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앉아." 서연이 맞은편 의자를 살짝 밀어 보였다. 목소리에는 파티를 이끌 때의 그 신뢰감이 그대로 묻어 있었고, 나는 그 톤에 이끌려 자리에 앉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여전히 계산을 멈추지 못했다.
산의 검격 쿨타임 활용 능력. 보스 패턴을 외운 듯한 정확한 대응.
그게 검도부 에이스의 실전 감각에서 온 것이었다는 걸 알게 되자, 지난 던전들에서 위기마다 서연이 먼저 움직였던 이유가 뒤늦게 하나로 꿰어졌다. 3주 전 심연의 제단 레이드에서, 탱커가 도발을 놓치는 그 짧은 틈에 산이 먼저 몸을 던져 어그로를 끌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저 반응속도가 빠른 유저라고만 생각했다. 지금 보니 그건 반응속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상대의 다음 동작을 미리 읽어내는 감각, 그것도 수백 번의 대련을 거쳐야 몸에 새겨지는 감각이었다.
카페 창밖으로 늦은 오후의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와 테이블 위에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커피잔에서 올라오는 김이 그 빛 속을 가로지르며 흩어졌다.
"표정이 왜 그래." 유진이 커피잔을 든 채로 물었다. "고장 난 로봇 같은데."
그 말투는 채팅창의 짧은 문장들과 완벽하게 겹쳤다. 필요한 말만 하고 여백을 만드는 화법. 나는 대답을 고르다가,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물잔만 내려다봤다. 손에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차가운데도 손바닥은 뜨거웠다.
"나 산인 거, 진짜 몰랐어?" 서연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물었다.
"몰랐어." 짧게 대답했다. 정제되고 짧은 게 내 말투의 본질이었지만, 지금은 그것 말고 다른 말을 떠올릴 여유가 없었을 뿐이었다.
사실 몇 번 의심한 적은 있었다. 산의 대사 패턴이 학교에서 흔히 들을 법한 말투와는 미묘하게 다르다는 느낌, 존댓말과 반말을 넘나드는 방식이 어딘가 낯설다는 느낌. 하지만 그 느낌을 구체적인 얼굴로 바꿔 상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임 속 캐릭터에게 현실의 얼굴을 씌우는 일은, 애초에 내가 즐겨 하는 종류의 상상이 아니었다.
"게임에서는 완전 남자 목소리였는데." 하늘이 옆에서 킥킥거렸다. "보이스팩 바꿔서 쓴 거 알지? 서연이가 그거 진지하게 골랐잖아, 이상하게 들릴까 봐 걸린다고."
"들릴까 봐 걸린 게 아니라," 서연이 정정했다. "그냥 그게 더 자연스러웠어. 검을 쓰는 캐릭터니까."
그 대답에는 변명이 한 톨도 섞여 있지 않았다. 자연스러움을 택했다는 말 그대로, 서연은 그저 효율적인 선택을 한 것뿐이었다. 게임 안에서도 늘 그랬다. 감정보다 판단이 먼저 오는 사람. 파티원이 죽어가는 순간에도 소리를 지르는 대신 정확한 스킬 순서를 침착하게 채팅으로 찍어 보내는 사람.
나는 그 판단력의 뿌리가 검도부 에이스의 실전 감각이라는 걸 알게 된 뒤로, 서연을 다시 보게 됐다. 학교 체육관 복도에 걸린 대회 사진 속, 죽도를 든 채 무표정하게 서 있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진이었는데, 지금은 그 얼굴과 게임 속 산의 걸음걸이가 겹쳐 보였다.
갭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게임 속 산은 낮은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는 남성 검호였는데, 지금 내 앞에 있는 이서연은 한빛고에서 가장 키가 크고, 여학생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가진 얼굴이었다. 그 둘 사이의 거리를 재는 동안, 목이 살짝 뜨거워졌다. 이건 계산으로 설명이 안 되는 감각이었다.
정보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게, 나한테도 있었나. 그 사실이 낯설어서 오히려 더 오래 그 감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근데." 유진이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불쑥 말을 던졌다. "너 랭킹 3위인 거, 우리 학교 컴퓨터부 애들도 알던데."
숨이 순간 멈췄다. "그게 무슨 소리야."
"모르는 척은." 유진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공식 랭킹 페이지에 캐릭터명이랑 서버 다 뜨잖아. 누가 캐릭터명 검색해서 물어봤나 봐. '진'이라는 애 아냐고."
그 순간 머릿속에서 다시 계산이 시작됐다. 랭킹 3위, 캐릭터명 공개, 학교 내 소문 확산 가능성. 지금까지는 게임과 현실이 완전히 분리된 두 개의 세계였는데, 그 경계가 이미 학교 안에서부터 조금씩 갈라지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나만 몰랐던 균열이었다.
랭킹 페이지 접속자 수, 캐릭터명 검색 빈도, 소문이 도는 데 걸리는 평균 시간. 이런 것들을 따로따로 계산해봐도 답은 하나로 좁혀졌다. 이건 우연이 아니라 시간문제였다는 것.
"누가 물어봤는데?"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조금 낮아졌다.
"몰라." 유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지나가는 얘기였어. 근데 너 표정 보니까, 이거 진짜 신경 쓰이는구나."
짓궂은 웃음이 유진의 입가에 걸렸다. 채팅창에서는 절대 드러나지 않던 표정이었다. 그 갭이 또 한 번 목구멍을 조여왔다. 냉정하고 침착한 두뇌파라고만 생각했던 타마가, 실제로는 사람을 놀리는 데도 능숙하다는 걸, 나는 지금 처음 알았다.
게임 속 타마는 늘 파티의 손익을 정확하게 계산해서 알려주는 존재였다. 아이템 드롭률, 던전 효율, 시간 대비 경험치. 그 냉정함 뒤에 이런 장난기가 숨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캐릭터 하나에 사람 하나의 다면성을 다 담을 수 없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체감하니 느낌이 달랐다.
서연이 손을 들어 유진의 팔을 툭 쳤다. "그만 놀려. 얘 얼굴 하얘졌어."
"놀리는 거 아니야." 유진이 태연하게 받았다. "사실을 말한 거지."
사실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무겁게 들렸다. 나는 물잔을 다시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목구멍이 뜨거웠던 게 아니라, 이번에는 차가운 물이 그 자리를 지나가며 오히려 더 선명하게 열을 남기고 갔다.
컵을 내려놓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랭킹 페이지에 뜨는 캐릭터명, 그 아래 붙는 서버 정보, 거기서 시작될 수 있는 추적의 경로들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지워졌다 했다. 누군가 내 캐릭터명을 검색창에 입력하는 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손바닥에 다시 땀이 배었다.
하늘이 테이블 위에 팔을 괴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럼 우리 학교에 랭커가 셋이나 있다는 거 알려지면 어떻게 되는 거야? 완전 유명해지는 거 아니야?"
"유명해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서연이 낮게 말을 끊었다. "게임 안에서 하는 말이랑 학교에서 하는 말이 같아질 수 없다는 게 문제지."
그 말에 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서연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게임 속에서 명령을 내릴 때의 그 눈빛과 똑같았다. 필요한 정보만 정확하게 전달하는 눈빛, 그 안에 감정을 최대한 걷어낸 채로 사실만 남겨두려는 눈빛.
맞는 말이었다. 채팅창에서 나는 침착하고 계산적인 사람이었지만, 지금 이 테이블 앞에서는 손에 땀이 배고 목이 뜨거워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 간극을 누군가 알게 된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길드 안에서의 신뢰가 어떻게 흔들릴지, 나는 아직 셈을 끝내지 못했다.
유진이 커피를 한 입 마시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뭐, 당장 큰일 나는 건 아니야. 그냥 알아두라고. 소문이라는 게 원래 그렇게 조용히 시작되잖아."
조용히 시작된다는 말이 귓가에 오래 남았다. 우리가 지금까지 지켜온 경계, 게임 속의 이름과 현실의 얼굴 사이에 그어놓은 그 선이, 이미 어딘가에서부터 조금씩 지워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카페 안쪽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가 끝나고, 잠깐의 정적이 테이블 위로 내려앉았다. 그 정적 속에서 나는 서연의 얼굴을, 유진의 얼굴을, 그리고 여전히 킥킥거리는 하늘의 얼굴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이 셋 중 누군가가 나에 대해서도 이미 알아버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선명하게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