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골짜기였다. 문파 아이들도 거긴 잘 올라가지 않는다고 했다. 볕이 잘 드는 바위 언덕이 하나 있었고, 거기서 시험을 해보기로 했다.
가는 길은 생각보다 길었다. 좁은 산길을 따라 올라가는 동안 발밑에서 마른 나뭇잎이 바스락거렸다. 새 몇 마리가 놀라서 날아올랐다. 나는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바위 언덕에 도착하자 볕이 정수리부터 쏟아졌다. 사방이 트여 있었고, 아래로는 문파 지붕들이 작게 내려다보였다. 이 정도 거리면 누가 봐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나는 눈을 감고 그 자리에 섰다.
[축적량 21%]
숫자가 낮에 조금씩 오르는 게 느껴졌다. 재검 전 마당에 서 있던 시간까지 더해진 결과였다. 볕을 받을 때마다 몸속 어딘가에서 뭔가 채워지는 감각이 있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이었다. 배가 부른 것도 아니고, 힘이 넘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뭔가가 차오르고 있다는 확신 같은 것.
나는 근처에 있는 주먹만 한 돌을 하나 집었다. 표면이 거칠고 서늘했다. 손에 쥔 채로 힘을 줘봤다.
평소보다 뭔가 가벼웠다. 조금 더 세게 쥐자, 돌 표면에 실금이 갔다.
쩍.
작은 소리였지만 골짜기에서는 유독 크게 울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갈라진 돌을 보며 나는 숨을 삼켰다.
열두 살 아이의 손힘으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결과였다. 강윤의 기억 속 문파 아이들 중 가장 힘이 좋다는 아이도 이 정도는 못했다. 그 아이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무술 수련을 하고, 밥도 다른 아이들보다 두 배는 먹는다고 했다. 그런데도 돌멩이 하나 이렇게 쉽게 쪼개진 적은 없다고 했다.
[축적량 21%]
21퍼센트로 이 정도라면, 100퍼센트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이 안 갔다. 상상하려 해도 상상이 잘 안 됐다. 애초에 이 몸으로 들어오기 전, 이런 능력을 가지고 뭘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교육도 받은 적이 없었다. 태양광 패널이 사람 몸에 붙어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 그런 걸 가르쳐주는 곳은 없었다.
나는 근처에 있는 어린 나무 하나를 붙잡았다. 팔뚝만 한 굵기였다. 힘을 주자 나무가 뿌리째 흔들렸다. 흙이 부스러지며 뿌리 쪽이 들리는 게 보였다. 완전히 뽑히기 직전, 나는 손을 놓았다. 흔적을 남기면 안 됐다.
나무가 원래대로 서 있는 걸 확인하고서야 손을 뗐다. 뿌리 주변 흙을 발로 살짝 눌러 다졌다. 누가 봐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숨을 골랐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힘자랑이 아니었다. 이건 확인이었다. 이 몸이, 이 세계의 기준으로 "불구"가 아니라, 전혀 다른 무언가라는 확인. 그리고 동시에, 그 무언가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에 대한 확인이기도 했다.
괜찮다.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아직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한참을 더 앉아서 볕을 쐈다. 숫자는 여전히 21퍼센트에서 크게 움직이지 않았다. 하루 종일 서 있어도 1퍼센트 오르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계산이 안 섰다. 문득 배터리 충전기를 떠올렸다. 아주 느린 충전기.
골짜기를 내려오는 길에, 문파 아이들 몇이 모여 있는 걸 봤다. 강윤의 기억에 있는 얼굴들이었다. 문파 정식 제자들의 자식들. 셋이었고, 나뭇가지로 뭔가를 찌르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중 덩치가 큰 아이 하나가 나를 보고 히죽 웃었다.
"어이, 불구." 그가 말했다. "재검도 또 떨어졌다며?"
소식이 벌써 퍼진 모양이었다. 문파 안에서는 이런 소식이 빠르게 도는구나 싶었다.
나는 그냥 지나치려 했다. 강윤의 기억 속에서 이 아이는 늘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걸었고, 강윤은 늘 피했다. 강윤의 몸이 약했으니 피하는 게 맞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얽힐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날은 아이가 발을 걸었다.
쿵.
나는 앞으로 넘어지면서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짧은 순간, 손바닥에 닿은 흙바닥이 움푹 파였다.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 나는 손을 재빨리 뗐다. 다행히 아이들은 웃느라 그걸 보지 못했다.
"쯔쯔, 넘어지는 것도 못 하네." 덩치 큰 아이가 놀리며 돌아섰다. 다른 아이들도 따라 웃으며 사라졌다. 웃음소리가 골짜기를 따라 멀어졌다.
나는 흙바닥에 남은 손 모양의 흔적을 내려다봤다. 깊이가 손가락 한마디쯤 됐다. 다섯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파여 있었고, 손바닥 부분은 아예 흙이 옆으로 밀려나 있었다. 힘이 전혀 조절되지 않았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방금은 운이 좋았다. 아무도 못 봤다. 하지만 다음엔 어떨지 몰랐다. 다음번엔 저 덩치 큰 아이가 볼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어른이 지나가다 볼 수도 있었다. 이 힘은 아직 내 것이 아니었다. 내 것이 되려면 조절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것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로.
나는 발로 흙을 슥슥 밀어 흔적을 지웠다. 완전히 지워지진 않았지만, 얼핏 보면 그냥 파인 자국처럼 보일 정도는 됐다. 그걸로 됐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계속 손을 내려다봤다. 이 손으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아직 아무 기준도 없었다. 문파 무술 서적에는 힘을 다루는 법이 나와 있었지만, 그건 기를 쓰는 법이었다. 나한테는 기가 없었다. 내 안에 있는 건 전혀 다른 종류의 힘이었고, 그걸 조절하는 법은 아무 책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21퍼센트짜리 힘이 이 정도라면, 완전히 각성했을 때는 이 마을 자체가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나무 한 그루를 손쉽게 뽑고, 돌멩이를 쥐는 것만으로 쪼갤 수 있는 몸. 그런 몸이 화가 나거나, 겁을 먹거나, 누군가에게 밀려서 힘을 통제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상상만으로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마당에 들어서자 백선화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 앞에 가만히 서 있는 자세였다.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눈매가 평소보다 가늘어져 있었고, 입술이 살짝 다물려 있었다.
"어디 갔었니." 그녀의 목소리가 낮았다.
나는 순간 멈칫했다. 뭔가 알고 있는 눈빛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내 손으로, 그다음엔 내 신발 밑창에 묻은 흙으로 잠깐 옮겨갔다가 다시 내 얼굴로 돌아왔다.
대답을 늦게 하면 의심을 사고, 너무 빨리 하면 준비된 대답처럼 들릴 것이다. 나는 숨을 짧게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