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백은호의 저택은 도성 외곽, 높은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곳에 있었다.
마차가 좁은 산길을 벗어나 넓은 대로로 접어들자, 바깥의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돌로 포장된 길과 정갈하게 심어진 가로수들이 규칙적으로 늘어서 있었다.
마차가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나는 창살 너머로 넓은 정원을 보았다.
손질된 나무들과 잔잔한 연못이 늦은 오후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연못 위로 물오리 몇 마리가 조용히 떠다니고 있었다.
(엄마의 오두막보다 훨씬 넓고… 낯설다.)
나는 창살에 손끝을 대고, 그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차가 멈추자 백은호가 먼저 내려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은 크고, 손등에는 옅은 상처 자국이 몇 개 있었다.
나는 잠시 그 손을 바라보다가, 결국 조심스레 잡았다.
손목의 쇠사슬은 이미 그가 풀어준 뒤였다.
쇠사슬이 사라진 손목이 낯설었다.
살갗에 남은 붉은 자국을 문지르며 나는 마차에서 내려섰다.
"이제부터는 여기가 네가 지낼 곳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위협도, 조롱도 없었다.
낮고 담담한 어조였다.
나는 그 어조가 오히려 더 낯설게 느껴졌다.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하인들이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지나갔다.
그들 대부분은 나처럼 동물인간이었다.
귀와 꼬리를 가진 이들, 뿔이 난 이들.
모두 정갈한 옷을 입고 있었고, 표정은 담담했다.
누군가는 물동이를 들고, 누군가는 마른 천을 안고 복도를 지나갔다.
그들 중 누구도 나를 오래 쳐다보지 않았다.
그저 잠깐 시선을 주고는 곧 제 할 일로 돌아갔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저들도 나처럼… 팔려온 거예요?"
내가 조심스레 묻자, 백은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답했다.
"그래. 대부분 그렇지. 하지만 여기선 함부로 다치게 하지 않아."
그 말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적어도 여기는… 팔다리를 자르는 곳은 아니구나.)
나는 광장에서 봤던 다른 동물인간들의 눈빛을 떠올렸다.
겁에 질려있던, 이미 무언가를 포기한 듯했던 그 눈빛들.
그것과 비교하면 이곳의 하인들은 확실히 달랐다.
등이 곧았고, 걸음에는 위축된 기색이 없었다.
복도를 지나며 나는 벽에 걸린 그림들을 보았다.
사냥하는 사람들, 말을 탄 사람들, 그리고 낯선 문양들이 새겨진 방패들.
그림 속 인물들의 눈이 하나같이 나를 따라오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는 시선을 거두었다.
계단을 오르며 백은호가 짧게 저택의 구조를 설명했다.
"이쪽은 손님이 오는 방향이고, 저쪽은 하인들이 쓰는 통로다."
"필요한 게 있으면 종을 울려. 누군가 올 거다."
나는 그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에 도착하자 그는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오늘은 쉬어. 필요한 건 다 준비해뒀으니."
방 안에는 깨끗한 침구와 작은 화장대, 그리고 따뜻한 물이 담긴 대야가 놓여 있었다.
창문에는 얇은 천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사이로 오후의 빛이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화장대 위에는 작은 유리병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무엇에 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 같은 안락함에 잠시 멍해졌다.
손끝으로 침구를 살짝 눌러보았다.
푹, 하고 손이 파묻히는 감각이 낯설었다.
"고마워요…"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백은호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마치 내가 아주 오랫동안 갈구했던 무언가를 아는 것 같은 미소였다.
나는 그 미소를 마주하며 잠시 숨을 죽였다.
(이 사람은 대체… 뭘 원하는 걸까.)
그 질문은 답을 찾지 못한 채 마음속에 가라앉았다.
그가 문을 닫고 나가자, 나는 방 안에 홀로 남았다.
창밖으로 정원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잎사귀들이 서로 스치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오두막 근처의 숲과 닮아 있었지만, 어딘가 조금 더 정돈된 느낌이었다.
(여긴 안전한 걸까.)
확신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몸이 편안했다.
나는 대야의 물에 손을 담갔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얼굴을 씻고, 목덜미에 남은 흙먼지를 닦아내며 나는 조금씩 긴장을 풀었다.
그날 저녁, 나는 저택의 정원을 거닐다가 한 여성을 마주쳤다.
토끼족 특유의 길쭉한 귀를 가진 그녀는 나를 보고 잠시 멈춰 섰다.
연못가 돌 위에 앉아 있던 그녀는 내가 다가오는 소리에 귀를 살짝 세웠다.
"새로 왔구나."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어딘가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이름이 하늬야. 여기 있는 노예들 중 하나지."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 시선에는 적의보다는 피로감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백은호가 널 어떻게 데려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해."
"조심하라니… 무슨 뜻이에요?"
나는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아 물었다.
하늬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씁쓸한 표정으로 답했다.
"여긴 겉보기엔 다른 곳보다 나아 보이지. 밥도 잘 나오고, 매질도 없고."
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
그녀의 귀가 아래로 살짝 처졌다.
"근데 그게 다가 아니야."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나는 다시 물었지만, 하늬는 더 말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곧 알게 될 거야."
그녀의 발걸음이 정원 저편으로 멀어졌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연못 위로 저녁 바람이 스치며 잔물결이 일었다.
그 물결이 이상하게 오래도록 가라앉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슨 뜻일까. 여기가 나쁜 곳이라는 거야?)
하지만 백은호의 친절한 미소, 따뜻한 방, 편안한 침구.
그 모든 것이 하늬의 말과는 너무 다르게 느껴졌다.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방으로 돌아왔다.
방문을 닫고 등을 기댄 채, 나는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오두막에서의 마지막 밤을 떠올렸다.
어머니가 왜 그렇게 문을 잠그고 불안해했는지.
왜 나를 그렇게 오랫동안 산속에 가두었는지.
(혹시 엄마도… 이런 일을 겪었던 걸까.)
천장을 올려다보며 나는 어머니의 손끝을, 그 거친 감촉을 떠올렸다.
매일 밤 문단속을 확인하던 어머니의 뒷모습.
그때는 그것이 그저 지나친 걱정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딱 한 번 흘렸던 말이 떠올랐다.
"이 세상은 우리 같은 존재들에겐 너무 잔인해."
그때는 그 말의 무게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 광장에서 조태율의 눈빛을 본 뒤로는 그 말이 다르게 다가왔다.
그 눈빛 속에 담겼던 것이 무엇인지, 나는 이제야 조금씩 짐작이 되었다.
나는 이불을 끌어당기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창밖의 나뭇잎 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다음 날 아침, 백은호가 직접 내 방문을 두드렸다.
"잘 잤나."
그는 부드러운 얼굴로 물었다.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밤새 뒤척였지만, 그 말을 굳이 꺼내지는 않았다.
"오늘부터 몇 가지를 가르쳐줄 생각이야. 이 저택에서 지내는 데 필요한 것들이지."
그의 말투는 다정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나는 아직 짐작할 수 없었다.
"필요한 것들이라니… 어떤 거예요?"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예의범절, 식사 예법, 그리고 몇 가지 기본적인 규칙들."
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 대답이 어딘가 너무 매끄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이미 수백 번 해본 말처럼.
그는 몸을 살짝 기울여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순간, 그의 눈동자 속에서 아주 미세하게 낯선 빛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푸른빛도 아니고, 검은빛도 아닌, 설명하기 힘든 색이었다.
(저건 뭐지…)
나는 이유 없이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심장이 한 박자 어긋난 것처럼 쿵, 하고 뛰었다.
하지만 그 감각은 곧 사라졌고, 그의 얼굴은 다시 평범한 미소로 돌아와 있었다.
정적이 흘렀다.
방 안의 공기가 잠시 낯설게 느껴졌다.
창밖에서 새 한 마리가 지붕 위로 날아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평범한 소리마저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자, 이리 와봐."
그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그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여전히 크고, 따뜻했다.
하지만 그 온기 아래로 무언가 서늘한 것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방문 너머로, 그날 이후 내 삶이 완전히 달라질 훈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문턱을 넘는 순간, 하늬의 말이 다시 귓가에 울렸다.
곧 알게 될 거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그제야 조금씩 두려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