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감독님, 취하면 안 돼요

5화

복도 끝에서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오혜진이었다. 와인잔을 든 손이 살짝 흔들렸고, 걸음도 그만큼 흔들렸다. 하지만 그 눈빛만은 이상하게 또렷했다. 취기와 별개로 뭔가를 캐내려는 눈이었다. 나는 그 눈을 마주하지 않으려 애썼다. "이서연 씨 방 앞에서 뭐 하세요?" 목소리가 예상보다 크게 울렸다. 파티장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아직 멀리서 들렸지만, 복도는 조용했다. 그 조용함 속에서 오혜진의 질문이 유난히 크게 박혔다. 나는 침착하게 문을 닫았다. 손끝이 문고리를 놓는 순간까지도, 표정은 흔들리지 않게 신경 썼다. "많이 취하셔서 확인하러 왔습니다." 오혜진이 문을 힐끗 쳐다봤다. 그 시선이 문틈에서 내 얼굴로, 다시 문으로 옮겨갔다. "그런 것치고 오래 계셨네요." 그 말에 잠깐 숨이 막혔다. 시간을 재고 있었나. 아니면 그냥 던지는 말인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나는 억지로 웃었다. 입꼬리를 올리는 데 평소보다 힘이 더 들었다. "오혜진 씨도 많이 드셨는데, 이제 좀 쉬시는 게···." "저는 괜찮아요." 딱 잘라 말했다. 오혜진 특유의, 현장에서도 제일 목소리가 큰 그 말투였다. 촬영장에서 늘 스태프들 사이를 뚫고 나가는 목소리, 누구도 못 자르는 그 톤이었다. 하지만 발음은 살짝 뭉개져 있었다. 로즈마리 향과 와인이 이미 그의 판단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잔을 쥔 손가락이 미묘하게 풀려 있는 것도 보였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화제를 돌려야 한다. "오혜진 씨, 다음 시즌 얘기 좀 더 할까요?" 오혜진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방금까지 문을 의심스럽게 쳐다보던 눈이, 순식간에 다른 걱정으로 옮겨갔다. 복귀작에 대한 부담, 아이를 두고 나온 미안함, 현장에서 신인에게 밀리는 듯한 불안. 그 모든 게 그 얼굴에 겹쳐 있었다. 며칠 전 미팅에서 오혜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감독님, 저 이번에 진짜 잘하고 싶어요. 애 낳고 처음 복귀하는 거라서···.〉 그때도 지금과 비슷한 얼굴이었다. 불안과 자존심이 동시에 걸린 얼굴. 나는 그걸 정확히 짚었다. "주연 자리,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그렇게 안 놔둡니다." 말을 뱉으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이 사람을 붙잡아 둘 말은 이거면 충분하다. 오혜진이 소파로 돌아가 앉았다. 걸음이 여전히 살짝 흔들렸지만, 방금 전보다 표정은 훨씬 편해져 있었다. 나도 옆에 앉았다. 거리를 조금 더 좁혔다. 무릎이 거의 닿을 듯한 거리였다. 오혜진이 그 거리를 신경 쓰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그 사이, 방 안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이서연이었다. 목소리가 가늘고 힘이 없었다. 취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알 수 없었다. 오혜진이 고개를 돌렸다. 와인잔을 든 손이 잠깐 멈췄다. "이서연 씨, 괜찮아요?" 큰 목소리로 물었다. 복도 전체에 울릴 정도로 컸다. 방문 너머로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정적이 흘렀다. 그 몇 초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오혜진의 팔을 살짝 짚었다. 손끝에 닿은 팔이 뜨거웠다. 술기운이 피부까지 올라온 모양이었다. "제가 가 볼게요. 여기 계세요." 오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이미 반쯤 감겨 있었다. 잔을 쥔 손이 소파 팔걸이 위로 힘없이 떨어졌다. 몇 초만 더 지나면 그대로 잠들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다시 방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방금 오혜진 앞에서 지어냈던 미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긴장이었다. 방문을 열자 이서연이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은 채였다. 어깨가 살짝 앞으로 굽어 있었고, 숨소리가 고르지 않았다. "머리가··· 이상해요." 숨이 조금 가빠 보였다. 말을 이어가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나는 옆에 앉았다. 침대가 살짝 눌리며 이서연의 몸이 내 쪽으로 기울었다. 체온이 순간적으로 옆구리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거 뭐 마신 거죠?" 갑자기 물었다. 목소리가 아까보다 또렷했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방금까지 흐릿하던 눈빛이 갑자기 날카로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착각인지 아닌지 구분할 새도 없었다. 나는 억지로 웃었다. "와인이요. 왜요." 목소리를 최대한 평온하게 유지했다. "아니, 그냥···." 이서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 동작조차 힘겨워 보였다. "몸이 제 게 아닌 것 같아서." 그 말이 이상하게 정확했다. 너무 정확해서, 나는 잠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나는 손을 뻗어 이서연의 어깨를 짚었다. 손끝이 떨렸다. 떨림을 숨기려 손에 힘을 줬지만, 오히려 더 티가 났다. 이서연이 그 손을 피하려 했지만, 힘없이 미끄러졌다. 팔이 축 늘어지듯 옆으로 떨어졌다. "감독님···." 목소리에 처음으로 두려움이 섞였다. 그 짧은 두 글자가 방 안의 공기를 순식간에 바꿔놓았다. 나는 그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그 순간, 밖에서 오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서연 씨! 괜찮아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쿵. 쿵. 노크 소리가 방 안까지 선명하게 울렸다. 나는 손을 떼며 벌떡 일어섰다. 의자에 걸려 있던 재킷 자락이 흔들릴 정도로 급한 동작이었다. 이서연이 그 틈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리가 풀려 다시 주저앉았다. 무릎이 꺾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들어가도 돼요?" 오혜진의 손이 문고리를 잡는 소리가 들렸다. 달칵. 그 짧은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깨뜨렸다. 나는 방문 앞으로 재빨리 걸어갔다. 머릿속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리할 시간도 없었다. 문 너머, 오혜진이 지금 어떤 얼굴로 서 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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