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1000번째 배역은 좀비 신랑

3화

서재의 공기는 종이와 잉크, 오래된 나무 냄새가 겹겹이 쌓여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도윤은 그 냄새 속에서 손끝으로 봉투의 매끈한 표면을 문지르며 숨을 죽였다.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그 봉투는, 도윤이 태오의 지시로 서류 몇 장을 가져다 놓으러 들어왔다가 우연히 눈에 걸린 것이었다. 원래는 곁눈질도 하지 않고 지나쳐야 했을 물건이었는데, 하필이면 촛불 그림자가 그 위로 길게 늘어져 있어서 마치 봐 달라고 부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인장은 낯설었다. 태오의 것도 아니고, 저택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문양이었는데, 붉은 밀랍 위에 새겨진 두 마리 새의 형상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새들은 날개를 펼치고 있으면서도 서로를 등지고 있어서, 한 쌍인지 두 원수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편지를 펼쳐 볼 자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손이 먼저 움직였다. '이러면 안 되는데.'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지만 손끝은 이미 밀랍의 갈라진 틈을 따라 조심스럽게 파고들고 있었다. 필체는 여성의 것이었다. 가늘고 유려하게 흐르는 글자들 사이로 '정원 뒤편 별채, 자정'이라는 문장이 도드라져 보였고, 그 아래 서명은 없었지만 마지막 줄에 적힌 이름 하나가 눈에 박혔다. 한소라. '약혼녀.' 도윤은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며 편지를 다시 접었다. 손끝이 떨리는 게 느껴졌는데, 그게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 스스로도 헷갈렸다. 종이를 접는 손길이 자꾸만 미끄러져서 두 번이나 다시 접어야 했다. 태오의 약혼녀가 왜 이런 편지를 남겼을까, 그것도 자신의 서재가 아닌 그의 서재에. 태오가 이 편지를 읽었을까, 아니면 아직 손도 대지 않은 걸까. 어느 쪽이든 도윤이 알 필요가 없는 일이었는데도, 머릿속은 자꾸만 그 의문 주위를 맴돌았다. '혹시 태오한테 보내는 게 아니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건 태오에게 온 편지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가 잘못 놓인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편지를 발견한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명백한 위협이 될 터였다. 도윤은 편지를 원래 있던 자리에 조심스레 되돌려 놓고 서재를 빠져나왔는데, 복도를 걷는 내내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발밑에서 카펫이 발소리를 삼켜 주는 게 다행이라 여겨질 정도로, 도윤은 그 순간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날 밤, 도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창가에 앉아 정원을 내려다보는 버릇이 며칠 사이 생겨버렸는데, 오늘따라 별채 뒤편 나무들 사이로 희미한 등불 하나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착각인가 싶어 눈을 몇 번이나 비볐지만, 등불은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나뭇가지 사이로 은은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자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방 안의 시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밤이었다. 도윤은 스스로도 왜 그런지 모른 채 방을 나섰고, 하인들이 잠든 시간이라 발소리가 카펫에 삼켜지는 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정원 뒤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밤공기가 옷깃 사이로 스며들었고, 흙과 젖은 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가지 말아야 하는데.' 발은 이미 정원의 자갈길을 밟고 있었다. 도윤은 그 사실이 스스로도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몸은 이미 별채 쪽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덤불 그늘에 몸을 숨긴 순간, 도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장면이었다. 한소라라는 여자는 - 도윤은 그녀를 이때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했는데 - 달빛 아래에서도 유난히 흰 얼굴에 짙은 눈매를 가진 여인이었고, 그녀는 낯선 남자의 품에 안겨 웃고 있었다. 웃음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는데, 그 부드러움이 오히려 도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남자는 저택의 하인도 아니었고, 태오도 아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옷차림으로 보아 신분이 낮지 않은 듯했지만, 저택 안에서 도윤이 스쳐 지나간 적 있는 얼굴들 중에는 없었다. 두 사람은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손을 맞잡았고, 그 다정함이 결코 태오를 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했다. 한소라의 손가락이 남자의 소맷자락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보며, 도윤은 자신이 지금 무언가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보고 있다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도윤은 그 자리에서 숨을 멈춘 채, 이걸 봤다는 사실 자체가 자신에게 위험이 될 거라는 예감에 몸이 굳었다. '왜 내가 이런 걸 보게 됐지.' 짧은 자조가 스쳤지만, 몸은 이미 덤불 뒤에 바짝 붙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무릎이 흙바닥에 닿아 있는 것도 잊은 채, 도윤은 그저 두 사람의 그림자가 흔들리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소라는 그날 밤 정원의 그늘 속에서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녀에게 이 밀회는 이미 여러 번 반복된 일이었고, 태오가 밤마다 정원을 홀로 배회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그가 서재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걸 하인을 통해 확인해 둔 뒤였다. 그런 확인 절차 하나하나가, 그녀에게는 이제 익숙한 습관처럼 몸에 붙어 있었다. 남자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는 순간, 그녀는 눈을 감으며 지루한 정략의 굴레에서 잠시 벗어나는 이 시간이야말로 자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여겼다. 저택 안에서의 그녀는 언제나 반듯하게 접힌 옷과 정해진 말투 속에 갇혀 있는 인형 같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스스로의 숨소리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정원 저편, 나무 그늘에서 조그맣게 흔들리는 인기척을 느낀 건 남자 쪽이었다. 그는 순간 몸을 굳히며 한소라의 어깨를 살짝 눌러 신호를 보냈고, 한소라의 웃음기 어린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버렸다. 방금까지의 나긋한 표정이 지워지고, 그 자리에 날카로운 경계심이 대신 자리 잡는 데는 채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거기 누구야." 낮게 깔린 목소리가 정원을 가르며 퍼졌고, 도윤은 그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덤불 사이로 몸을 더 낮췄지만, 이미 발밑에서 마른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버렸다. 그 작은 소리가 마치 종이 울리는 소리처럼 정원 전체에 퍼지는 것 같았다. 한소라의 눈이 정확히 도윤이 숨은 방향을 향해 꽂혔고, 그 시선 안에 담긴 것은 놀라움이 아니라 서늘한 계산이었다. '들켰다.' 도윤은 도망칠 수도, 나설 수도 없는 그 짧은 순간 동안,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진짜 위험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실감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오고, 무릎이 후들거려서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았지만, 겨우 버티고 서 있었다. 남자가 먼저 몸을 낮춰 다가오려는 기색을 보였지만, 한소라가 그의 팔을 붙잡아 세웠다. "됐어. 누군지 알겠으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태연했는데, 그 태연함이 도윤에게는 오히려 더 소름 끼치게 다가왔다. 마치 이런 상황을 이미 몇 번은 겪어 본 사람처럼, 한소라의 걸음걸이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한소라는 어둠 속에서도 도윤의 얼굴 윤곽을 알아본 듯, 입가에 얇은 웃음을 걸쳤다. "저택에 새로 들어온 그 애구나." 도윤은 그제야 자신이 완전히 발각되었다는 걸 깨달았고,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보다 먼저 몸이 얼어붙어 버렸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도망칠 수 있었다 해도 몇 걸음이나 뗄 수 있었을지 알 수 없었다. 한소라가 천천히 다가오며 눈을 좁혔다. 자갈을 밟는 그녀의 발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고, 그 소리 하나하나가 도윤의 숨을 조여 오는 것 같았다. "보고도 못 본 척, 그거 할 수 있겠어?" 질문인지 경고인지 모를 그 말이 정원의 밤공기 속으로 서서히 퍼졌고, 도윤은 대답 대신 고개를 겨우 끄덕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목소리를 내려 했지만 입 안이 바싹 말라서,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한소라는 그 끄덕임을 흡족한 듯 바라보다가, 다시 한번 입가를 얇게 올렸다. 그 웃음이 마치 다음 순간을 위한 예고처럼 느껴져서, 도윤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감각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 순간, 저택 안쪽 복도의 불빛 하나가 켜지는 것이 멀리서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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