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며칠 뒤, 담임이 나를 따로 불러 세운 건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급식실에서 나와 교실로 돌아가는 길, 복도 게시판 앞을 지나던 나를 담임이 손짓으로 불러 세웠다.
"이준호, 학생회에서 잠깐 오라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무슨 일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아 어리둥절한 얼굴로 담임을 바라봤다. 학생회라니. 나는 지금까지 학생회와 딱히 접점이 있었던 적도 없었고, 반장도 아니었으며, 무슨 임원 활동 하나 맡아본 적도 없었다.
"저요? 저 무슨 일인데요?"
"몰라, 나도. 그냥 서류에 서명할 게 있다던데."
담임은 그 말만 남기고는 바쁘다는 듯 다시 교무실 쪽으로 사라졌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교무실을 나서 학생회실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는 내내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서류라니, 서명이라니.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학생회실 문 앞에 서서 노크를 하자 안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서니 책상 앞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한 여학생이 나를 맞이했다. 창문으로 들어온 오후 햇살이 그녀의 옆얼굴을 비추고 있었는데, 흐트러짐 없이 정리된 책상 위 서류 뭉치와 그녀의 자세만 보아도 이곳의 분위기가 꽤나 딱딱하게 느껴졌다. 2학년 학생회 부회장이라는 명찰을 단 그녀는, 나중에 알게 된 이름으로 유서윤이었다.
"백서아 학생 편입 관련 서류에 네 서명이 필요해서."
그녀가 담담한 어조로 설명하며 서류 몇 장을 내밀었다. 반장이 아닌 내가 왜 서류에 서명을 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그녀가 곧 이유를 덧붙였다.
"백서아 학생이 지정한 도우미가 너라서."
"저요?"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심장이 살짝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백서아가 나를 지정했다는 게, 그것도 학생회 서류에까지 이름을 올릴 정도로 정식으로 절차를 밟았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런 것 같더라."
유서윤은 짧게 대답하며 서류를 넘겨줬다. 그녀의 표정에는 별다른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지만, 나는 그 무심함 속에서 오히려 더 큰 긴장감을 느꼈다. 마치 이미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굳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굴고 있는 것 같았다.
서류를 받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인적사항이며 편입 절차며, 낯선 용어들이 빽빽하게 적힌 서류를 훑어보는 척했지만 사실 눈에 제대로 들어오는 글자는 몇 개 되지 않았다. 서명을 하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는데, 그녀가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는 걸 느끼며 나는 서둘러 서명을 마쳤다.
펜을 내려놓는 순간까지도 유서윤의 시선이 내 손끝에 머물러 있는 게 느껴졌다. 마치 내가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 그 미세한 떨림까지도 다 계산에 넣고 지켜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고마워."
그녀가 서류를 정리하며 짧게 인사했다. 그리고 내가 자리를 뜨려는 순간,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준호, 넌 최근에 여러 사람 관심을 받는 것 같은데."
그 말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봤다.
"그게 무슨…"
"백서아뿐만 아니라, 천예린도."
그녀는 서류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나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차분하지만 서늘한 눈빛이었다. 학생회실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가라앉는 것 같았다. 형광등 소리만 낮게 웅웅거리는 정적 속에서, 그녀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
그 짧은 경고가 어딘가 무겁게 다가와 나는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왜 하필 이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유서윤과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사실상 첫 대면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그녀가 나에 대해 이렇게까지 세세히 파악하고 있다는 것도 이상했고, 굳이 경고성 발언까지 던지는 이유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내가 겨우 그렇게 대답하자, 유서윤은 옅게 웃었다. 비웃음도 아니고 동정도 아닌, 그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고."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뭔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결국 인사도 제대로 못 한 채 학생회실을 나섰다.
도대체 왜 그녀까지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이 모든 관심이 정말로 나 개인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뭔가가 얽혀 있는 건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복도를 걸으며 나는 계속 그 말을 곱씹었다. 백서아뿐만 아니라, 천예린도.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놓인다는 것 자체가 낯설고 이상했다.
그날 오후, 교실로 돌아온 나는 천예린이 다른 반 아이와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엿듣게 됐다. 원래는 화장실에 가려고 복도를 지나던 참이었는데, 모퉁이를 돌자마자 낮게 흘러나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복도 모퉁이에 서서 통화를 하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는데,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괜찮아, 계획대로 하면 돼."
그녀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낮게 속삭이는 걸 들었을 때, 나는 순간 숨을 죽이며 걸음을 멈췄다. 벽 너머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 교실에서 보던 밝고 상냥한 어조와는 확연히 달랐다. 낮고, 계산적이고, 마치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애만 확실히 내 편으로 만들면, 나머지는 상관없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전화를 끊고 뒤를 돌아봤는데, 하필 그 순간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방금까지의 그 서늘한 목소리와 지금의 얼굴 사이에서 어떤 괴리감이 느껴져 나는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대로 얼어붙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그녀의 목소리에서 평소와는 다른 냉기가 느껴졌다.
"방금."
나는 얼떨결에 사실대로 대답했다.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들었어?"
그녀가 다시 물었을 때,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냥 고개를 저었다. 사실은 다 들었으면서도.
"아니."
나는 짤막하게 부정했다. 심장이 쿵쾅거렸고, 손바닥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천예린은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이내 다시 평소의 부드러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 전환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방금 전의 서늘함이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신경 쓰지 마."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떠났지만,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아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 눌렀다.
그 애만 확실히 내 편으로 만들면.
그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 애가 누구를 말하는 건지, 처음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길한 예감이 점점 짙어졌다. 유서윤의 경고와 천예린의 통화 내용이 겹쳐지면서, 이 모든 것이 그저 우연일 리 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나를 붙잡았다.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서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백서아의 도우미로 지정된 일, 유서윤의 알 수 없는 경고, 그리고 천예린이 누군가와 짜고 있는 듯한 그 통화까지. 조각조각 흩어진 단서들이 자꾸만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지려는 것 같았는데, 나는 그 그림이 완성되는 것이 두려워 애써 눈을 감았다.
결국 나는 그 대상이 나일 수도 있다는 불안한 예감을 떨쳐내지 못한 채 잠들었다. 도대체 이 모든 관심의 이면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 걸까, 하는 물음이 끝없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