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카페 문에 달린 종이 울린 뒤로, 나는 그 자리에서 정확히 삼 초쯤 움직이지 못했다.
바람이 문틈으로 밀려들어와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는데도 나는 그 서늘함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눈은 이미 안쪽 창가 자리에 못 박혀 있었고, 머릿속에서는 이미 확률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 학교 검도부 에이스, 검도부 정규선수, 검도부 매니저. 세 명이 한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있는 그림을, 나는 한빛고 복도에서 지나가며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었다. 급식실 앞에서, 체육관 입구에서, 심지어 등굣길 버스정류장에서도. 다만 그 그림이 지금 이 카페 안에서, 내가 반년 넘게 파티를 짜온 사람들의 얼굴로 다시 조립될 거라고는, 어떤 시나리오에도 넣어본 적이 없었다.
무영검전을 시작한 게 작년 겨울방학이었다. 친구 하나 없이 혼자 공략 게시판만 들락거리던 나에게, 우연히 붙게 된 고정 파티가 있었다. 산, 타마, 모에나. 닉네임 세 개가 내 게임 인생의 절반을 채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밤 열 시, 우리는 어김없이 접속해서 레이드를 돌았다. 그 시간표를 반년 동안 어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산은 게임 안에서 늘 남자였다. 무영검전의 캐릭터 커스터마이징은 성별을 선택할 수 있게 되어 있었고, 산은 그중에서도 가장 남성적인 체형과 낮은 목소리 보이스팩을 골라 쓰는 유저였다. 검격의 궤적이 지나치게 정갈해서 나는 늘 산을 대학생, 혹은 그 이상의 나이일 거라고 짐작했다. 보스전에서 딜 사이클을 짜는 방식이 마치 교본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고, 실수 한 번 없이 같은 패턴을 반복하는 걸 보면서 나는 몇 번이나 저 사람은 분명 검을 실제로 배운 적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창가에 앉아 나를 향해 손을 반쯤 들어 올리고 있는 사람은, 한빛고 3학년도 아니고 나와 같은 2학년, 그것도 전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그 이서연이었다.
이서연이라는 이름은 나도 익히 알고 있었다. 전국대회 개인전 3위, 학교 홍보 영상에 실린 시범 시연, 후배들 사이에서 도는 존경 섞인 별명까지. 그 이름을 게임 캐릭터명 뒤에 붙이는 데 걸린 시간은 채 일 초도 되지 않았지만, 그 일 초 안에서 나는 지난 반년의 기억을 통째로 다시 계산해야 했다.
타마는 고양이귀 도적이었다. 게임 내 설정으로는 볼륨감 있는 체형이었는데, 실제로 저 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애는 마르고 각이 진 어깨를 가진, 오유진이었다. 검도부 정규선수라는 타이틀이 이제야 이해가 됐다. 함정을 피하는 감각이나 몹 어그로 범위를 계산하는 속도가 유난히 빠르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우연이 아니었다는 게, 지금 이 순간에서야 셈이 맞아떨어졌다. 검도부에서 매일같이 상대의 움직임을 읽고 반응 속도를 훈련해온 사람이라면, 필드에서 함정 위치를 반박자 먼저 잡아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동안 타마의 채팅을 몇 번이나 캡처해서 다시 읽어본 적이 있었다. "왼쪽 몹 어그로 넓음." "여기 함정 있음, 세 칸 앞." 문장은 늘 짧았고, 느낌표도 이모티콘도 없었다. 그 절제된 말투를, 나는 그냥 원래 성격이 그런 유저겠거니 하고 넘겼었다.
모에나는 금발 엘프 치유 마법사였다. 채팅창에 이모티콘을 넘치게 쓰고, 파티원이 조금이라도 잘하면 즉시 칭찬하는 성격이었다. 그 밝음이 그대로 실물로 옮겨온 듯한 얼굴이, 지금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윤하늘. 검도부 매니저. 학교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남학생은 거의 없었다. 축제 때 반 대표로 나가서 사회를 봤다는 이야기, 후배들 물병까지 챙겨준다는 이야기, 그런 소문들이 뒤늦게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채팅창에서 "님 힐 늦어서 미안!! ㅠㅠ" 하고 사과할 때마다, 나는 그게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실제로 저 애가 검도부 후배들 물병을 챙긴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느꼈던 감정이, 지금 다시 목구멍 근처에서 뜨겁게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발을 떼지 못한 채로, 최근 몇 달간 파티 채팅창에서 나눈 대화들을 순서 없이 되짚고 있었다. 서연이 보스 패턴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유진이 필드에서 늘 함정 위치를 먼저 알려줬던 것, 하늘이 파티원 컨디션이 안 좋을 때마다 먼저 물었던 것. 지난달 3주 연속으로 실패했던 그 레이드 보스, 화염귀왕. 서연이 세 번째 시도 끝에 패턴을 완전히 외워서 "3번째 화염구는 항상 왼쪽에서 온다"고 알려줬을 때, 나는 그게 그냥 감이 좋은 유저의 직감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감이 아니라, 매일 도장에서 상대의 다음 동작을 예측하는 훈련을 해온 사람의 습관이었다.
그 모든 게 지금 이 세 사람의 얼굴 위에 다시 겹쳐지자, 손끝이 저릿하게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아직 자리에 앉지 않았으니, 문을 열고 나가는 데는 이 초도 걸리지 않는다는 계산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문까지의 거리는 대략 다섯 걸음, 문이 열리는 데 걸리는 시간까지 합쳐도 이 초 안에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그 계산은 곧바로 무의미해졌다. 서연이 이미 나를 발견했고, 손을 완전히 들어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기다!"
하늘의 목소리가 카페 안에 크지도 작지도 않게 울렸다. 다정하고 밝은, 채팅창의 말투 그대로였다. 그 목소리를 실제로 들은 건 처음이었는데도, 나는 이상하게 그게 낯설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목소리가 채팅창 말투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확신이 흘러내렸다. 진짜였다. 이 사람들이 정말로 산과 타마와 모에나였다.
주변 테이블에서 몇몇 시선이 우리 쪽으로 잠깐 돌아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늘의 목소리가 그렇게 크지도 않았는데도, 이서연이라는 이름값이 만들어내는 공기는 확실히 남달랐다. 나는 그 짧은 순간에도 이 카페 안에 몇 명이나 우리 학교 학생인지, 몇 명이나 저 세 사람을 알아볼지를 셈하고 있었다. 답은 금방 나왔다. 최소 세 테이블. 알아볼 사람이 셋은 있었다.
유진은 손을 흔들지 않았다. 그냥 팔짱을 낀 채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시선이 채팅창에서 "왼쪽 몹 어그로 넓음"이라고 짧게 끊어 쓰던 그 절제된 태도와 정확히 같은 온도였다. 눈을 마주친 순간 나는 저 시선이 나를 재고 있다는 걸 알았다. 파티원으로서의 나, 학교 후배로서의 나,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어떤 얼굴로 나타났는지까지.
나는 걸음을 옮겼다. 다리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기보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계산 결과가 몸을 밀어낸 것에 가까웠다. 협상에서 밀리면 끝이라는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여기서 뒤돌면 6개월치 파티 신뢰가 통째로 무너진다는 걸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화염귀왕을 세 번 실패하고 네 번째에 잡았던 그 밤, 서연이 채팅창에 "다음엔 꼭 같이 클리어하자"고 적었던 문장이 스쳐 지나갔다. 그 문장을 쓴 사람이 지금 눈앞에서 웃고 있었다.
테이블까지 가는 그 짧은 거리 동안, 나는 세 사람의 눈이 나를 어떻게 훑는지 하나씩 관찰했다. 서연은 침착하게, 유진은 분석적으로, 하늘은 반짝이는 눈으로. 세 개의 시선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를 가늠하고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감각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발걸음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세 개의 음료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스아메리카노, 밀크티, 그리고 딸기라떼. 그 조합조차도 어딘가 채팅창에서 봤던 취향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 같아서, 나는 또 한 번 계산을 하고 있었다. 이게 우연일 확률과, 우연이 아닐 확률.
의자 세 개 중 비어 있는 한 자리가 정확히 나를 위해 남겨져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이미 처음부터 이 자리는 나를 위해 준비된 자리였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이다, 진."
서연이 게임 내 내 캐릭터명을 그대로 불렀다. 그 순간 나는, 이 자리에서 도망칠 명분이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는 걸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