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왕궁 회복원 지하 3층, 환기도 잘 안 되는 이 좁은 진료실에서 아침마다 대기표를 뽑아 드는 게 내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는데, 눈을 뜨자마자 천장의 물 자국을 보며 '오늘도 무사히 퇴근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부터 드는 걸 보면 나는 이 삶에 완전히 적응한 게 분명했다. 그 물 자국은 언제부턴가 코끼리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날은 코 없는 사람 얼굴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오늘은 딱 봐도 우는 얼굴이었다. '그래, 나도 울고 싶다.' 나는 이불을 걷어차며 몸을 일으키고, 벽에 걸린 낡은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며 다크서클이 어제보다 한 뼘은 더 진해진 걸 확인했다. 이 세계에 화장품이라는 게 있긴 한데, 9급 회복사 월급으로는 언감생심이었다.
나는 회복사 라온, 왕궁 소속 9급 회복사이며 정식 명칭으로는 '외상 및 경상 처치반 소속 하급 치유인'이라는 길고 별 볼 일 없는 직함을 달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이 직함이 얼마나 별 볼 일 없는지는 급여를 받을 때마다 새삼 실감하게 되는 부분이었다. 정확히는, 급여를 받는 날이 오히려 우울해지는 몇 안 되는 날 중 하나였는데, 왜냐하면 급여표에 찍힌 숫자를 보는 순간 '이 세계에서도 나는 딱 이 정도 값어치구나' 하는 자각이 아프게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전생에 회사원이었을 때도 통장을 스칠 뿐인 월급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는 그 월급조차 은화 몇 닢으로 손에 쥐어져서 오히려 더 처량했다.
처음 이 세계에서 눈을 떴을 때, 나는 낯선 천장과 익숙한 냄새의 약초 향을 동시에 느끼며 잠시 혼란스러웠는데, 그 혼란은 오래가지 않았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빛의 색깔이 이상하게 낯설고, 몸을 일으키자 관절 마디마디가 삐걱거리는 느낌마저 생생했지만, 나는 그것보다 먼저 방구석에 놓인 화판에 그려진 그림 한 장에 눈이 갔다. '이거 금단의 사과잖아.' 성인용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발매 첫날 예약 구매로 리미티드 에디션까지 질러놓고 밤새 엔딩을 다 봤던 그 게임의 세계라는 걸 깨닫는 데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고, 나는 그 순간 이상하게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두근거렸다. '드디어 나도 이세계 주인공이구나.' 밤을 새워 클리어했던 그 수많은 루트들, 선택지 하나에 몇 시간씩 고민하던 그 시절이 떠오르면서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기까지 했다. 성벽 너머로 보이는 첨탑, 그 위로 날아가는 익룡 비슷한 무언가까지 완벽하게 게임 오프닝과 일치했으니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착각은 정확히 사흘 만에 깨졌는데, 게임 속 주인공인 검사 이안 별해의 이름이 왕궁 게시판 최상단에 큼지막하게 걸려 있는 걸 본 순간, 그리고 내 이름이 하급 인력 명단 맨 아래, 오타 하나 섞인 채로 붙어 있는 걸 확인한 순간, 나는 이 세계가 나에게 배정한 역할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버렸다. 명단에는 심지어 내 이름 '라온'이 '라옹'으로 잘못 찍혀 있었는데, 그걸 고쳐달라고 행정실에 세 번이나 찾아갔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회복 NPC. 그것도 신체 접촉이 있어야만 능력이 발동한다는, 게임 안에서는 그저 손 한번 스치는 이펙트로 끝났을 그 설정이 현실에서는 진짜 손바닥을 상처에 대야만 하는 물리적 접촉으로 구현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전생에 회사 다닐 때 야근하며 느꼈던 그 익숙한 피로감이 이 세계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는 걸 예감했다. 이펙트 한 줄로 끝나던 그 장면을 실제로 구현하려면 하루에 서른 명 넘는 사람의 몸에 직접 손을 대야 한다는 걸, 게임을 만든 제작사는 절대 몰랐을 거다.
"라온, 오늘 대기 몇 명이야?" 원장 손태술이 문을 벌컥 열며 물었을 때 나는 대기표 뭉치를 훑어보며 서른둘이라고 대답했는데, 그는 늘 그렇듯 뒷짐을 지고 서서 자신이 그렇게 인색한 사람은 아닌데 이번 달 예산이 워낙 빠듯해서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서두를 깔며 야근 수당은 없다고 통보했다. "내가 그렇게 짠 사람은 아닌데 말이야, 왕실 재정이라는 게 원래 그래." 이 사람은 항상 뭔가를 말하기 전에 자기 정당화를 먼저 하는 버릇이 있는데, 그 말이 나올 때마다 나는 속으로 '아니, 짠 거 맞는데요, 그리고 재정이 안 좋은 게 제 탓은 아닌데요' 라고 되받아치고 싶은 걸 삼켰다. 손태술은 내 표정을 읽었는지 못 읽었는지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는 다시 문을 닫고 사라졌는데, 그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저 사람은 저러다가 언젠가 노조가 생기면 제일 먼저 고발당할 유형'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이 세계에 노조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접수대에는 벌써부터 어깨가 빠졌다는 병사, 손목을 삔 시녀, 발목이 부었다는 마부까지 줄지어 서 있었고,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남의 몸에 손을 대며 회복 마법을 흘려 넣는 일을 반복했다. 병사는 어깨를 부여잡고 들어오면서도 "이거 별거 아닌데 그냥 슬쩍 대주기만 하면 되죠?" 하고 성의 없이 물었고, 나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어깨뼈 위치를 조심스럽게 맞춰가며 능력을 흘려보냈다. 시녀는 손목을 삔 채로 들어와서는 자기가 마차 문에 손이 끼었다는 사연을 굳이 설명했는데, 나는 '그 얘기가 치료에 필요한 정보는 아니지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마부는 발목이 부어서 절뚝거리며 들어왔고, 신발을 벗기는 과정에서부터 이미 땀 냄새가 진동했지만 나는 코를 막지 않고 담담하게 처치했다. 이상하게도 부드러운 부위, 이를테면 손목 안쪽이나 목덜미 같은 곳을 치료할 때는 유독 기운이 배로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엔 그저 예민한 신경 다발이 몰려 있어서 그런가 짐작했지만, 몇 달 겪어보니 그건 단순한 신체 구조 문제가 아니라 이 능력 자체가 부여받은 원초적인 페널티라는 걸 알게 됐다. '게임에서는 이런 세부 설정까지 다 있었나.' 아무리 공식 설정집을 뒤져봐도 그런 얘기는 없었으니, 이건 순전히 이 몸이 겪는 현실의 문제였다.
나는 손목이 삔 시녀의 팔목을 감싸 쥐며 능력을 흘려보내는 동안 유독 손끝이 저릿하게 떨려오는 걸 참았고, 시녀가 고맙다며 고개를 숙이고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도 온몸에 남은 피로감을 지우지 못했다. 진료실 안에는 늘 말린 약초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뒤섞여 있었는데, 그 냄새마저 오늘은 유독 무겁게 느껴져서 나는 잠깐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려다가 지하 3층에는 창문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한숨을 쉬었다.
오전 진료가 끝나갈 무렵, 동료인 규진이 옆자리에서 서류를 정리하다가 슬쩍 말을 걸어왔다. "라온, 너 오늘 얼굴이 반쪼가리네." 반쪼가리라는 표현이 딱 맞아서 나는 웃음도 안 나왔는데, 규진은 그런 나를 보며 낄낄 웃다가 자기 서류 뭉치를 뒤적이며 오늘 오후에 귀족 예약이 하나 잡혔다는 정보를 흘렸다. "게다가 이번엔 좀 특이한 케이스야." "뭔데." "이름이 특이하더라, 라엘린 설잎."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놓칠 뻔했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는 느낌이었고, 손끝이 서류철 모서리에 닿아 살짝 베인 것도 그제야 알았다.
라엘린 설잎, 그건 게임 '금단의 사과'의 공식 히로인 이름이었고, 금발의 엘프이자 이안 별해의 최애 파트너로 설정된 인물이었으며, 나는 밤새 그녀의 루트만 세 번을 클리어했던 전과가 있었다. 세 번째 클리어 때는 스킵 버튼도 안 누르고 대사 하나하나 다 읽었을 정도였으니, 나에게는 그저 게임 속 캐릭터가 아니라 나름의 애착이 담긴 이름이었다. '설마.' 대기 명단에 적힌 그 이름을 두 번, 세 번 다시 확인하면서도 나는 이게 정말 그 라엘린인지 반신반의했지만, 규진이 덧붙인 한마디에 나는 확신을 넘어 심장이 요동치는 걸 느꼈다. "엘프래, 금발에 눈이 옥빛이라던데." 규진은 별생각 없이 던진 정보였겠지만 나에게는 그 한마디가 벼락처럼 떨어졌다. 옥빛 눈동자, 금발, 엘프. 게임 오프닝 컷신에서 히로인이 처음 등장할 때 나오던 그 묘사와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그 순간 오후 예약 시간을 다시 확인하며, 이게 도대체 무슨 조화인지 알 수 없는 채로 마른 침을 삼켰다. 규진은 내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챘는지 "왜, 뭐 아는 사람이야?" 하고 물었지만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그저 시계만 노려보고 있었다. 오후 두 시. 그 이름이 접수대 명단에 올라오는 시간까지, 이제 겨우 세 시간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