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지안이 새로 지원한 회사에서도 서류 통과 소식이 오지 않은 채 열흘이 흘렀다. 휴대폰 화면을 확인하는 버릇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었는데, 알림창은 늘 비어 있었고 그 여백이 점점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동안 어머니의 연락은 이틀에 한 번꼴로 이어졌는데, 그 빈도가 늘어날수록 통화의 온도는 조금씩 낮아졌다.
"이번 달 생활비 네가 반 부담하는 거 잊지 않았지."
"알아요, 엄마."
"안다고 하면서 왜 매번 늦어. 절에서 스님이 그러셨는데, 니가 지금처럼 우유부단하게 살면 평생 남 밑에서 눈치나 보고 살 팔자래."
지안은 대답 대신 손끝으로 책상 모서리를 문질렀다. 나무 무늬가 손톱 밑에 걸리는 느낌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늘 이런 식으로, 걱정과 채근을 구분할 수 없게 뒤섞어 놓았다.
"엄마, 저 그림 다시 그려보고 싶어요."
"또 그 소리. 그림 그려서 밥 먹고 살 수 있으면 세상에 화가 아닌 사람이 없겠다."
"...알겠어요."
"알겠다는 말도 벌써 몇 번째니. 니가 알겠다고 해놓고 지킨 게 몇 번이나 있어."
지안은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으로 붉은 잔상이 어른거렸다.
"쉬세요, 엄마."
통화가 끊긴 후, 지안은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파트 단지 너머로 저녁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는데, 그 불빛들 중 어느 것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창틀에 이마를 댄 채로, 지안은 유리의 냉기가 피부에 스며드는 감각을 가만히 느끼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오래전에 접어둔 스케치북이 놓여 있었다. 먼지가 얇게 앉은 표지를 손끝으로 쓸어보았지만, 펼칠 용기까지는 나지 않았다.
"오늘도 표정이 안 좋으시네요." 라온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괜찮아."
"안 괜찮다고 자꾸 말씀하시면서, 안 괜찮다는 말은 안 하시네요."
지안은 짧게 웃었다. 웃음이라기엔 너무 짧고 건조한 소리였다.
"오늘 밤에 나가볼까."
"어디로요?"
"몰라. 그냥, 아무 데나."
"위험할 수도 있어요."
"위험한 게 뭔지도 모르겠어, 지금은."
라온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다만 지안이 겉옷을 걸치는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
지안이 우연히 발을 들인 골목은 낮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로등 하나가 깜빡이다 꺼지는 것을 지안은 무심히 지나쳤는데, 발밑에서 부서지는 낙엽 소리조차 이 골목에서는 유난히 크게 울렸다. 네온사인 하나 없이 어두운 벽돌 건물 사이, 낡은 철문 위에 작게 새겨진 글자 하나만이 조명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야연(夜宴).
호기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는지, 지안은 그 문을 밀고 들어갔다. 문이 열리는 순간, 낮게 가라앉은 향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백단향인지 사향인지 구분되지 않는, 낯설고도 오래된 향이었다.
내부는 상상과 달랐다. 어둡고 낮은 조명 아래, 사람들의 실루엣이 마치 그림자놀이처럼 흔들렸고, 낮게 깔린 음악이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옷차림부터 지안과는 확연히 다른 사람들이었다. 실크와 벨벳, 그리고 어딘가 인간의 것이 아닌 듯한 색채의 눈동자들. 지안은 자신의 낡은 코트가 이 공간 안에서 얼마나 초라하게 도드라지는지를 뒤늦게 깨달았다.
"여기, 초대장 없이 들어오신 분 처음 보네요." 바 테이블 뒤에서 누군가가 낮고 음악적인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짙은 감청색 삼피스 정장을 입은 그 사람은 성별을 가늠하기 어려운 중성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웃는 입술 사이로 유난히 날카로운 이가 반짝였다.
"저는... 그냥 지나가다가."
"지나가다 들어오는 문이 아닌데." 그 사람이 웃으며 잔 하나를 내밀었다. "다인이에요. 마실래요?"
잔 속의 액체는 짙은 자주색이었는데, 표면에 뜬 얇은 얼음이 조명을 받아 미세하게 반짝였다. 지안이 얼떨결에 잔을 받아드는 사이, 주변 손님들의 시선이 하나둘 그녀에게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저건 뭐야, 인간이잖아." 누군가가 낮게 비웃듯 말했다. "초대도 없이 여길 어떻게 들어온 거지."
"냄새가 너무 평범해서 재수 없네." 다른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런 것들이 꼭 하나씩 흘러들어오더라. 사냥감인 줄도 모르고."
웃음소리가 겹겹이 쌓이며 홀 안을 채웠다. 지안은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잔을 든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그 떨림이 창피함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인간 하나가 여길 왜 기웃거려. 재밋거리 삼으려고?" 키가 큰 여자 하나가 지안 앞으로 다가와 팔짱을 낀 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얼음처럼 투명한 색이었고, 그 안에 담긴 것이 호기심인지 경멸인지 지안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냥 나가려던 참이었어요."
"나가려던 참? 벌써 들어온 값은 치러야지." 여자가 지안의 어깨를 손끝으로 툭 밀었다. 그리 세지 않은 힘이었는데도, 지안은 뒤로 휘청 물러섰다. 등 뒤로 누군가의 실크 소매가 스치며 서늘한 감촉이 목덜미에 닿았다.
주변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들이 터졌다. 낮고 조롱기 섞인 그 소리들이 사방에서 겹쳐 들려오는 동안, 지안은 이 자리에 자신이 서 있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발밑의 대리석 바닥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미안한데," 지안이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낮게 말했다. "그냥 갈게요."
"어딜 가겠다고." 얼음빛 눈동자의 여자가 지안의 팔을 붙잡았다. 손끝이 지나치게 차가웠는데, 그 차가움이 살갗을 파고드는 순간 지안은 숨을 짧게 삼켰다.
"이거 놔요."
"놓으면?"
"놓으라고 했잖아요."
"인간이 명령을 하네." 여자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귀엽기도 하지."
주위의 시선들이 더 노골적으로 쏠렸다. 몇몇은 낮은 소리로 저들끼리 무언가를 속삭였는데, 그 속삭임 속에서 지안은 자신의 이름이 아닌 다른 단어들, '인간', '먹잇감', '피 냄새' 같은 단어들이 오가는 것을 어렴풋이 들었다. 다인이 바 뒤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쪽을 살피고 있었지만, 쉽게 나설 수 없는 분위기였는지 입술을 짧게 깨물 뿐이었다.
지안의 팔을 붙잡은 손끝에 힘이 더 세게 들어가는 순간, 낮고 서늘한 목소리 하나가 홀 전체를 갈랐다.
"그 손, 놓지."
목소리는 크지 않았는데도 홀 안의 모든 웅성거림을 단번에 잠재웠다. 마치 무대 위 조명이 한순간에 한 곳으로 모이듯, 모든 시선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쏠렸다. 입구 쪽 계단 위, 검은 슈트를 걸친 여자가 천천히 걸음을 내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