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와인잔을 든 이서연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저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촬영장에서 대본을 고쳐 달라 요구할 때도, 스태프들 앞에서 목소리를 높일 때도 이서연의 손은 늘 단단했다.
지금은 아니었다.
손목이 살짝 꺾이며 잔 속 와인이 가장자리에서 흔들렸고, 그 붉은 액체가 조명을 받아 번들거렸다.
나는 그 흔들림을 눈으로 따라갔다.
잔의 곡선을 타고 흐르는 붉은 빛이, 이서연의 손가락 사이를 지나 손목까지 이어졌다.
"감독님."
이서연이 나를 불렀다.
평소와 다른 목소리였다.
끝이 무너지듯 흐트러졌고, 발음이 뭉개졌다.
"왜 이렇게 덥죠···?"
나는 대답 대신 향초를 쳐다봤다.
낮은 불빛 속에서 로즈마리 향이 실처럼 퍼지고 있었다.
좁은 거실 안, 향초 세 개가 나란히 타고 있었다.
정민수가 세팅해 둔 그대로였다.
심지 끝에서 흔들리는 불꽃이 이서연의 뺨에 붉은 그림자를 얹었다.
나는 그 그림자가 조금씩 짙어지는 걸 지켜봤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체감상으로는 한 시간 같았지만, 실제로는 이십 분도 채 되지 않았을 거였다.
로즈마리는 좁은 방일수록 빨리 퍼진다.
'형, 여자들은 원래 자기가 뭘 원하는지 몰라.'
조연출 시절, 형진 형이 그렇게 말했었다.
촬영이 끝난 밤, 회식 자리에서였다.
'알려줘야 아는 애들이야. 네가 세게 나가야 걔들도 편해져.'
나는 그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술잔을 든 손만 꽉 쥐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소주병들이 흐릿하게 흔들리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날 형진 형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넘쳤다.
마치 세상의 순리를 말하듯, 아무 죄책감도 없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 얼굴을 오래 기억했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는데도, 자꾸 떠올랐다.
오혜진이 소파에 몸을 깊이 파묻으며 웃었다.
"이서연 씨, 원래 술 약하구나."
비꼬는 말투였지만 어딘가 풀어져 있었다.
오혜진의 눈도 조금씩 게을러지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속으로 시간을 셌다.
로즈마리는 좁은 방일수록 빨리 퍼진다.
와인에 섞인 그것은 몇 방울로도 충분하다.
약국 주인이 그렇게 말했었다.
'표는 안 나요. 그냥 좀 이완될 뿐이니까.'
안경 너머 무표정한 눈이 떠올랐다.
그 남자는 아무 감정도 없이 그 말을 했다.
계산대 위에 놓인 작은 갈색 병을 내려다보던 내 손이, 그때는 떨리지 않았다.
지금 이서연의 손이 떨리는 걸 보면서, 나는 그 사실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정민수가 조용히 들어와 향초 하나를 새로 놓았다.
그의 손이 미묘하게 느려졌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곧바로 시선을 내렸다.
"불이··· 다 됐습니다."
말끝이 흐려졌다.
그는 더 묻지 않고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문틈으로 스며드는 복도의 불빛이 잠시 거실 바닥에 길게 늘어졌다가, 문이 완전히 닫히며 사라졌다.
나는 그 어둠을 잠깐 응시했다.
정민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마음에 걸렸다.
저 아이도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는 걸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감독님, 저희 다음 시즌도 계속 같이 하는 거죠?"
오혜진이 갑자기 물었다.
나는 잔을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당연하죠. 오혜진 씨 없이 이 드라마가 됩니까."
그 말에 오혜진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복귀 후 첫 작품이라는 부담을 알고 있었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아이 사진 밑에는 응원 댓글이 넘쳤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다들 조심스러워했다.
나는 그 틈을 파고들었다.
"주연 자리는 흔들릴 일 없어요. 제가 보장합니다."
오혜진이 와인을 한 입 더 마셨다.
그 눈빛이 아까보다 더 풀렸다.
목덜미까지 붉게 달아오른 오혜진이 소파 등받이에 몸을 더 깊이 기댔다.
"감독님은··· 다른 감독들이랑 다르시네요."
혀가 살짝 꼬인 채로 오혜진이 웃었다.
"다들 뒤에서는 딴말 하잖아요. 감독님은 안 그러실 거죠?"
"당연하죠."
나는 짧게 대답하며 잔을 다시 채웠다.
와인병을 기울이는 내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사실이, 나는 이상하게 만족스러웠다.
이서연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저 화장실 좀···."
말을 끝맺지 못하고 몸이 기울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이 이서연의 팔에 닿는 순간,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다.
"괜찮으세요?"
내 목소리는 침착했다.
속에서는 전혀 다른 게 끓고 있었다.
이서연이 내 팔을 살짝 붙잡으며 웃었다.
평소와는 다른 웃음이었다.
뻣뻣하던 존댓말도 어딘가 물러져 있었다.
"감독님 손··· 되게 크시네요."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이서연의 손가락이 내 팔뚝을 타고 미끄러졌다.
그 온도가 생각보다 뜨거웠다.
나는 숨을 짧게 삼켰다.
이서연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가 다시 힘겹게 떠졌다.
초점이 잡히지 않는 눈이었다.
"감독님···."
이서연이 다시 나를 불렀다.
이번엔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그저 내 팔을 붙잡은 손에 힘만 조금씩 더 들어갔다.
나는 그 손을 내려다봤다.
가늘고 흰 손가락이 내 셔츠 소매를 구겼다.
오혜진이 그 모습을 소파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이상하게 차가워지고 있었다.
나는 오혜진과 눈이 마주쳤다.
웃고 있었지만, 웃는 게 아니었다.
입꼬리만 올라간 얼굴이었다.
나는 그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으려 했지만, 향의 잔향이 너무 짙어서 아무것도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거실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향초의 불꽃이 유리잔 위에서 흔들렸고, 그 불빛이 세 사람의 얼굴 위로 각기 다른 그림자를 그리고 있었다.
나는 그 그림자 사이에서, 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늠하지 못했다.
이서연의 손이 여전히 내 팔을 붙잡고 있었다.
그 손을 놓아야 하는데, 나는 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