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잠깐 빌린 첫사랑

5화

다음 날 등교하자마자 나는 뭔가 심상치 않은 공기를 느꼈다. 교실 문을 열자마자 몇몇 아이들의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가, 내가 눈을 마주치기 전에 재빨리 옆으로 흩어지는 걸 보고서야 이상함을 실감했다. 뭐지, 왜 다들 나를 보고 저러는 거지. 신발을 갈아 신을 때부터 느꼈던 어색한 시선이 교실에 들어와서도 사그라들지 않았고, 몇몇은 대놓고 나를 흘깃거리며 귀엣말을 주고받았다. 나는 그저 어깨를 움츠린 채 내 자리로 향했는데, 그마저도 발걸음이 이상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어색함의 정점은 백서아였다. 평소라면 내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먼저 인사를 건네거나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을 그녀가, 오늘은 팔짱을 낀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은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그 안에 뭔가 딱딱하게 굳은 것이 있다는 걸 나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어제 학생회실 갔었다며." 목소리에는 억양이 없었다. 마치 사실을 확인하려는 것뿐이라는 듯 평평했지만, 그 평평함이 오히려 더 신경을 긁었다. "응, 서류 때문에." 나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는데, 그녀의 표정이 더 어두워지는 걸 보고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서류 때문이라는 말이 그렇게 문제가 될 일인가 싶었지만, 그녀의 미간이 좁아지는 모습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유서윤이 뭐라고 했어?" 그녀가 재차 물었다. 이번엔 목소리에 살짝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냥… 조심하라고." 나는 정직하게 말했다. 굳이 숨길 이유도 없었고, 사실 그 말 자체가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조심하라고?" 백서아가 낮게 되뇌더니 짧게 헛웃음을 지었다. "허, 그 사람도 참." 그 웃음소리에는 냉소가 섞여 있었다. 마치 유서윤이라는 이름 자체에 반응하는 것 같았는데, 그 반응이 단순한 학생회 임원 사이의 신경전 이상의 무언가처럼 느껴져서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둘이 아는 사이야?" "학생회 부회장이랑 톱 아이돌이면 학교 행사에서 몇 번 마주칠 수밖에 없지." 그녀가 대답을 흐리며 화제를 돌렸는데, 나는 그 회피가 뭔가를 감추기 위한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그녀의 손끝이 책상 모서리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고, 나는 그게 그녀가 무언가를 참고 있을 때 나오는 버릇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수업 시간 내내 나는 백서아의 옆얼굴을 곁눈질했다. 평소 같으면 필기를 하다가도 종종 나를 향해 웃어 보이던 그녀였는데, 오늘은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앞만 보고 있었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크게 다가와서, 나는 수업 내용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점심시간, 나는 급식실로 향하던 중 복도에서 백서아와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붙잡더니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이준호, 너 나 말고 다른 애들이랑 친하게 지내지 마." 그 말에 나는 순간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뭐?" "천예린도, 유서윤도." 그녀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너는 이제 내 순번 첫 번째야. 다른 애들이 끼어드는 거, 나는 싫어." 순번이라는 단어가 귀에 박히는 순간 나는 이상한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그 표현이 마치 나를 어떤 목록에, 어떤 서열에 올려놓고 관리하겠다는 선언처럼 들려서였다. 순번이라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그게 무슨 소리야, 순번이라니." 나는 당황해서 되물었다. "말 그대로야." 그녀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 눈빛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조금의 장난기도 없었다. "너한테 다가오는 애들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거야. 그러니까 확실하게 정해두려는 거지. 첫 번째는 나. 다른 애들은 그다음." "그런 걸 나 없이 정하는 게 말이 돼?" 나는 반박하려 했지만 그녀의 표정에 흔들림이 전혀 없어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마치 이미 정해진 규칙을 통보하는 사람처럼, 그녀는 내 반박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여유롭게 받아넘겼다. "말이 안 될 게 뭐야." 그녀가 낮게 웃으며 내 팔을 살짝 붙잡았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온도가 묘하게 뜨거워서, 나는 순간 팔을 빼려다 말고 그대로 멈췄다. "난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놓고 있었으니까." 오래전부터, 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도대체 언제부터, 어떤 계산으로 그런 걸 정해뒀다는 건지, 나로서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문득 며칠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하교길, 학교 뒷골목을 지나던 중 어디선가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낯선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던 그날의 기억이었다. 골목 안쪽에서 천예린이 낯선 남자에게 팔을 붙잡힌 채 뒷걸음질 치고 있었고, 나는 별생각 없이 그쪽으로 뛰어들어 그녀를 감쌌다. '놔주세요.' 내가 그렇게 소리쳤을 때, 남자는 흠칫 놀라 손을 놓고 도망쳤고, 천예린은 창백해진 얼굴로 내 팔을 붙잡은 채 한동안 떨고 있었다. 그날의 골목은 유난히 어두웠고, 가로등 하나가 깜빡이며 그녀의 얼굴을 간헐적으로 비췄던 것까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그녀의 손이 얼마나 차가웠는지, 그리고 그 손이 얼마나 세게 내 팔을 움켜쥐었는지도. 그 사건 이후로 그녀의 태도가 달라졌다는 걸, 나는 그제야 어렴풋이 깨달았다. 처음엔 백서아를 통한 접근이었을지 몰라도, 그날의 일을 겪은 후로는 뭔가가 진짜로 바뀌어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우연히 도와준 것뿐인데, 그 우연이 어쩌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관계를 비틀어놓고 있는 건 아닐까. …설마, 그럴리가. "…무슨 생각 해?" 백서아가 내 팔을 놓지 않은 채 물었다. 그녀의 손끝에 힘이 살짝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아니, 아무것도." 나는 서둘러 대답을 피했다. 속마음을 들킬까 싶어 나도 모르게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때, 복도 끝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준호." 유서윤이었다. 그녀는 늘 그렇듯 흐트러짐 없는 걸음으로 다가오다가, 우리 둘을 번갈아 보다가, 백서아가 내 팔을 붙잡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미묘하게 표정을 굳혔다. 그 짧은 순간 그녀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할 말 있는데, 잠깐 시간 있어?" 그녀가 물었다. 존댓말도 반말도 아닌 애매한 어조였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압박이 담겨 있었다. 백서아의 손에 힘이 살짝 더 들어가는 걸 느끼며, 나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복도의 소음이 순간적으로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졌고, 오직 세 사람 사이의 공기만이 팽창하듯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백서아는 여전히 내 팔을 놓지 않았고, 유서윤은 그런 그녀를 똑바로 응시한 채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이 관계가 앞으로 어디로 흘러갈지, 나는 그 순간 아무런 확신도 가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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