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카페 안의 공기가 조금씩 편해지고 있었다.
처음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의 냉기 같던 어색함은, 이제 반쯤 녹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 잔에서 올라오던 김도 어느새 사그라들어 있었고, 나는 그 사실을 뒤늦게 눈치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가늠이 안 됐다. 처음 앉았을 때는 5분이 다섯 시간처럼 느껴졌는데, 지금은 정반대였다.
서연이 리더 특유의 침착함으로 대화를 이끌었고, 유진이 짓궂은 태클로 분위기를 흔들었고, 하늘이 그 사이를 다정함으로 메웠다. 게임 안에서 파티가 굴러가던 방식이, 현실에서도 정확히 같은 리듬으로 재현되고 있었다.
그 정확함이 오히려 이상했다. 캐릭터 위에 성격을 덧씌운 게 아니라, 성격 위에 캐릭터가 얹혀 있었던 거라면.
"참, 그날 그 보스 기억나?" 서연이 문득 말을 꺼냈다. "칠흑의 계승자 3구역, 그 패턴 갑자기 바뀐 놈."
기억이 났다.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
공식 패치 노트에는 안 나와 있던 패턴이었다. 2페이즈로 넘어가는 순간 광역 강타 대신 세 번 연속 관통 찌르기가 나왔고, 그 타이밍은 기존 공략 영상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나는 그날 세 번 죽었다. 정확히는 첫 번째 죽음에서 원인을 몰랐고, 두 번째는 확인하려다 다시 죽었고, 세 번째는 회피 판정을 걸었는데도 이해할 수 없는 타이밍에 맞았다.
서연이 마지막에 그 패턴을 정확히 맞춰 처치했다. 무기 강화 수치와 크리티컬 확률까지 감안하면, 그 타이밍에 그 정도 딜을 넣는 건 계산상으로도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그거 사실 내가 미리 알고 있었어." 서연이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검도부 훈련 끝나고 유튜브 보다가 해외 클리어 영상 하나 찾았거든. 근데 그거 말 안 하고 그냥 맞춰서 쳤어. 재수 좋게 맞은 척 하려고."
그 말에 나는 조금 어이없다는 듯 웃음이 나왔다.
게임 안에서는 신뢰감 있게 파티를 이끌던 리더가, 실은 뒤에서 정보를 미리 캐고 자연스럽게 연출까지 했다는 사실이, 왠지 서연의 성격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철저함과 여유가 동시에 있는 사람. 준비는 남들보다 몇 배로 해두고, 그 준비를 아무렇지 않게 감추는 사람. 그게 검도부 에이스라는 타이틀과도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칼을 잡는 사람들은 원래 그런 식이라고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화려한 초식보다 이미 이긴 싸움을 만들어놓고 시작하는 쪽을 선호한다고. 서연을 보고 있으니 그 말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너무하네." 유진이 옆에서 팔짱을 끼며 웃었다. "그거 아는데 우리한테 말 안 한 거야?"
"말했으면 재미없잖아." 서연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리더의 자세냐."
"리더는 결과로 말하는 거야."
그 대답에 유진이 못 이기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고, 하늘이 손끝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역시 서연이답다." 하늘이 말했다. "근데 진 오빠는 그때 왜 세 번이나 죽었어? 크리티컬 확률 12퍼센트라며. 운이 없었나?"
'진'이라는 그 두 글자가 여전히 조금 낯설게 들렸다. 게임 안에서 불리던 이름이 현실의 얼굴들 앞에서 그대로 소리로 나올 때마다, 나는 매번 반박자 늦게 반응했다.
"패턴이 바뀐 걸 몰랐으니까." 나는 조금 억울한 투로 답했다. "데이터에 없는 변수는 계산이 안 돼."
"그것 봐, 완전 계산왕." 하늘이 다시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카페 안에서 유난히 밝게 울렸다.
나는 그 순간,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느꼈던 긴장이 거의 다 풀려 있다는 걸 알았다.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이 어느 틈에 빠져나갔는지도 모르게 사라져 있었고, 손끝에 남아 있던 냉기도 이제는 미지근한 온도로 바뀌어 있었다.
게임 캐릭터와 실제 얼굴 사이의 갭이 여전히 완전히 소화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여기 앉아 있는 세 사람이 6개월 넘게 나와 함께 던전을 돌았던 그 파티원들이라는 사실만은,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의심이 사라진 자리에는 다른 종류의 낯섦이 들어와 앉았다. 익숙한데 낯선, 낯선데 익숙한 감각. 어느 쪽으로도 완전히 기울지 않는 그 애매한 균형이, 오늘 하루 종일 나를 붙잡고 있던 긴장의 실체였다는 걸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근데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유진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너 우리 셋이 검도부인 거 알고 있었어? 진짜로."
"전혀 몰랐어."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오늘 문 열고 들어와서야 알았어."
"그럼 우리가 게임에서 어떤 사람일 거라고 상상은 해봤어?"
그 질문에 순간 말이 막혔다.
상상해본 적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밤늦게 파티 채팅창을 보고 있으면, 이 문장들 뒤에 어떤 얼굴이 있을지 궁금했던 순간이 분명 있었다. 서연의 말투에서는 어른스러운 대학생을, 유진의 장난기에서는 또래보다 어린 얼굴을, 하늘의 다정함에서는 조용한 인상을 그려본 적도 있었다.
다만 그 상상들은 전부 얼굴 없는 그림자였을 뿐, 구체적인 형태를 가진 적은 없었다. 이름도 없고, 학교도 없고, 심지어 성별조차 확신할 수 없는 흐릿한 윤곽들.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하는 대신, 물잔을 만지며 대답을 미뤘다.
물잔 표면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손끝에 묻었다. 차가웠다.
"말 안 해도 알겠다." 유진이 짧게 웃었다. "상상도 못 했다는 거잖아."
"…어느 정도는."
"어느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못 했다는 얼굴인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서연이 그 틈을 타 시계를 확인했다. 손목에 채워진 시계는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였고, 초침이 유독 크게 돌아가는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슬슬 갈 시간 됐다." 서연이 말했다. "오늘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은데."
"벌써?" 하늘이 아쉬운 얼굴을 했다. "조금 더 있다 가면 안 돼?"
"검도부 저녁 훈련 있잖아." 서연이 답했다.
"오늘만 빠지면 안 돼?"
"안 돼. 관장님 눈 무서운 거 알잖아."
하늘이 입술을 살짝 삐죽였지만, 더는 조르지 않았다. 그 짧은 표정 변화 안에서도 나는 세 사람 사이에 이미 오래 쌓인 위계와 리듬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게임 안에서 파티장과 부파티원 사이에 있던 미묘한 서열이, 여기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겹쳐지고 있었다.
그 말에 나는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이 세 사람은 게임 속 파티원이면서, 동시에 학교 검도부 훈련 스케줄을 가진 현실의 학생들이었다.
두 세계가 완전히 다른 시간표로 굴러가고 있었는데, 그게 이 카페 안에서 우연히 겹쳐진 셈이었다. 밤 열 시가 넘어야 접속하던 파티원들이, 지금은 오후의 햇살 아래 교복도 아닌 사복을 입고 커피 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시간표 위에서는 절대 만날 수 없는 두 축이,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억지로 교차하고 있는 셈이었다.
의자를 미는 소리가 났다.
서연이 먼저 일어섰고, 유진과 하늘도 따라 가방을 챙겼다. 나는 남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미 다 식어서 미지근한 맛만 남아 있었다.
카페 문을 나서기 전, 서연이 나를 돌아봤다.
"다음에 또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서연이 말했다. 그 말투에는 특별한 무게가 실려 있지 않았다. 그냥 지나가는 인사처럼 가벼웠다.
하지만 나는 그 가벼움 뒤에 숨은 물음표를 놓치지 않았다. 다음이 있을지 없을지, 그것조차 아직 아무도 확답을 주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자." 나는 짧게 답했다.
유진이 손을 흔들었고, 하늘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웃어 보였다. 세 사람이 카페를 나서는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들의 걸음이 하나같이 군더더기 없이 곧다는 걸 눈여겨봤다. 검도부라는 정보를 몰랐을 때는 그냥 좋은 체형이라고만 생각했을 걸음걸이였는데, 지금은 그게 훈련에서 나온 자세라는 걸 알아버렸다.
알고 나면 다르게 보인다. 그건 언제나 그랬다.
카페 문이 닫히고, 유리창 너머로 세 사람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게 보였다.
그 겹침이 앞으로도 계속될지, 아니면 오늘 하루로 끝날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나는 빈 테이블에 혼자 남아 식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이상하게도 그 답을 알고 싶어졌다. 계산할 수 없는 변수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답이 나오지 않는 쪽을 오히려 바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