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카페 안은 오후의 볕이 창을 타고 들어와 테이블마다 얇은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근데 나 진짜 신기했어." 하늘이 두 손을 모으고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모에나 쓸 때, 진 오빠가 위험할 때마다 먼저 힐 넣어달라고 안 하고 그냥 자리 잡아주는 거 있잖아. 그게 되게 배려심 있어 보였거든."
오빠라는 호칭이 낯설게 들렸다. 게임에서 하늘은 나를 그냥 진이라고 불렀는데, 실제로 만나고 나니 학년 차이도 없는 동갑에게 오빠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붙는 게, 어쩐지 하늘의 성격 자체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상대를 편하게 만드는 말버릇, 누구에게나 존재감을 키워주는 습관.
생각해보면 게임 안에서도 하늘은 그랬다. 파티가 전멸할 위기에서도 “괜찮아 괜찮아, 이번엔 내가 실수했어”라며 분위기를 풀어주는 쪽이었고,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면 항상 누군가의 플레이를 짚어 칭찬하는 채팅을 남겼다. 그때는 그게 그냥 성격 좋은 유저의 습관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실물로 마주 앉아 보니 그 성격이 훨씬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런 거 아니야." 나는 반사적으로 부정했다. "쿨타임 계산상 그 위치가 최적이라서 그런 거야."
말이 나가고 나서야 그게 얼마나 계산적으로 들렸는지 깨달았다. 하늘은 오히려 그 대답이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거봐, 역시 계산왕이라니까." 하늘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우리끼리 그렇게 불렀어. 진 오빠는 크리티컬 확률까지 외우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계산왕이라는 말에 얼굴이 살짝 뜨거워졌다. 그 별명이 어느 채팅방에서 나왔는지는 몰라도, 셋이 나를 그렇게 불렀다는 사실 자체가 낯설고도 신기했다. 나는 그냥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을 뿐인데, 그게 남들 눈에는 캐릭터처럼 자리를 잡았던 모양이었다.
"12퍼센트, 배율 1.8배, 방어 관통 30퍼센트." 서연이 정확한 수치를 그대로 읊었다. "이거 맞지?"
순간 숫자를 들은 것만으로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걸 느꼈다. 낯선 얼굴들 사이에서도 익숙한 데이터가 하나 튀어나오자, 나는 다시 발밑에 지반이 생긴 듯한 감각을 받았다. 계산은 늘 나를 지켜주는 언어였다. 감정이 흔들릴 때마다, 숫자로 돌아가면 안심이 됐다.
서연이 저렇게 딱딱 끊어 말하는 스타일이라는 걸, 게임 안에서는 미처 몰랐다. 채팅으로는 그냥 정확하고 깔끔한 말투구나 정도로만 느꼈는데, 실제로 마주하니 그 정확함이 표정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웃을 때조차 눈매가 흐트러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그것까지 알아." 내가 물었다.
"네가 파티 채팅에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 서연이 웃으며 답했다. "우리도 다 외웠어. 덕분에 던전 몇 개는 확실히 편해졌고."
그 말에는 고마움이 섞여 있었다. 채팅에서 오갔던 그 짧은 숫자들이 이 세 사람에게는 하나의 전략서였다는 걸, 나는 처음으로 실감했다. 나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지식이, 실은 파티 전체를 지탱하는 뼈대로 쓰이고 있었던 셈이었다. 혼자 게임을 하면서 쌓았던 그 숫자들이, 화면 밖 누군가의 실제 전투에 그대로 쓰였다는 게 묘하게 뿌듯하면서도 낯설었다. 그런데 그 지식을 쓰는 사람들이 다름 아닌 우리 학교 검도부 3인방이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완전히 소화되지 않았다.
검도부. 복도에서 몇 번 마주쳤을 때는 그냥 운동부 특유의 절도 있는 걸음걸이와 짧은 인사만 오갔을 뿐, 이렇게 마주 앉아 게임 얘기를 나눌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죽도를 들고 도복을 입은 모습과 지금 카페에 앉아 크리티컬 확률을 외우는 모습이 머릿속에서 자꾸 겹쳐서, 나는 몇 번이나 그 간극을 조율하느라 애를 먹었다.
유진이 테이블 위에 놓인 내 휴대폰을 슬쩍 밀어 보며 말했다. "근데 너 표정 아까보다는 나아졌네. 처음엔 진짜 도망갈 줄 알았어."
"...티 났어?"
"많이." 유진이 짧게 답했다. 그 짧음 속에 담긴 관찰력이, 필드에서 함정을 먼저 발견하던 그 감각과 정확히 같았다. 나를 살피는 시선이 게임 안에서든 밖에서든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자,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유진은 게임 안에서도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파티원 중 누군가가 실수를 해도 나무라지 않았고, 그저 “다음엔 이렇게”라는 한 줄만 남기고 넘어가는 식이었다. 그 담백함이 오히려 신뢰를 쌓는 방식이라는 걸, 나는 오래 함께하면서 알게 됐다. 지금도 유진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한 문장이 나머지 모든 걸 대신 설명하고 있었다.
"도망 안 가서 다행이다." 하늘이 손을 뻗어 내 어깨를 톡 두드렸다. "오빠 없었으면 우리 셋이서 여기 앉아서 뭐 했겠어. 셋이서 게임 얘기만 하다가 어색해졌을걸."
그 말에는 진심이 섞여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에 미안함이 한 톨도 없는 경우를 나는 많이 봤지만, 지금 하늘의 말에는 반대로 고마움이 한 톨도 부족함 없이 담겨 있었다. 그게 나를 조금 더 편하게 만들었다.
테이블 위 얼음이 녹으면서 유리컵 안에서 잘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 작은 소리가 대화 사이의 침묵을 메워주는 것 같아서, 나는 잠깐 그 소리에만 집중했다. 낯선 자리에서 익숙한 소리를 붙잡는 버릇은 여전했다.
"근데 아까 그 얘기." 내가 유진을 향해 물었다. "컴퓨터부 애들이 물어봤다는 거, 진짜 걱정 안 해도 되는 거야?"
유진이 잠시 말이 없다가, 커피잔을 손끝으로 빙글 돌렸다. "모르지. 근데 우연이 셋 겹치면 그건 우연이 아니야. 지금까지는 하나였으니까 그냥 소문이었지만."
그 말이 왜인지 마음에 걸렸다. 지금은 하나의 우연일 뿐이지만, 이후에 다른 우연이 두 개 더 겹치면 그때는 소문이 아니라 확정된 사실이 된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계산이 머릿속에서 조용히 자리를 잡는 걸 느끼며, 유진의 얼굴을 다시 봤다. 두뇌파라는 평가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세 번째 우연은 뭔데." 나는 물었다.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창밖을 잠깐 바라보다가,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있으면 알게 될 거야." 유진이 말했다. "없으면 다행이고."
그 말이 마치 예고처럼 들렸다. 나는 커피잔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손끝이 차가운 유리에 닿아 있었는데도, 등줄기 어딘가는 미묘하게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하늘과 서연은 이미 다른 화제로 넘어가 있었다. 다음 주말에 있을 길드 레이드 얘기였다. 그 목소리들이 멀게 들렸다.
나는 유진의 마지막 말을 몇 번이나 속으로 되짚었다. 우연이 셋 겹치면 우연이 아니라던 그 문장이, 지금 이 순간에도 조용히 셈을 하고 있었다. 하나는 지나갔고, 둘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 둘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는, 나도 유진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