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1000번째 배역은 좀비 신랑

4화

그 불빛은 태오의 방에서 흘러나온 것이었지만, 다행히 그는 서재의 창을 열어 밤공기를 들이려 했을 뿐이었고 정원까지 시선이 닿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도윤은 숨을 죽인 채 그 창을 올려다보았다. 태오의 그림자가 창가에 잠시 어렸다가 다시 안으로 사라지는 걸 보며,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라온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저 남자가 지금 이 정원을 내려다봤다면, 그래서 저 나무 그늘 아래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았다면 —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하네.' 한소라는 그 불빛을 확인하고서야 남자의 손을 놓고 물러섰는데, 옷매를 정리하는 손짓이 지나치게 태연해서 도윤은 오히려 그 여유가 더 무섭다고 생각했다. 도윤을 향해 마지막으로 던진 눈빛은 경고이자 다짐 같은 것이었다. "입 다물고 있어. 그럼 아무 일도 없는 거야." 낮고 짧은 목소리였다. 다정함이라곤 한 톨도 섞이지 않은, 계산된 문장이었다. 도윤은 그 말을 듣고서야 겨우 숨을 내쉬었지만, 다리가 후들거려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발목 아래로 힘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웠다.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밤바람이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소름이 돋았고, 저택 어딘가에서 개 짖는 소리가 멀게 울려왔다. '그냥 지나가다가 재수 없게 걸린 거다. 그것뿐이다.' 몇 번이나 그렇게 되새기며 별채로 걸음을 옮겼지만, 등 뒤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 뒤, 도윤은 저택 뒤편 세탁장 근처를 지나다가 또 한 번 같은 장면과 마주쳤다. 이번에는 다른 남자였다. 얼굴은 처음 보는 이였는데, 나이가 조금 더 있어 보였고 옷차림도 저번 남자보다 화려했다. 소맷단에 은실로 수를 놓은 옷을 입은 걸 보면 아마 저택 근처 다른 가문의 사람인 듯했다. 한소라는 그 남자의 품에 기대어 무언가 웃으며 속삭이고 있었는데, 낮게 흘러나오는 웃음소리가 세탁장 벽 너머까지 새어 나왔다. 도윤은 처음엔 그저 빨래를 개러 온 것뿐이었기에, 이번엔 미리 몸을 숨길 새도 없이 세탁장 문틈 사이로 그 장면을 정면으로 마주해 버렸다. 들고 있던 빨래 바구니가 손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도윤은 반사적으로 그것을 다시 움켜쥐었지만, 그 짧은 부스럭거림이 정적을 갈랐다. 한소라의 눈이 도윤을 발견하는 순간, 그 표정에 담긴 것은 지난번의 여유가 아니라 명백한 짜증이었다. 눈썹이 순식간에 좁아지고 입꼬리가 아래로 처지는 걸 보며, 도윤은 이번엔 지난번처럼 좋게 넘어가지 않으리란 걸 직감했다. '또 봤다.' 머릿속을 스치는 말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또 봤다. 왜 하필 또 나였을까. 저택 안에 하인이 몇인데, 왜 매번 이 시간, 이 자리에 있는 건 나뿐인가. 도윤은 그 자리에서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지만, 몇 걸음도 떼지 못한 채 세탁장 뒤편에서 나온 다른 하인 둘에게 손목을 붙잡혔다. 억센 손아귀가 팔뚝을 조여 오는 순간, 도윤은 이미 늦었다는 걸 알았다. "놔, 놔주세요." 발버둥 쳐 봤지만 소용없었다. 두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도윤을 세탁장 구석으로 끌어당겼고, 한소라는 그 광경을 곁눈으로 확인하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남자의 팔을 다시 붙잡으며 자리를 떴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 그 걸음걸이가, 도윤에게는 무엇보다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날 낮 동안 도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주어진 일을 했다. 물을 긷고, 마당을 쓸고, 저녁상을 나르면서도 손끝이 자꾸만 떨렸는데, 그것이 두려움 때문인지 예감 때문인지 스스로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냥 지나갈 리가 없지.' 이미 몇 번의 삶을 거치며 배운 게 있다면, 이런 종류의 침묵은 결코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날 밤, 도윤은 별채로 돌아가는 뒷길에서 세 사람에게 둘러싸였다. 두 명은 저택에서 낯익은 하인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저번 정원에서 봤던 남자였다. 달빛이 구름에 가려 사방이 유난히 어두운 밤이었고, 발밑에서 자갈이 서걱거리는 소리마저 크게 울릴 만큼 고요했다. 그들은 도윤을 나무 사이 그늘로 밀어붙이며 낮은 목소리로 협박했다. "눈치 없이 왔다 갔다 하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한 남자가 도윤의 어깨를 세게 밀치며 내뱉었고, 도윤은 등이 나무에 부딪히는 충격에 숨이 턱 막혔다. 나무껍질이 등을 긁으며 옷 안으로 흙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리는 게 느껴졌다. "아무한테도 안 말했어요." 간신히 짜낸 목소리는 떨림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 말이 오히려 상대의 화를 더 부추긴 듯했다. "안 말했다고 안심할 것 같아?" 다른 남자가 도윤의 뺨을 후려쳤고, 그 순간 시야가 하얗게 번쩍이며 입안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피 냄새였다. 익숙한 냄새였다. 전생에서도, 그 전전생에서도 몇 번이나 맛본 적 있는, 폭력의 냄새. '아, 이번에도.' 도윤은 이상하게도 그 순간 두려움보다 먼저 익숙함이 밀려오는 걸 느꼈다. 마치 오래전에 봤던 대본의 한 장면을 다시 연기하는 것처럼, 몸이 먼저 반응했다. 숨을 참고, 턱을 당기고, 배에 힘을 주는 것. 맞을 때 덜 아프게 맞는 법 같은 걸 언제 배웠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몸은 알고 있었다. 또 한 번 주먹이 날아들었고, 이번엔 옆구리였다. 숨이 컥 막히며 몸이 반으로 꺾였다. 세 사람 중 누군가가 발로 무릎 뒤를 걷어차자 도윤은 그대로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몇 대를 더 맞았는지 기억이 흐릿해질 즈음, 도윤은 바닥에 웅크린 채 그저 눈을 감고 이 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흙과 낙엽이 뒤섞인 냄새가 코끝에 닿았고, 차가운 밤공기가 벌어진 옷깃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들은 도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담담하게 매를 견디는 모습을 보며 오히려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울지도 않네." 한 남자가 발로 도윤의 옆구리를 밀며 중얼거렸는데, 그 목소리에는 조롱보다 낯선 불편함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마치 예상한 반응이 나오지 않아서 다음 대본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그는 잠시 멈칫했다. 도윤은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자조했다. '울면 좀 봐줄 건가.'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 자체가 어이없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는 건 진짜였다. 무디어진 감각 때문인지, 아니면 이 정도 폭력은 그동안 겪어본 수많은 배역의 고난에 비하면 대단치 않아서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어느 삶에서는 이보다 더한 매질도 견뎌 냈던 것 같은데, 그게 정확히 몇 번째 삶이었는지는 이제 흐릿하기만 했다. 바닥에 엎드린 채로, 도윤은 문득 이 상황이 우습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몇 번을 죽고 다시 태어나도 결국 맞고 구르는 신세는 똑같구나 싶어서, 헛웃음이 나올 뻔한 걸 겨우 참았다. 남자들은 결국 더 이상 손을 대지 않고 물러섰는데, 마지막으로 도윤의 머리채를 잡아 얼굴을 들어 올리며 낮게 경고했다. "다음엔 이 정도로 안 끝나." 그 눈빛은 진심이었다. 협박이 아니라 예고였다. 그 말을 남기고 셋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도윤은 한참을 그 자리에 엎드린 채 나무뿌리 사이로 스며드는 흙냄새를 맡으며 숨을 골랐다. 뺨은 부어오르는 게 느껴졌고, 옆구리를 짚은 손끝에서는 미미한 통증이 계속 울려왔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저택의 불빛들은 여전히 무심하게 켜져 있었고, 그 어느 창에서도 이쪽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없었다. 도윤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다음엔 이 정도로 안 끝난다는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고, 그 말이 단순한 겁주기가 아니라는 걸 이미 온몸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음번엔,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 도윤은 어두운 나무 그림자를 올려다보며 그 답을 알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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