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치료사님, 또 다치셨어요?

5화

서랍 속에 넣어둔 손수건을 사흘째 꺼냈다 넣었다 반복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스스로 이게 무슨 의미인지 규정하지 않은 채로 버티고 있었다. '이건 그냥 물건이야, 하트 자수가 있다고 해서 그게 나한테 하는 말은 아니잖아.' 그렇게 되뇌면서도 손끝이 자꾸 서랍 손잡이로 향하는 걸 보면, 나는 이미 답을 알면서 질문만 반복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게임이었다면 이쯤 인벤토리 창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도 어떤 숨겨진 이벤트 플래그가 뜨는 건 아닐까 의심할 법한 상황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여기는 현실이라 그런 편리한 알림창 같은 건 없었다. 진료실 한쪽에서 붕대를 감던 규진이 그런 나를 흘끔거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말을 걸었다. "라온, 너 요즘 서랍 되게 자주 열더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붕대 상자를 뒤적이며 시선을 피했지만, 규진이 그럴수록 더 재밌다는 얼굴로 다가오는 걸 보니 이건 이미 실패한 회피였다. "뭐 숨겨놓은 거 있어? 설마 그 엘프 아가씨가 준 거야?" 정확하게 맞춰버리는 규진의 감을 보면서, 나는 이 사람이 서류 정리만 하기엔 아까운 관찰력을 가졌다는 생각을 오늘도 새삼 했다. 이럴 거면 진작 첩보 부서로 보내달라고 상부에 항의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대충 헛기침으로 넘기려 했지만 규진은 이미 눈을 반짝이며 내 팔을 붙잡고 흔들었고, 붕대 상자가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나는 결국 손수건 이야기를 반쪼가리만 흘리는 선에서 항복했다. "손수건 하나 흘리고 가셨어. 그냥 돌려드리려는 거야." 그냥이라는 말에 힘을 잔뜩 줬지만 규진은 콧방귀를 뀌며 팔짱을 꼈다. "그냥이면 서랍에 왜 넣어놨는데. 그냥이면 벌써 돌려드렸겠지. 사흘이나 들고 있는 그냥이 세상에 어디 있어." 규진의 말투에는 이미 확신이 실려 있어서, 나는 반박할 말을 찾다가 그냥 실패했다. 할 말이 없어서 나는 서류철을 방패처럼 들어 얼굴을 가렸는데, 그 순간 진료실 문이 열리며 유하가 급하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유하는 숨이 살짝 가쁜 채로 문틀을 붙잡고 서서 우리 둘을 번갈아 보다가, 규진의 손이 아직도 내 팔뚝에 붙어 있는 걸 보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라온, 설잎 영애님이시래요. 오늘도." 오늘도, 라는 단어가 이렇게까지 심장을 흔들 일인가 싶었지만, 이제는 이 단어가 들릴 때마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걸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규진이 옆에서 낮게 휘파람을 불며 놀리는 눈빛을 보냈고, 심지어 손가락으로 조그맣게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이기까지 했는데, 나는 그걸 무시하고 서둘러 손을 씻으러 갔다. 세면대 앞에서 손을 문지르는 동안에도 심장은 여전히 이상한 박자로 뛰고 있었고, 나는 물이 손끝을 타고 흘러내리는 감각에 집중하려 애썼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진료대 위에 걸터앉은 라엘린은 오늘도 훈련복 위에 얇은 겉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흐트러진 금발 몇 가닥이 뺨에 붙어 있는 것마저 어느 화가가 일부러 배치한 것처럼 자연스러웠고,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무릎 쪽 붕대에서 옅게 핏자국이 배어 나오는 게 보였다. '무릎이라니, 이제 안 다친 곳이 없겠는데. 다음엔 뭐가 남았지, 발가락인가.'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무표정을 유지하며 다가갔다. "오늘은 무릎이시네요." 담담하게 묻자 라엘린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검문소에서 넘어졌어요. 별거 아닌데 자꾸 상처가 벌어져서." 별거 아니라는 말과 벌어진 상처가 같은 문장 안에 있는 게 이상했지만, 나는 이제 이런 모순을 캐묻는 게 내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애초에 국가에서 나에게 요구하는 건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이지 그 상처가 어떻게 생겼는지 신문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무릎을 감싼 붕대를 풀고 상처에 손을 대는 순간, 익숙한 온기가 손끝에서 퍼져 나가면서 상처가 서서히 아물어갔는데, 무릎 안쪽이라는 부위가 하필 부드러운 살결이라서 그런지 피로가 평소보다 두 배는 빠르게 몰려왔다. '이것도 원초적 페널티인가, 도대체 왜 이런 부위만 골라서 다치시는 겁니까. MP 소모율 좀 조정해달라고 어디 항의할 곳도 없고.' 속으로는 억울함이 치솟았지만 나는 그저 손끝에 힘을 주며 치료를 마무리했다. 이마에 식은땀이 살짝 배어 나오는 게 느껴졌지만, 그것도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숨을 고르게 쉬는 데 신경을 썼다. 상처가 완전히 아물자 라엘린이 무릎을 몇 번 굽혔다 펴며 확인하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 손을 뻗어 내 소매를 살짝 붙잡았다. "저, 혹시 제가 지난번에 뭘 흘리지 않았나요?" 손수건이라는 단어를 꺼내기도 전에 정확히 짚어내는 걸 보니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고,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접어둔 손수건을 꺼냈다. 사실은 아침에 챙겨오면서도 이걸 오늘 돌려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세 번은 고민했었는데, 그 고민이 무색하게 그녀가 먼저 물어봐 준 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맞으시죠?" 손수건을 내밀자 라엘린은 그것을 받는 대신 잠시 내 손 위에 놓인 천을 바라보다가, 뜻밖의 말을 했다. "그거, 라온 씨가 그냥 가지고 계셔도 돼요." 가지고 있어도 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나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고, 그저 손수건을 손에 든 채로 얼어붙었다. "제가... 이걸 왜요?" 최대한 자연스럽게 물으려 했지만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라엘린은 그 질문에 곧바로 답하지 않고 옥빛 눈으로 나를 잠깐 바라보다가, 다시 웃음으로 넘겨버렸다. "그냥요. 부담스러우시면 버리셔도 되고요." 부담스럽다는 말과 버려도 된다는 말 사이에서 나는 이 여자가 도대체 뭘 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건 게임 시나리오에도 없던 대사인데. 이럴 때 정답이 뭐야. 선택지라도 좀 띄워줘.' 나는 결국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손수건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는데, 그 모습을 본 라엘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걸 보니 이게 그녀가 원한 반응이었나 싶어 더 혼란스러워졌다. 진료대에서 내려온 라엘린은 겉옷을 정돈하며 문 쪽으로 향하다가, 문턱에서 잠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금발이 문틈으로 새어든 복도의 불빛에 반짝이는 순간이, 마치 누군가 일부러 조명을 맞춘 것처럼 보였다. "다음에는 다치지 않고 오는 게 목표예요." 목표라는 말에 나는 순간 안도해야 할지 서운해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고, 그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녀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규진이 즉시 진료실 구석에서 뛰쳐나오며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야, 너 방금 그거 봤어? '가지고 계셔도 돼요'래! 이거 완전 신호잖아!" 규진은 급기야 어깨를 붙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로 그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이상한 춤 같은 것까지 추기 시작했는데, 진료실 구석에 서 있던 유하가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게 시야에 걸렸다. 나는 규진의 손을 떼어내며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사실은 심장이 아까부터 계속 이상한 박자로 뛰고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이겠지. 영애님이 그런 사소한 걸로 뭘 신호를 보내겠어." 애써 그렇게 말했지만 목소리에 자신이 하나도 없어서, 규진이 다 안다는 듯 픽 웃는 걸 보고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유하가 슬쩍 다가와 "저도 그건 좀 이상했어요, 라온"이라고 한 마디 얹었을 땐 정말로 반박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다시 서랍을 열었을 때, 나는 손수건을 꺼내는 대신 그냥 그 위에 손을 올려놓은 채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창밖에서는 야간 순찰조의 발소리가 규칙적으로 지나가고 있었고, 나는 그 소리를 배경음처럼 들으며 손끝으로 서랍 안쪽의 나뭇결을 무의미하게 문질렀다. '이게 특별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특별한 게 되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이 스치는 순간, 나는 이 감정이 어디로 흘러갈지 이제는 궁금해서 잠이 오지 않는다는 걸 처음으로 자각했다. 국가 소속 치유사로서 하루 여덟 시간 근무에 야근수당도 제대로 안 나오는 처지에 이런 감정까지 떠안는 건 부당노동에 가깝다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그 생각조차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그녀의 옥빛 눈으로 돌아갔다. 창밖으로 왕궁의 야경이 흐릿하게 번지는 걸 보면서, 나는 내일도 그녀가 어딘가 다쳐서 이곳에 오기를, 이상하게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람이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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