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교실에 남은 사람은 둘뿐이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 햇살이 책상 사이를 가로지르며 먼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는데, 서하윤은 그 빛을 손끝으로 휘저으며 가방을 챙기는 척 시간을 끌었다. 지퍼를 여닫는 소리가 필요 이상으로 오래 이어졌고, 책을 넣었다가 다시 꺼내 순서를 바꾸는 손짓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강지우는 창가에 걸터앉아 이어폰 한쪽을 귀에 꽂은 채 다른 한쪽을 하윤 쪽으로 늘어뜨려 놓고 있었고, 그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이어져 온 습관 같은 거리였다. 나눠 쓰는 이어폰, 나눠 먹는 우산, 나눠 앉는 그늘. 하윤은 그 거리 안에서 자라났고, 그 거리를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
교실 안은 조용했다. 청소 당번이 이미 다녀간 뒤라 바닥에는 물걸레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커튼 자락을 밀어냈다가 다시 끌어당기는 소리만 규칙적으로 반복되었다. 지우가 신고 있는 운동화 뒤축이 창턱에 부딕부딕 부딪히는 소리, 그 리듬이 하윤의 심장 박동보다 조금 더 느리게 흘렀다.
"오늘 학원 몇 시야." 지우가 이어폰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일곱 시." "늦었네." "응, 좀." 대답은 짧았지만, 하윤의 손끝은 가방끈을 필요 이상으로 세게 쥐고 있었다. 손톱이 끈의 섬유 사이를 파고들 정도였다.
엄마 손을 잡고 옆집에 처음 인사를 갔던 날, 지우는 아직 걷지도 못하는 아기였고 하윤은 그 옆에서 낯선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세 살이었다. 마루에 깔린 요 위에서 꼼지락거리던 작은 발, 그 발을 보며 하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이 아이가 앞으로 네 짝이야." 그때 엄마가 웃으며 했던 말을, 하윤은 잊은 적이 없었다. 그 말이 얼마나 무거운 의미였는지 그 시절엔 알 리 없었지만.
그 사실을 깨달았더라면 열여덟 살이 되어 이런 거짓말을 준비하는 저녁은 오지 않았을까.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것이다.
하윤은 숨을 한 번 고르고,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만들어내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도록 혀 밑에 침을 한 번 모았다가 삼켰다. "나 사실, 얼마 전에 고백했었어." 지우의 손가락이 이어폰 줄 위에서 멈췄다. 그 정지가 너무 정확해서, 마치 미리 정해둔 동작처럼 보였다. "누구한테." "그냥, 아는 애." "그래서." "차였어."
말이 끝나는 순간의 공기를, 하윤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창밖에서 들려오던 매미 울음이 그 짧은 침묵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지우의 눈동자가 순간 짙어졌다가, 다시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는 그 짧은 틈을 하윤은 놓치지 않고 보았다. 표정은 그대로였는데, 어딘가 서늘한 것이 그 얼굴 위로 얇게 덧씌워졌다. 마치 잘 마른 유리 위에 물기가 스치듯, 눈에 띄지 않게, 그러나 분명하게.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하윤 자신도 완전히는 알지 못했다. 다만 열여섯 해를 나란히 걸으면서도, 지우가 자신을 어떤 눈으로 보는지 단 한 번도 확신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어느 순간부터 참을 수 없이 무겁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매일 나눠 쓰는 이어폰의 온도, 매일 나눠 앉는 그늘의 넓이, 그런 것들로는 결코 잴 수 없는 마음이 있었다.
"누구야." 지우가 이어폰을 완전히 빼며 다시 물었다. 목소리가 아까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어폰 줄이 손가락 사이에서 팽팽하게 당겨졌다가 느슨하게 풀렸다. "말 안 할래." "왜." "그냥, 걔한테 미안해서." 거짓의 무게가 벌써부터 어깨를 짓눌러 오는 걸 느끼며, 하윤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운동장 저편에서 축구공을 튀기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소리마저 아득하게 멀었다.
지우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창턱에서 천천히 일어나, 이어폰을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줄이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채였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무섭다는 걸, 하윤은 이 순간에는 알지 못했다.
***
하교길, 두 사람은 늘 그렇듯 나란히 걸었다. 다만 평소보다 지우의 걸음이 반 보쯤 빨랐고, 그 반 보의 간격이 하윤에게는 처음 느껴보는 거리처럼 낯설었다. 늘어선 가로수 그늘이 두 사람의 발밑에서 번갈아 겹쳐졌다가 벌어졌는데, 그 간격이 자꾸만 지우 쪽으로 조금씩 더 벌어지는 것 같았다.
"화났어?" "아니." "근데 왜 그래." "뭐가." 지우는 앞만 보며 걸었고, 노을이 그 옆얼굴에 붉은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하윤은 그 옆얼굴을 몇 번이고 흘긋거렸지만, 지우의 눈동자는 한 번도 이쪽을 향하지 않았다.
편의점 앞을 지날 때, 늘 하던 것처럼 아이스크림을 사 먹자는 말이 목 끝에 걸렸다가 도로 삼켜졌다.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어 두 사람이 나란히 멈춰 섰을 때, 지우의 어깨가 하윤의 어깨와 스칠 듯 말 듯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예전엔 그 거리가 반드시 붙어 있었는데, 오늘은 그 사이로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갈 만큼 벌어져 있었다.
골목 어귀에서 두 집이 갈라지는 지점에 다다르자, 지우가 처음으로 멈춰 서서 하윤을 똑바로 보았다. 그 눈빛에 무슨 생각이 담겨 있는지, 하윤은 도무지 짚어낼 수 없었다. 짙은 갈색 눈동자 안에 노을빛이 얇게 어려 있었는데, 그 빛이 무언가를 감추기 위한 막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일 봐." 그 한마디만 남기고 지우는 자기 집 쪽으로 몸을 돌렸는데, 등을 보이며 걸어가는 그 뒷모습이 평소보다 훨씬 조용했다. 어깨의 각도, 걸음의 속도, 심지어 신발이 바닥을 딛는 소리까지, 모든 게 낯설게 느려져 있었다.
하윤은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잘한 걸까. 이게 정말로 그 마음을 확인하는 방법이었을까.
지우의 뒷모습이 골목 끝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하윤은 눈을 떼지 못했다.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자문에는 답이 없었다. 다만 가슴 한쪽이 아까부터 이상하게 뛰고 있다는 것만이, 유일하게 확실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이상한 박동 밑에, 무언가 되돌릴 수 없는 것을 이미 건드려버렸다는 예감이, 아주 얇게, 그러나 분명하게 깔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