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일주일 뒤, 지안은 낯선 발신자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창문 밖으로 늦은 오후의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었고, 손목의 단말기가 진동하는 순간 지안은 어쩐지 그 진동의 리듬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꼈다.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지만, 그 안에 담긴 반가움을 지안은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지안아."
"...선생님?"
한재우였다. 몇 년 만에 처음 듣는 목소리였는데, 그 억양은 예전과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낮게 깔리는 어조, 문장 끝을 흐리지 않는 단정한 말투, 그 모든 것이 시간을 건너뛴 것처럼 그대로였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니."
"어떻게 저한테 전화를..."
"차이현이라는 분한테 연락을 받았어. 네 그림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던데."
지안은 순간 숨을 멈췄다. 손목의 단말기를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고, 그 떨림은 문장 하나가 끝날 때까지도 가라앉지 않았다.
"저에 대해 그분이 뭐라고 하셨는데요?"
"재능이 아깝다고. 그리고 갤러리 오프닝을 앞두고 신인 작가를 찾고 있다더라. 네 이름을 내가 추천했어."
지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몇 년 동안 눌러 두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는데, 그것이 기쁨인지 두려움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창밖의 빛이 조금씩 기울어지며 방 안의 그림자도 함께 길어지고 있었다.
"선생님, 저 그림 그만둔 지 오래됐어요."
"그만둔 게 아니라, 잠깐 쉰 거지. 그림은 그런 식으로 쉽게 없어지지 않아."
그 말은 이상하게도 며칠 전 차이현에게서 들었던 말과 겹쳐졌다. 그만둔 거예요, 아니면 그만두라고 강요당한 거예요. 지안은 그 겹침이 우연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전화를 끊고도 한참 동안, 지안은 단말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화면은 이미 꺼져 있었지만, 그 안에 아직 목소리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
갤러리 사무실은 도심 외곽의 오래된 창고를 개조한 건물이었다. 낡은 철제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동안 지안의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고, 그 울림이 마치 오래전에 두고 온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한재우는 예전보다 조금 더 마른 모습으로 지안을 맞았는데, 눈빛만은 여전히 예리했다.
"많이 컸구나." 그가 짧게 웃었다.
"선생님도 여전하시네요."
"여전할 리가. 이젠 갤러리에서 사람들 관리하는 게 그림 그리는 것보다 더 큰 일이야." 한재우는 지안을 작업실 한쪽으로 안내하며 말을 이었다. 걸음걸이는 예전과 같았지만, 그 속도는 조금 더 느려진 듣했다. "차이현 대표, 어떻게 알게 된 거니."
"...우연히 만났어요."
"그 사람, 보통 사람이 아니야."
지안이 시선을 들자, 한재우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른 무게가 실려 있었다.
"업계에서는 다 알아. 음영테크가 겉으로는 기술 회사지만, 그 뒤에서 움직이는 다른 조직이 있다는 거. 그리고 그 조직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게 차이현이라는 것도."
"다른 조직이라뇨."
한재우는 잠시 지안을 바라보다가, 화제를 돌리듯 캔버스 하나를 벽에서 내렸다. 캔버스를 옮기는 그의 손끝이 먼지를 살짝 흩날렸고, 그 가루가 창으로 들어오는 빛 속에서 잠시 반짝였다.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지금은 이걸 봐."
캔버스 위에는 낡은 스케치가 담겨 있었다. 지안이 몇 년 전, 학교를 그만두기 직전에 남기고 간 미완성 작품이었다. 색은 이미 바스라질 듯 옅어졌지만, 선의 굵기만큼은 그날의 손끝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이걸 아직 가지고 계셨어요?"
"버릴 수가 없더라." 한재우가 짧게 웃었다. "이 그림, 완성해서 갤러리 오프닝에 걸어보지 않을래."
지안은 캔버스를 한참 바라보다가, 뒤늦게 다가온 조명 아래에서 그림 속 인물의 눈동자를 발견했다. 흐릿하게 남은 그 눈동자 색이, 이상하게도 며칠 전 차이현의 눈동자와 겹쳐 보였다. 우연이었을까. 지안은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선생님, 왜 저를 다시 찾으신 거예요."
한재우는 잠시 침묵했다가, 낮게 대답했다. 그 침묵의 길이만큼, 방 안의 공기도 조금 더 무거워진 것 같았다.
"네가 그림을 그만둔 이유, 나는 아직도 온전히 알지 못하니까. 근데 이번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지안은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캔버스 속 흐릿한 눈동자만 다시 내려다보았다.
***
그날 밤, 지안의 손목 단말기가 다시 진동했다. 발신자는 차이현이었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는 순간, 지안은 낮에 보았던 캔버스 속 눈동자가 다시 떠올랐다.
"갤러리 소식 들었어요."
"네. 선생님이 신경 써주셔서."
"잘됐네요." 차이현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담담했는데, 그 안에 뭔가 다른 온도가 살짝 배어 있었다. "오프닝 날, 나도 초대받았어요."
지안은 그 말에 순간 심장이 크게 뛰는 걸 느꼈다.
"그날... 다인이라는 분도 오나요."
"올 거예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몇몇."
"다른 사람들이요?"
차이현은 잠시 대답을 미뤘다. 그 침묵의 길이가, 평소보다 조금 더 길게 느껴졌다. 수화기 너머로 아주 옅은 숨소리만 들려왔다.
"오프닝 날 알게 될 거예요. 지금은 그냥, 준비 잘하라는 말만 할게요."
통화가 끊긴 뒤, 지안은 손목 단말기 화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화면 속 검은 배경이 마치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거울처럼 느껴졌다. 라온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 좀 걸리는 게 있는데요."
"뭔데."
"음영테크 주식 관련 뉴스를 검색해봤는데, 최근 들어 이상한 루머가 돌고 있어요. 회사 내부에 '음영족'이라는 존재들이 있고, 그중 최상위가 차이현 대표라는 소문이요."
"음영족이 뭔데."
"정확한 정보는 없어요. 근데 공통적으로 나오는 단어가 있어요. 인간보다 오감이 예민하고, 특정 조건에서 눈동자 색이 변한다는 거요."
지안은 그 순간, 클럽에서 봤던 얼음빛 눈동자와 차이현이 뒤돌아보던 순간의 색이 겹쳐 떠올랐다. 그리고 오늘 캔버스 속 그림에서 발견한, 낯설게 익숙한 그 눈동자까지. 세 개의 장면이 하나의 색으로 이어지는 순간, 지안은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서늘함을 느꼈다.
갤러리 오프닝은 이제 겨우 열흘 남은 상황이었다.
그 열흘 안에, 지안은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이 조금씩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주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창밖의 어둠이 유리에 지안의 얼굴을 되비추고 있었다. 그 얼굴 위로, 아직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무언가의 그림자가 겹쳐지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