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눈을 뜨자마자 서은아, 아니, 이제는 이도윤이라 불려야 할 몸이 낯선 방바닥에 쓰러져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도윤은 잠깐 이것도 시스템이 준비한 새로운 세트장이 아닐까 생각했다.
천 개가 넘는 세계를 떠돌며 게이 남성 역할만 강요받던 배우 생활에도 이런 식으로 시작 지점이 바뀐 적은 없었기에, 등이 배기는 나무 바닥의 감촉과 코끝을 스치는 습한 흙냄새가 오히려 지나치게 사실적으로 느껴졌다. 손끝으로 바닥을 짚어보니 결이 거칠고 축축했고, 어딘가 먼 곳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이런 배경음까지 만들어 넣을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스칠 정도로 정교했다.
『이번 세계는 특별 편성입니다. 좀비 아포칼립스 도래 10년 전, 강태오 시나리오. 협조도 미달 시 즉시 처벌.』
기계음이 머릿속에서 지나가는 순간, 도윤은 이 몸의 기억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걸 느꼈다. 처음엔 통증처럼 시작되었다가 곧 익숙함으로 바뀌는, 낯설고도 낯설지 않은 감각이었다.
다섯 살 때부터 이도윤으로 살아온 스무 해가 넘는 시간이, 남의 옷을 억지로 껴입듯 몸속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그 안에는 강태오라는 이름을 향한 오래된 짝사랑까지 함께 묻어 들어와 있었다. 유치원 마당에서 처음 마주쳤던 순간의 어색함, 골목 어귀에서 우연히 스쳐 지나가며 심장이 뛰었던 수십 번의 순간, 편지를 쓰다가 부치지 못하고 서랍 안에 쌓아둔 습관까지도.
'또 이 짓을 해야 하나.' 도윤은 그 낡은 감정의 무게에 잠깐 숨이 막혔지만, 곧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이 몸이 겁이 많다는 것도, 낯선 소리에 유독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도, 이제는 도윤 자신의 것이 되어버린 감각이었다.
골목이었다. 낮인데도 어두운 뒷골목, 좁은 담벼락 사이로 서너 명의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들의 눈빛에는 도윤이 지난 생에서 수백 번은 봐 왔던 익숙한 종류의 굶주림이 담겨 있었다. 낡은 벽돌담에는 이끼가 슬어 있었고, 담과 담 사이로 스며드는 빛은 마치 무대 조명처럼 인위적으로 좁아 보였다.
"이런 데서 뭐 하고 있나, 곱상하게 생긴 게."
가장 앞선 남자가 팔을 뻗어 도윤의 턱을 붙잡으려 했고, 도윤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지만 등이 이미 담벼락에 닿아 있어 물러날 곳이 없었다. 남자의 손끝에서 풍기는 담배 냄새와 시큼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고, 도윤은 그 냄새만으로도 이 세계가 결코 안전한 무대가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또야.' 하는 자조적인 한숨이 목 안쪽에서 올라왔다. 몇 번째 세계에서 몇 번째로 겪는 위기인지 세는 것도 지친 지 오래였다. 도망칠 곳도, 도와줄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몸을 최대한 움츠리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는데, 그 와중에도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이번엔 또 얼마나 다칠까' 하는 계산이 얄밉게 돌아가고 있었다.
손목을 잡히는 순간, 도윤은 눈을 질끈 감았는데, 그 순간 남자의 손이 허공에서 뚝 끊기듯 멈췄다.
뒤이어 골목 전체가 얼어붙은 듯 조용해졌다. 방금까지 들리던 남자들의 거친 숨소리도, 담벼락을 긁는 발소리도 순식간에 사라졌고, 대신 낮고 무거운 정적만이 골목을 채웠다.
도윤이 눈을 떴을 때 처음 본 것은 새하얀 셔츠 소매였고, 그 소매 아래로 뻗은 손이 남자의 손목을 붙잡아 꺾고 있는 모습이었다. 손의 힘줄이 팽팽하게 드러나 있었고, 손가락 사이로 남자의 뼈가 뒤틀리는 각도가 보기만 해도 아찔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는지 남자가 짐승 같은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고, 나머지 셋은 그 광경만으로도 이미 다리가 풀린 것처럼 뒷걸음질을 쳤다. 누구 하나 대꾸조차 못 하고 그대로 골목 밖으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도윤은 그제야 시선을 들어 그 손의 주인을 보았다.
키가 크고, 검은 머리칼이 이마 위로 조금 흐트러져 있었으며, 눈매는 마치 유리로 깎아 만든 것처럼 차갑고 매끈했는데, 그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도윤은 이 몸 안에 남아 있던 기억과 지금 눈앞의 실체가 동시에 겹쳐지며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소리가 실제로 들리는 것 같았다.
강태오였다.
기억 속의 소년보다 훨씬 자란 얼굴이었지만, 미간의 각도나 입술을 다무는 방식은 도윤의 기억 그대로였다. 넓은 어깨와 곧게 뻗은 자세는 마치 화면 속에서 튀어나온 배우처럼 비현실적으로 정돈되어 있었고, 그 앞에 선 자신은 소품처럼 초라하게 느껴졌다.
"괜찮으시오."
짧게 던진 그 한마디는 질문인지 확인인지 애매했고, 태오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이미 남자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목소리는 낮고 굵었으며, 발음 하나하나에 절제된 힘이 배어 있어서 도윤은 순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만 벌렸다가 다물었다.
도윤은 그 목소리의 낮은 울림에 순간적으로 안도했지만, 곧 태오의 눈동자가 자신을 훑고 지나가는 방식이 마치 물건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 같아서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다친 곳은 없는지, 옷이 찢어지지는 않았는지를 살피는 시선이었는데, 거기에는 어떤 온기도 섞여 있지 않았다.
남자들이 다 도망간 뒤, 태오는 도윤의 옷매무새를 흘긋 살피며 짧게 혀를 찼는데, 그것이 동정인지 짜증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이런 시간에 이런 곳을 혼자 다니다니, 생각이 있는 건지."
말투는 나무라는 듯했지만, 태오의 눈빛에는 미묘한 경계심이 서려 있었고, 도윤은 그 경계심의 근원이 자신이 아니라 이 골목의 위험 자체인지, 아니면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인지 알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저는… 그냥…."
말을 잇지 못하고 도윤은 시선을 떨어뜨렸다. 변명거리도, 이유도 마련해두지 않은 채로 눈을 떴으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구해줬으면서 왜 저렇게 봐.' 도윤은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겉으로는 그저 고개를 숙이며 얌전히 옷깃을 여몄다. 손끝이 떨리는 걸 감추려고 옷자락을 괜히 몇 번이나 매만졌다.
태오는 도윤을 잠시 더 내려다보다가, 문득 이 몸이 이도윤이라는 이름의, 자신의 저택 근처에서 종종 얼굴을 비추던 그 청년이라는 걸 알아챈 듯 눈썹을 살짝 좁혔다. 마치 어디서 본 얼굴인지 기억을 더듬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그 짧은 순간의 침묵이 도윤에게는 몇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 표정의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윤은 짐작할 수 없었지만, 이 남자가 자신에게 갖는 감정이 결코 단순한 호의는 아닐 거라는 예감만은 선명하게 남았다.
"몸은 괜찮으시오."
두 번째 물음은 처음보다 조금 더 낮게 가라앉아 있었고, 도윤은 그제야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대답이라기보다는 반사적인 움직임에 가까웠다.
골목 밖으로 나가는 길, 태오는 앞서 걸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았고, 도윤은 그 넓은 등을 보며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자꾸 그를 따라가고 싶어진다는 걸 느꼈다. 셔츠 위로 드러난 어깨의 선이 걸음마다 미세하게 움직였고, 그 리듬을 눈으로 좇다가 도윤은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이래서 짝사랑이 무섭다는 거지.' 도윤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으며, 이 세계에서 자신이 또 무슨 역할을 강제로 떠맡게 될지 예감하고 있었다. 좀비 아포칼립스가 도래하기까지 십 년이라는 시간이 남았다는 그 기계음의 마지막 문장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되풀이되었다.
하늘은 이미 어둑해지고 있었고, 골목을 벗어난 도윤의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저 멀리 솟아 있는 커다란 저택의 지붕이었는데, 그 지붕의 실루엣이 마치 자신을 삼킬 세트장처럼 낯설고 거대하게 느껴졌다. 저택의 창문 몇 개에서 벌써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고, 그 불빛이 유독 차갑게 반짝이는 것 같아서, 도윤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조금 더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