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야근 동기의 술버릇 비밀

3화

서지안이 실수를 하기 시작한 건 야근이 반복되면서부터였다. 처음엔 별생각 없었다. 사람이 지치면 실수를 하는 거고, 서지안도 사람이니까. 그렇게 넘겼다. "강도윤 씨, 이거 결재 서류 숫자가 안 맞는 것 같은데요." 박 대리가 서지안 자리로 서류를 던지듯 놓고 갔다. 종이가 책상 위에서 미끄러지며 파삭거리는 소리를 냈다. 서지안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숫자가 하나 밀려서 계약금 단위가 틀어져 있었다. 억 단위가 천만 단위로 둔갑해 있었다. 이거 그냥 넘어갔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다. "어제 술 마셔서..." 서지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제가 봐드릴게요." 나는 자리를 옮겨 서지안 모니터를 함께 봤다. 화면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니 서지안이 살짝 몸을 뒤로 뺐다. 그 반응이 뭔가 신경 쓰였지만 지금은 서류가 먼저였다. 오타 세 개, 숫자 오류 하나. 하나씩 짚어가며 고쳤다. 커서를 옮길 때마다 서지안의 시선이 내 손끝을 따라왔다. "고마워요." 서지안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부턴 마시고 나서 서류 넣지 마세요." "...네." 대답이 너무 순순해서 오히려 내가 당황했다. 원래 이렇게 순한 사람이었나. 술을 마시고 취해서 자신 없어진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관두었다. 남의 술버릇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서지안이 퇴근 전에 서류를 넣을 때마다 한 번 더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처음엔 그냥 불안해서 그런 거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근데 습관이라는 게 원래 그렇게 시작하는 거 아닌가. 별거 아닌 척 하다가 어느새 매일 하고 있는 거. 서지안도 눈치를 챘는지 아무 말 없이 넘어갔다. 가끔은 먼저 서류를 내 쪽으로 슬쩍 밀어두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받아서 확인했고, 서지안도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이상하게 그 침묵이 편했다. 어느 날은 서지안이 통계 자료를 잘못 취합해서 부서장 보고 직전에 큰일 날 뻔한 적도 있었다. 숫자 하나가 아니라 표 전체 항목이 뒤바뀌어 있었다. 보고 5분 전에 발견해서 정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거 지금 발견 안 했으면 큰일 났겠네요." "그러니까 제가 있잖아요." 무심코 나온 말이었다. 입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아, 이거 좀 재수 없게 들렸을까 싶었다. 서지안이 잠깐 나를 쳐다봤다. 눈빛이 이상하게 오래 머물렀다. 뭘 저렇게 보나 싶어서 괜히 시선을 돌렸다. "...고마워요, 진짜로." 그 말이 오래 귓가에 남았다. 집에 가서도, 씻으면서도, 자려고 누워서도 그 목소리가 계속 맴돌았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스스로가 좀 웃겼다. *** 계약과와 영업지원팀 합동 회식이 잡혔다. 인사이동 후 첫 회식이었다. 다들 어색하게 서로 눈치를 보며 자리를 잡았다. 노래방 대신 이번엔 볼링장이었다. 영업지원팀 팀장이 게임을 좋아했다. "오늘 꼴찌는 다음 회식 총무입니다." 다들 웅성거렸다. 누군가는 벌써부터 죽는소리를 냈고, 누군가는 신발 사이즈를 재느라 정신이 없었다. 첫판에서 나는 별생각 없이 공을 던졌다. 스트라이크. 핀이 쓰러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두 번째도 스트라이크. 세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이 조금씩 시끄러워졌다. "강도윤 씨, 이거 처음 아니죠?" 박 대리가 물었다.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대학 때 좀 쳤습니다."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뿌듯했다. 이런 걸로 이렇게 좋아할 일인가 싶으면서도. 결국 나는 그날 최고 점수를 기록했다. 다들 놀라며 손뼉을 쳤다. 어깨를 두드리는 사람도 있었고, 다음 판엔 자기 팀으로 오라며 농담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서지안이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뭔가 신기해하는 눈빛, 조금은 감탄한 듯한 눈빛. "강도윤 씨, 회사에서 이런 거 처음 보는데요." "숨겨놨었어요." "왜요?" "딱히 자랑할 일은 아니라서." 서지안이 피식 웃었다. "저는 되게 멋있는데." 멋있다는 말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아니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반응하나. 애써 다음 공을 던지는 데 집중했다. 결과는 거터였다. 공이 옆 레인 쪽으로 굴러가서 아무것도 못 맞췄다. "어우, 방금 그건 좀 별로였어요." 서지안이 큭큭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방금까지 멋있다고 해줬으면서 이제는 대놓고 웃는 이 낙차가 뭔가 억울했지만, 동시에 그 웃는 얼굴이 계속 눈에 밟혔다. 회식 자리 구석에서, 옆 팀 최 과장이 슬쩍 다가왔다. 손에는 이미 세 번째 잔인지 술이 담긴 컵을 흔들며. "두 사람, 요즘 야근 짝꿍이라더니 아주 척척이던데." "그냥 업무상 그런 겁니다." "업무상, 업무상." 최 과장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자리를 떴다. 뒤통수만 봐도 뭔가 재밌는 걸 발견했다는 표정이 느껴졌다. 서지안이 옆에서 못 들은 척했지만 표정이 미묘했다. 컵을 만지는 손가락이 괜히 바빠 보였다. 회식이 끝나고 둘이 나란히 지하철역으로 걸었다. 밤바람이 조금 차가웠다. 서지안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옷깃이 흔들렸다. "오늘 재밌었어요." 서지안이 말했다. "그러네요." "강도윤 씨는 회사에서 좀 더 티 내도 될 것 같은데." "뭘요." "잘하는 거요. 볼링도, 사람들 챙기는 것도."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그냥 웃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서지안의 옆얼굴을 슬쩍 봤다. 가로등 불빛에 볼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술 때문인지, 다른 이유인지 알 수 없었다. 걸음걸이도 평소보다 조금 느긋해 보였다. 역 입구 앞에 다다르자 서지안이 잠깐 멈춰 섰다. "저 여기서 갈아타야 돼서." "저는 이쪽이에요." "그럼 여기서 인사네요." "내일 봐요." 인사를 나누는 그 짧은 순간에도 서지안은 계속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아까와는 조금 다른 온도였다. 그때 서지안의 핸드폰이 울렸다. 딸랑, 하는 벨 소리가 조용한 골목에 크게 울렸다. 화면을 확인하는 서지안의 표정이 순간 딱딱해졌다. 방금까지 발갛던 볼이 순식간에 하얘졌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에요, 그냥." 서지안이 핸드폰을 가방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인사를 하고도,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그 얼굴이 계속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방금 화면에 뭐가 떴던 걸까. 이름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무엇이었을까. 집으로 가는 내내 그 짧은 순간이 자꾸 머릿속에서 되풀이됐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아무것도 아닌 표정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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