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약국은 촬영소에서 십오 분쯤 떨어진 골목 안쪽에 있었다.
간판 글씨가 반쯤 벗겨져 있었다.
글자 하나는 아예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나는 골목 입구에서 잠시 멈춰 섰다.
사람들 눈에 띌 만한 곳은 아니었다.
그게 좋았다.
문을 열자 종이 울렸다.
딸랑.
"어서 오세요."
주인은 안경을 콧등에 걸친 채 나를 봤다.
표정에 별 반응이 없었다.
나를 처음 보는 손님으로 여기는 눈빛이었다.
가게 안은 좁고 어두웠다.
선반마다 병들이 촘촘히 꽂혀 있었다.
어떤 건 라벨이 있었고, 어떤 건 아예 없었다.
"형진이 형 소개로 왔습니다."
그 이름을 대자 주인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안경 너머로 나를 다시 훑어보는 눈이었다.
"오랜만이네, 그 이름."
주인은 카운터를 짚고 일어나더니, 안쪽 문을 슬쩍 돌아봤다.
누가 있는지 확인하는 듯했다.
"형진이는 잘 지내?"
"글쎄요. 저도 요즘은 연락 잘 안 해서."
"흠."
주인은 더 묻지 않았다.
그는 카운터 밑에서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일점홍이야."
"이게 뭔데요."
"몇 방울이면 사람이 완전히 풀려. 술에 타면 표도 안 나."
주인은 아무 감정 없이 설명했다.
마치 감기약 파는 것과 같은 말투였다.
목소리에 높낮이도 없었다.
나는 그 병을 손끝으로 굴려봤다.
가볍고, 작았다.
이 작은 게 사람 하나를 무너뜨린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부작용은 없어요?"
"머리 좀 아프고, 다음날 기억이 흐릿한 것 빼면 없어."
"그거면 충분하죠."
내 대답에 주인은 잠깐 나를 쳐다봤다.
표정에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냥 손님 하나를 상대하는 얼굴이었다.
"향은 없어요? 냄새로 분위기 잡는 거."
주인이 옆으로 손을 뻗어 작은 병 하나를 더 꺼냈다.
라벨에 로즈마리라고 적혀 있었다.
"이건 향초에 넣어. 태우면 은은하게 퍼져. 이것도 효과가 있어. 최음 성분이 들어 있거든."
나는 병 두 개를 나란히 놓고 봤다.
작은 유리 조각들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둘 다 무해해 보였다.
그게 더 무서웠다.
"이건 얼마나 넣어야 돼요?"
"향초 하나에 두세 방울. 방 크기 봐서 조절해. 좁은 방이면 더 적게 넣어도 돼."
주인은 손가락으로 병뚜껑을 가볍게 두드리며 설명했다.
설명하는 손이 익숙했다.
이런 질문을 몇 번이나 받아봤을 손이었다.
"그리고, 남자한테 쓸 것도 필요하면 말해."
주인이 낮게 웃었다.
"서각정이라고, 코뿔소 뿔 성분 들어간 거야. 그거 하나면 밤새도 지치지 않아."
나는 잠시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무서웠던 건 그 물건들이 아니라, 그걸 아무렇지 않게 파는 이 사람의 눈이었다.
죄책감이라는 게 아예 없는 눈.
"저는 그런 거 필요 없고."
"뭐, 필요할 때 다시 와."
"세 개 다 주세요."
주인은 익숙한 손으로 병들을 검은 비닐봉지에 담았다.
소독약 냄새가 나는 얇은 종이로 하나씩 감싸서.
"현금으로 줘. 카드는 안 받아."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데 골목 끝에서 바람이 불었다.
비닐봉지 안에서 유리병들이 서로 부딪쳤다.
딸그락. 딸그락.
그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골목을 빠져나오는 내내 그 소리가 귓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봉지가 흔들렸고, 병들은 계속 부딪쳤다.
누가 이 소리를 들었을까, 잠깐 생각했다가 곧 그런 생각을 지웠다.
들킬 리 없었다.
나는 늘 그래왔으니까.
별장은 촬영소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 산속에 있었다.
길이 좁고 구불구불해서, 내려서 걸을 때마다 흙냄새가 났다.
정민수가 미리 도착해서 청소와 세팅을 마친 상태였다.
거실에는 이미 은은한 조명이 깔려 있었다.
낮은 스탠드 조명 두 개, 그리고 천장의 간접등.
소파는 부드러운 베이지색이었고, 테이블 위에는 와인잔 세 개가 미리 놓여 있었다.
"진짜 대본 논의 맞아요?"
정민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향초를 세팅하던 손을 멈추고 나를 봤다.
나는 창밖을 보며 대답했다.
"넌 그냥 애들 데려오는 거만 해."
"···네."
말끝이 흐려졌다.
정민수는 더 묻지 않았다.
그는 다시 향초를 만지기 시작했다.
손이 조금 느려졌다는 걸, 나는 눈치챘다.
애초에 묻는 성격이 아니었다.
보고만 하고,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게 그의 방식이었다.
그게 그를 오래 쓸 수 있었던 이유였다.
나는 향초 세 개를 거실 곳곳에 배치했다.
소파 옆, 테이블 위, 창가.
로즈마리 병을 꺼내 몇 방울씩 떨어뜨리는 동안, 손끝이 미끈거렸다.
기름이 손등에 조금 튀었다.
닦아내지 않았다.
오후 여섯 시, 이서연이 먼저 도착했다.
매니저 없이 혼자 왔다.
"매니저는 왜 안 왔어요."
"오늘 급한 일 있다고 해서···. 대본 얘기만 하는 거잖아요."
그녀가 별장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조명이 낮게 깔린 거실, 향초 몇 개가 이미 켜져 있었다.
로즈마리 향이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다.
"분위기가 좀 이상한데요."
이서연의 눈이 거실을 천천히 훑었다.
조명, 향초, 와인잔, 소파.
그녀의 시선이 잔 세 개에서 잠깐 멈췄다.
"편하게 얘기하려고 그런 거야."
나는 웃으며 소파를 가리켰다.
이서연은 잠시 서 있다가 조심스럽게 앉았다.
등을 곧게 세운 채, 무릎에 손을 얹은 자세였다.
경계.
그게 눈에 보였다.
"대본 얘기, 오래 걸려요?"
"아니, 금방 끝나."
"저 오늘 일찍 들어가야 해서요. 내일 새벽 촬영이 있어서···."
"알아, 안 늦게 보내줄게."
이서연은 그 말에 조금 안심한 듯 어깨를 내렸다.
하지만 손은 여전히 무릎 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삼십 분 뒤 오혜진이 도착했다.
"어우, 여기 좋네요."
그녀는 별장 인테리어를 보며 감탄했다.
신발을 벗으며 거실 안쪽까지 눈으로 훑었다.
이서연을 발견하고는 살짝 표정이 굳었다.
"저 사람도 와요?"
"같이 대본 맞춰야 하니까."
오혜진이 못마땅한 얼굴로 내 옆에 앉았다.
둘 사이 거리는 소파 하나 반쯤.
서로 시선을 피했다.
"둘이 무슨 사이길래 이렇게 어색해."
내가 슬쩍 웃으며 물었다.
"어색한 거 아니에요."
오혜진이 먼저 대답했다.
이서연은 그냥 고개를 숙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와인이 세팅됐다.
잔 세 개.
나는 손끝으로 병목을 잡고 조심스럽게 따랐다.
따르는 동안 이서연의 잔에만 살짝 더 오래 손을 머물렀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와인이 잔 벽을 타고 흐르는 소리만 거실을 채웠다.
"자, 대본 얘기 전에 한잔씩만."
나는 잔을 들었다.
이서연이 먼저 잔을 받아들었다.
"저 술 잘 못 마시는데···."
"한 잔인데 뭐."
오혜진이 대신 대답하며 웃었다.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긴장이 흘렀다.
나는 그 긴장을 즐겼다.
이서연이 잔을 든 채 잠깐 나를 쳐다봤다.
마시길 바라는 눈빛인지 확인하는 것처럼.
나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건배."
잔이 부딪쳤다.
작은 소리가 났다.
쨍.
이서연이 잔을 입에 대는 순간,
나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으려고 애썼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었다.
그녀의 목울대가 한 번 움직였다.
와인이 넘어가는 그 짧은 순간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그때 내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 이름을 보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거실을 벗어나 복도로 나왔다.
복도는 어두웠고, 창밖에서 산바람 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한 감독."
낮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한성그룹 한 이사였다.
"서연이 요즘 촬영 잘 되고 있죠?"
등골이 서늘해졌다.
왜 이 사람이 지금, 이 순간에 전화를 하는 걸까.
거실 쪽 문을 흘끗 돌아봤다.
문은 닫혀 있었다.
"네, 물론입니다."
"우리 애가 좀 여려요. 잘 좀 부탁해요."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뭔가 다른 무게가 실려 있었다.
경고인지 부탁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전화가 끊겼다.
나는 복도에 서서 잠시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있었다.
화면이 꺼지고 다시 내 얼굴이 액정에 비쳤다.
표정이 없었다.
나조차도 낯설게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거실로 돌아가자, 이서연이 벌써 잔을 반쯤 비운 채 웃고 있었다.
평소보다 눈이 조금 풀려 있었다.
오혜진이 뭐라고 말을 걸었는지, 이서연은 대답 대신 작게 웃기만 했다.
나는 소파에 다시 앉으며 그녀의 잔을 흘끗 봤다.
반쯤 남은 와인이 조명 아래서 붉게 흔들리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내가 물었다.
"그냥요···. 오늘 좀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요."
이서연이 웃으며 잔을 다시 입에 댔다.
그 웃음이, 이전에 봤던 어떤 웃음과도 달랐다.
경계가 사라진 웃음이었다.
나는 그 얼굴을 오래 바라봤다.
심장이 다시 이상하게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