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잠깐 빌린 첫사랑

3화

백서아가 편입한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우리 반의 분위기는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원래 조용하던 교실이 아침마다 술렁이기 시작했고, 쉬는 시간마다 그녀 주변으로 몰려드는 아이들의 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녀의 필통을 구경하겠다고 몰려들었고, 누군가는 그녀가 쓰는 샴푸 냄새를 맡겠다고 다가갔으며, 또 누군가는 그저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얼굴을 붉히며 물러섰다. 그 열기의 파장이 이상하게도 나에게까지 미치고 있다는 걸, 나는 점점 더 뚜렷하게 느끼고 있었다.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 정도였던 반 아이들의 시선이, 백서아가 유독 나에게만 친근하게 대하는 모습을 반복해서 목격하면서부터는 노골적인 견제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복도에서 스쳐 지나가듯 내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 급식실에서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를 골라 앉는 그녀의 동선, 그 모든 게 쌓이면서 반 아이들의 눈빛에 조금씩 날이 서기 시작했다. 그 시선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너 진짜 백서아랑 무슨 사이야?" 옆자리에 앉은 남학생이 은근한 눈빛으로 물어왔을 때,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냥 어색하게 웃어넘겼다. 손끝으로 볼펜을 빙글빙글 돌리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는데,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해준 건지 그는 피식 웃으며 더 캐묻지 않았다. 사실 나 자신도 그 관계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친구라고 하기엔 뭔가 애매하고, 그 이상이라고 하기엔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그런 어중간한 자리에 나는 여전히 서 있었다. 그런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내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새로운 관심이 다가왔다. 반에서 가장 조용하고 존재감이 옅은 편이었던 천예린이, 어느 날 점심시간에 갑자기 내 자리로 다가온 것이다. 급식실에서 돌아와 책상 위에 노트를 펼치고 있던 참이었는데, 문득 낯선 그림자가 책상 위로 길게 드리워지길래 고개를 들었다. "저기, 이준호." 그녀가 조심스럽게 내 이름을 불렀을 때, 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천예린은 반에서 늘 혼자 책을 읽거나 창밖을 바라보는 이미지가 강했던 아이였고, 나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말을 섞어본 적이 없었다. 목소리조차 낯설게 들려서, 순간 내가 아는 그 아이가 맞는지 다시 얼굴을 확인해야 했을 정도였다. "어… 응?" 나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노트를 덮으며 자세를 고쳐 앉는데, 손끝이 미세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백서아랑 친한 것 같아서." 그녀가 살짝 시선을 피하며 말끝을 흐렸다. 손가락으로 자신의 소매 끝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평소 그녀의 이미지와는 조금 어긋나 있었다. "혹시… 나도 소개해줄 수 있어? 사인 받고 싶어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약간 실망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그녀가 나에게 다가온 이유가 결국 백서아 때문이라는 사실이 어딘가 서운했던 것 같았는데, 그 감정의 근원을 제대로 들여다볼 여유도 없이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어봐줄게." 그렇게 짧은 대화를 마치고 그녀가 자리로 돌아가는 걸 지켜보는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걸음걸이가 조금 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조심스럽던 처음과는 달리, 자리로 돌아가는 발걸음에는 뭔가 안도한 듯한, 그러면서도 어딘가 계산이 끝났다는 듯한 미묘한 여유가 배어 있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잠시 눈으로 좇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렇게 여유로워 보이는 거지. 단순히 사인 하나 받고 싶어서 다가온 아이의 걸음걸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나는 곧 고개를 저으며 그 위화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괜한 의심일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그날 방과 후, 나는 백서아에게 천예린의 부탁을 전했다. 교실에 남은 아이들이 하나둘 빠져나가고 창밖으로 노을이 스며들 무렵이었는데, 그녀는 잠시 미간을 좁히며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순식간에 서늘해지는 걸 보며, 나는 괜히 목이 탔다. "그 애가 그런 부탁을 했어?" 백서아의 목소리에 미세한 냉기가 섞여 있었다. "응, 그냥 사인 받고 싶다고…" 나는 그 반응이 의외라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흐음." 그녀는 짧게 콧소리를 내며 팔짱을 꼈다. 손끝으로 팔뚝을 톡톡 두드리는 그 동작이, 뭔가를 곱씹는 듯 보였다. "그 애, 원래 그렇게 조용한 성격 아니었어?" "내가 알기로는 그런데." 나는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대답했다. "그런 애가 갑자기 너한테 말을 걸었다는 게, 좀 이상하지 않아?" 백서아의 질문에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 물음이 단순한 호기심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걸, 그녀의 눈빛에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동자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무언가가, 잠깐이지만 표면 위로 떠오른 것처럼 보였다. "그게 무슨…" 내가 되묻자 그녀는 다시 미소를 되찾으며 화제를 돌렸다. "아니야,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사인은 내가 직접 줄게. 신경 쓰지 마."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섰는데, 문 앞에서 잠깐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던 그 시선이 이상하게도 오래 남았다.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혹은 경고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대화 이후로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백서아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경계심이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이었는데, 그 이유를 명확히 짚어낼 수 없어 더 답답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그녀의 표정이 자꾸 떠올라 나는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뭘 그렇게 경계하는 걸까. 다음 날, 천예린은 예상과 다르게 다시 내 자리로 다가와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아침 조회 전,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나누는 소란스러운 틈을 타서였다. "사인 받았어. 고마워."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는데, 그 미소가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서 나는 살짝 놀랐다. 마치 어제까지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벗어던진 것처럼, 여유가 흘렀다. "별거 아닌데." 나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그녀가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눈빛이 잠깐 흔들리는가 싶더니, 곧 다시 또렷해졌다. "너 생각보다 다정하네." 그 말에 나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며 시선을 피했다.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는 척했지만, 사실은 그녀의 눈빛을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그녀의 눈빛이 사인을 부탁하던 처음의 그것과는 확실히 다른 온도를 담고 있다는 걸, 나는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애써 모른 척했다. "그럼, 나중에 봐."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살짝 흔들고는 자리로 돌아갔는데,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이상하게 가슴 한쪽이 뻐근해지는 걸 느꼈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 나 스스로도 정확히 이름 붙일 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그녀가 던진 그 말 한마디를 몇 번이나 곱씹으며 잠을 설쳤다.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낮에 백서아가 보였던 그 서늘한 눈빛이 다시 떠올라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그 말이 이렇게 마음에 남는 걸까, 하는 의문과 함께 나는 이상하게 불안한 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천예린이라는 아이가 정말 사인만을 원했던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다른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었던 걸까. 그리고 백서아는, 그 계산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밤바람이 방 안 온도를 조금씩 낮추는 사이, 나는 답을 찾지 못한 물음들만 머릿속에 겹겹이 쌓아둔 채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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