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라엘린이 세 번째로 찾아온 건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이번엔 왼쪽 어깨에 자상을 입은 채였는데, 상처의 깊이를 보아 검문소 훈련이라는 게 진짜 훈련인지 아니면 실전을 방불케 하는 생지옥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이번에도 화사한 옷차림으로 나타났다. 어깨에 피가 배어 나오는 상황에서도 드레스 자락은 흐트러짐이 없었고, 머리카락 한 올까지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으니, 이건 부상병이 아니라 무도회 초청장을 든 귀족의 방문이라 해도 믿을 판이었다.
그 모습을 대기실 창문 너머로 먼저 발견한 규진이 나를 붙잡고 킬킬거렸다.
"저 정도로 자주 다치면서 만찬 준비는 다 하고 오는 거 보면, 진짜 사랑꾼이시네."
규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손으로 부채질하는 시늉까지 곁들였는데, 나는 그 과장된 몸짓을 보며 얘가 지금 근무 태만인지 순수한 오지랖인지 헷갈렸다. '내가 알 게 뭐야.' 속으로 대충 그렇게 정리하며 겉으로는 웃어넘겼지만,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콕콕 찔리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감정이 뭔지 굳이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아서 나는 서둘러 진료 도구를 챙기는 척 손을 바쁘게 놀렸다.
진료실로 들어온 그녀는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으며 어깨를 살짝 기울였고, 나는 상처를 확인하려고 옷깃을 젖혔다. 그 순간 목덜미 부근에 옅게 남은 오래된 흉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크지도 않고 눈에 띄지도 않는, 시간이 지나며 거의 살빛에 스며든 그 흉터는, 게임 설정집에서 언뜻 본 적 있는 그녀의 어린 시절 사건을 상징하는 표식이었다. '이것까지 똑같이 구현돼 있다니.' 나는 속으로 이 세계의 정교함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대사 한 줄, 삽화 한 장으로만 존재하던 설정이 실제 살아 있는 사람의 피부 위에 새겨져 있는 걸 보니, 이 세계가 게임이라는 감각이 점점 옅어지고 그 대신 이 여자가 정말 살아 숨 쉬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새삼 무겁게 느껴졌다. 설정집 속 활자로만 읽었던 고통이 지금 내 손끝 아래 실제 흉터로 만져지고 있다는 게, 생각보다 훨씬 낯설고 이상한 감각이었다.
"많이 놀라셨겠어요, 이때." 나는 손끝으로 흉터 주변을 살피며 무심코 한마디를 던졌다가, 이게 너무 사적인 질문일지 몰라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별다른 대답 없이 살짝 미소만 지었는데, 그 미소가 대답을 대신하는 것 같아서 나는 더 캐묻지 않고 소독약을 준비하는 데 집중했다.
어깨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그녀는 눈을 감고 조용히 있었다. 검을 다루는 사람답게 통증에 익숙한 건지, 아니면 그저 이 상황이 편안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신음 한 번 흘리지 않고 얌전히 앉아 있는 모습이 오히려 신기했다. 나는 소독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는 손을 움직이면서, 그 침묵이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보통 낯선 환자와의 진료는 침묵이 흐르면 괜히 헛기침을 하게 되거나 날씨 얘기라도 꺼내야 할 것 같은 압박이 있는데, 이 사람 앞에서는 그런 조바심이 들지 않았다. 그 사실이 나는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치료가 끝나갈 무렵, 붕대를 마지막으로 고정하려고 손끝에 힘을 주다가 저릿한 감각이 올라왔다. 손을 너무 오래 구부린 자세로 쓴 탓인지, 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런데 그 작은 숨소리를 그녀가 놓치지 않고 들었는지, 눈을 뜨며 나를 올려다봤다.
"많이 힘드시죠, 제가 자꾸 와서."
그 말투에는 미안함이 그대로 묻어 있어서, 나는 손을 떼며 별거 아니라는 듯 괜찮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로 넘어가지 않고, 여전히 미안한 기색을 지우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사실 검문소 훈련이 끝나면 바로 만찬에 가야 해서, 이렇게 옷을 갖춰 입고 오는 거예요. 시간이 없어서 갈아입을 틈도 없이 오는 거지,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에요."
그 말에 나는 규진의 짐작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는 걸 확인했다. 검문소에서 다치고, 그 몸으로 옷 갈아입을 시간도 없이 곧장 만찬장으로 가야 하는 일정이라니, 저 얇은 옷차림도 결국 시간에 쫓긴 결과였던 셈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도 개운하지가 않았다. '만찬 상대는 역시 이안이겠지.' 나는 그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스스로도 왜 이런 걸 신경 쓰고 있는지 몰라서 조금 당황했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붕대를 정리하며 손끝에 남은 미묘한 감정을 무시하려 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옷매를 정돈했다. 어깨를 조심스럽게 움직여 보더니 통증이 덜한 걸 확인하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문 쪽으로 몸을 돌리며 남긴 한마디에, 나는 정리하던 손을 멈췄다.
"그런데 요즘은 만찬보다 여기 오는 시간이 더 기다려지네요."
그 말이 던져진 순간 진료실 안의 공기가 잠깐 멈춘 것 같았다. 창밖에서 들려오던 새소리도, 대기실 쪽에서 규진이 뭔가를 떨어뜨리는 듯한 소음도 전부 배경으로 밀려나고, 그 문장만이 진료실 한복판에 덩그러니 남은 느낌이었다. 나는 그게 그냥 지나가는 인사말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가 담긴 말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를 배웅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떠난 뒤 나는 정리를 마치고도 한참을 진료실에 서서, 창문 너머로 그녀의 뒷모습이 왕궁 정원을 가로질러 사라지는 걸 지켜봤다. 걸음걸이마저 절제되어 있어서, 방금 어깨를 베인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멀어지는 그녀를 눈으로 좇다가, 문득 창틀 위에 얹힌 물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흘리고 간 손수건 한 장이었다.
나는 그걸 집어 들며 별생각 없이 펼쳐 보다가, 귀퉁이에 새겨진 작은 자수를 발견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건 하트 모양의 문장이었다. 정교하게 놓인 실 하나하나가 손끝에 걸리는 감촉으로 다가왔고, 나는 그 모양을 보며 반사적으로 머릿속에서 설정집의 페이지를 뒤적였다. '이거, 설마 가문 문장인가.' 게임 속에서 봤던 문양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정확히 일치하는 걸 떠올리지 못해서, 나는 그저 손끝으로 하트 문양을 몇 번이나 쓸어보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이상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손수건을 조심스럽게 접어 서랍에 넣었다.
그날 밤 잠들기 전까지, 나는 그 손수건을 서랍에 넣었다가 다시 꺼내보는 짓을 세 번이나 반복했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그냥 한 번 더 확인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이끌려서였다. 그리고 그 하트 문양이 정말 어느 가문의 문장이라면, 그건 단순한 우연으로 넘길 수 없는 무게를 가진 물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 생각을 끝내 결론짓지 못한 채 잠자리에 들었고, 이 사소한 밤샘 고민을 규진에게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