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날 이후로 서지안의 야근 시간이 조금 더 늘었다.
딱히 일이 늘어난 것도 아닌데.
처음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분기 마감이라 다들 정신없었으니까.
근데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일주일 내내 서지안은 가장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았다.
퇴근하라고 해도 서류 정리할 게 남았다며 손을 내저었다.
그 손짓이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나는 서지안이 뭔가를 피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정확히 뭘 피하는지는 몰랐다.
어쩌면 나를 피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가슴 한쪽이 조금 서늘해졌다.
하지만 물어볼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물어보는 순간 뭔가 무너질 것 같은 그런 느낌.
어느 늦은 밤, 사무실에 우리 둘만 남았다.
형광등 하나만 켜져 있는 사무실은 평소보다 훨씬 조용했다.
키보드 소리와 종이 넘기는 소리만 간간이 섞여 들렸다.
서류를 정리하다 서지안이 문득 입을 열었다.
"강도윤 씨, 저 이상하죠."
"뭐가요."
"회사에서는 이렇게 안 하는 사람인데."
서지안이 책상 위에 놓인 과자 봉지를 가리켰다.
야근할 때마다 몰래 사다 둔 과자였다.
포장지가 벌써 몇 번이나 뜯겼다가 다시 접힌 흔적이 보였다.
"이거 몰래 먹는 거 들키면 큰일 나요."
"왜요?"
"저 이미지가 있잖아요. 쿨하고 딱딱한 캐릭터."
서지안이 작게 웃었다.
웃음이 어딘가 서글퍼 보였다.
눈꼬리는 웃고 있는데, 눈동자는 웃지 않는 그런 얼굴.
"사실 저는 이런 거 진짜 좋아해요.
먹는 것도, 노래방도, 유치한 거요.
근데 회사에서는 그런 거 다 감춰야 하는 것 같았어요."
"왜 감춰야 해요."
"만만해 보이면 안 되니까요."
서지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순간 손끝이 과자 봉지를 꾹 눌렀다.
- "넌 좀 만만한 게 문제야."
오래된 목소리가 문득 떠올랐다.
누구 목소리인지, 언제 들은 건지도 모르겠는데 선명하게 귀에 박혔다.
서지안의 표정이 순간 흐려졌다.
"괜찮아요?"
"아, 네.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요."
서지안이 애써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얇아서, 조금만 세게 눌러도 부서질 것 같았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과자 봉지를 열어 하나 집어 먹었다.
바스락, 소리가 조용한 사무실에 크게 울렸다.
"저도 좋아해요, 이런 거."
"진짜요?"
"진짜로요. 서지안 씨 이런 모습, 나쁘지 않아요."
서지안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눈이 조금 커졌다.
속눈썹이 몇 번 느리게 접혔다가 펴졌다.
"...고마워요."
그 짧은 한 마디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그 순간, 서지안의 방어벽이 아주 조금 허물어진 것 같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과자 하나로 이렇게 사람 마음이 풀린다는 게 웃겼지만, 웃을 타이밍은 아니었다.
***
문제는 다음 날 터졌다.
출근하자마자 사무실 분위기가 미묘했다.
평소보다 사람들 시선이 나에게 자주 꽂혔다.
누군가는 눈을 마주치자마자 얼른 시선을 돌렸다.
박 대리가 나를 보며 눈짓을 했다.
손짓으로 잠깐 오라는 신호까지 보냈다.
"강도윤 씨, 소문 들었어요?"
"무슨 소문이요."
"둘이 요즘 심상찮다고, 다들 그러던데."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표정 관리를 해야 하는데 얼굴이 굳는 게 느껴졌다.
"업무상 야근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에이, 업무상은."
박 대리가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 웃음이 유독 신경에 걸렸다.
서지안은 그 대화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자기 자리에서 모니터만 보고 있었으니까.
이게 그냥 지나갈 소문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심시간, 상황이 더 커졌다.
타부서 여직원 몇 명이 휴게실에서 하는 얘기가 들렸다.
나는 커피를 뽑으러 갔다가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서지안 씨, 예전에도 그런 스캔들 있었잖아.
그 전 회사에서."
"진짜요? 몰랐어요."
"그때 그 남자랑 사귄다는 소문 났었는데, 결국..."
말이 끊겼다.
누군가 내가 지나가는 걸 본 모양이었다.
갑자기 조용해진 그 침묵이 오히려 더 크게 들렸다.
나는 못 들은 척하고 지나쳤다.
하지만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결국, 뒤에 무슨 말이 이어지려 했던 걸까.
궁금한데,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커피를 뽑는 손이 미묘하게 떨렸다.
종이컵을 너무 세게 쥐어서 살짝 찌그러졌다.
오후, 서지안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누군가 그 얘기를 서지안 본인에게도 흘린 모양이었다.
평소보다 타이핑 속도가 느려졌고, 몇 번이나 같은 문장을 지웠다 썼다.
"괜찮아요?"
작게 물었다.
"네, 괜찮아요."
대답은 짧고 딱딱했다.
예전 그 쿨한 목소리 그대로였다.
방어벽이 순식간에 다시 세워진 것 같았다.
어젯밤 과자 봉지를 사이에 두고 웃던 그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뭔가 더 물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놔둬야 하나 고민했다.
결론이 안 났다.
자리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유독 무거웠다.
퇴근 무렵, 낯선 이름의 이메일이 서지안 계정에 도착했다.
알림음이 딸랑, 울렸다.
발신자 이름을 본 순간 서지안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옆자리에서 힐끗 본 나조차 그 변화를 놓칠 수 없었다.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다시 닫혔다.
손끝이 마우스 위에서 멈춘 채 떨리고 있었다.
"이거 뭐예요?"
내가 물었다.
서지안은 대답 없이 화면을 껐다.
모니터 불빛이 사라지자 사무실이 갑자기 더 어두워진 것 같았다.
"별거 아니에요."
하지만 그 손은 이미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목소리도, 표정도, 아무리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숨길 수 없는 게 있었다.
나는 그 이름을 다시 떠올려봤다.
분명 처음 보는 이름이었는데, 왜 이렇게 낯설지 않은 걸까.
그 순간, 서지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방을 챙기는 손이 평소보다 두 배는 빨랐다.
"먼저 갈게요."
그 말을 남기고 서지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방금 꺼진 모니터를 한참 바라봤다.
저 안에 뭐가 들어있었는지,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