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소꿉친구의 백번째 진심

2화

다음 날 아침, 교문 앞에서부터 지우가 서 있었다. 평소라면 하윤이 먼저 도착해 기다리는 쪽이었는데, 오늘은 반대였다. 등교 시간보다 십 분은 이르게, 교문 옆 화단 턱에 걸터앉아 휴대폰도 보지 않고 그저 정면만 응시하고 있는 지우의 모습이, 하윤은 어딘가 낯설게 느껴졌다. "일찍 왔네." "응." 지우는 짧게 대답하며 하윤의 가방끈을 슬쩍 잡아당겨 위치를 바로 잡아주었는데, 그 손짓이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세게 머물러 있었다. 손가락이 어깨선을 타고 내려가는 짧은 순간, 하윤은 겉옷 안쪽으로 스미는 서늘한 아침 공기와는 다른 온도를 느꼈다. 지우의 손끝은 차가웠고, 그 차가움이 어깨 위에 잠깐 눌어붙었다가 떠났다. "뭐야, 왜 그렇게 봐." "아니. 가자." 지우는 대답 대신 앞장서 걸었다. 하윤은 그 뒷모습을, 유난히 곧게 뻗은 어깨와 평소보다 반 박자 느린 걸음을 눈으로 좇으며 뒤따랐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하윤은 이상함을 감지했다.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쉬는 시간까지, 지우의 시선이 한 번도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필기를 하는 척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창밖을 보는 척 눈을 돌리고 있어도, 곁눈으로 느껴지는 시선의 방향은 늘 같은 곳을 향해 있었다. 매점에 갈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지우는 마치 그림자처럼 반 보 뒤에서 따라붙었다. "안 따라와도 되는데." "그냥 가는 거야." "우리 반대쪽인데." "오늘은 이쪽으로 가고 싶어서." 대답은 매번 짧았지만, 그 짧음 안에 뭔가 다른 것이 눌러 담겨 있다는 걸 하윤은 느꼈다. 손끝의 온도가 평소와 달랐고, 목소리의 질감이 어딘가 더 건조했다. 복도를 걸을 때마다 실내화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고, 그 소리 사이사이로 지우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섞여들었다. 평소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리듬이었는데, 오늘은 그 규칙성이 오히려 불안하게 다가왔다. 3교시가 끝난 뒤, 하윤이 물통에 물을 채우러 정수기 앞에 섰을 때도 지우는 두 걸음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물이 컵에 채워지는 소리만이 복도의 정적을 메웠다. "저기 볼일 있어서 그러는 거 아니지." "없어." "그럼." "그냥 보고 싶어서." 그 말은 너무 태연하게 나와서, 하윤은 순간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지우의 눈동자는 평소와 다름없이 짙은 갈색이었는데, 그 안에 담긴 빛의 각도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점심시간, 급식실 구석 자리에서 지우는 턱을 괸 채 하윤이 밥을 삼키는 모습을 하나하나 지켜보고 있었다. 젓가락으로 나물을 집어 올리는 손끝의 움직임까지도, 지우의 시선은 놓치지 않고 따라붙었다. "왜 그렇게 봐." "그냥." "불편해." "불편하라고 보는 거야." 그 말이 씹어삼키듯 낮게 흘러나왔을 때, 하윤은 젓가락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숨기려 국그릇을 더 세게 붙잡았다. 국물 위로 흔들리는 파문이 손의 떨림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줄까." 지우가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나 안 믿어. 그 얘기." 심장이 한 번, 크게 내려앉는 소리를 하윤은 분명히 들었다. "뭘." "고백했다가 차였다는 거." "진짜야." "그럼 증명해봐." 지우의 눈동자는 짙은 갈색이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유난히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조명 아래에서도 그 눈만은 그늘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증명을 어떻게 해." "백 번." "뭐?" "고백 연습, 백 번 해봐. 나한테. 그럼 믿어줄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웃어넘기려 했지만, 지우의 표정에는 웃음기가 조금도 없었다. 명령형에 가까운 그 제안 앞에서, 하윤은 순간적으로 판단력을 잃었다. 거절하면 거짓말이 더 의심받을 것 같았고, 받아들이면 이 위태로운 게임이 어디까지 굴러갈지 가늠할 수 없었다. 급식실의 소음이, 식판을 부딪는 소리와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갑자기 멀게 느껴졌다. 지우와 자신 사이에만 다른 공기가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런 걸 해야 돼." "내가 믿어야 하니까." "지우야." "싫으면 관두고. 근데 그럼 나는 계속 안 믿을 거야." 담담한 어조였지만, 그 안에 숨겨진 완고함이 하윤의 대답을 막았다. 지우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턱을 괸 채로, 답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침묵이 어떤 말보다 무겁게 하윤을 눌렀다. 문득 예전에 지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난 애매한 거 싫어해. 확실한 게 좋아." 그때는 그냥 지우다운 성격이라고만 생각했다. 지금 와서 그 말의 무게를 다시 느꼈더라면, 이 순간을 조금 다르게 받아들였을까.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것이다. 결국 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 하나로 자신이 무엇을 시작하게 된 건지, 그 순간엔 전혀 알지 못했다. *** 방과 후, 옥상으로 이어지는 계단 앞에서 지우가 규칙을 하나씩 읊었다. "하루에 한 번. 아무 때나. 진지하게. 장난치면 무효." "그걸 왜 네가 정해." "내가 심사위원이니까." 계단 위로 스며드는 오후의 빛이 지우의 옆얼굴에 얇게 걸쳐 있었다. 그 빛의 방향 때문인지, 지우의 표정은 반쪽만 드러나고 나머지 반쪽은 그늘에 잠겨 있었다. 하윤은 계단 난간에 손을 얹은 채 잠시 눈을 감았다. 손끝에 닿는 철제 난간이 유난히 차가웠다. 그 차가움을 붙잡고 있으면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을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오히려 손끝의 감각만 더 선명해질 뿐이었다. "첫 번째 해봐." 지우가 팔짱을 끼고 서서 기다렸다. 그 자세로 몇 초, 아니 몇십 초를 그대로 서 있었다. 재촉하는 말 한마디 없이도, 그 서 있는 모습 자체가 압박이었다. 하윤은 숨을 한 번 삼키고,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저기, 저 너 좋아해." 목소리가 갈라졌다. 계단통에 울리는 그 목소리가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게 들렸다. 지우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방금 건 무효." "왜." "진심 아닌 것 같아서." 그 말이 어떤 의미로 던져진 건지, 하윤은 알 수 없었다. 지우의 목소리에는 서운함도, 실망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평평하게, 판정을 내리듯 건조하게 흘러나온 문장이었다. 계단 창으로 들어오던 햇빛이 조금씩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그 빛을 등지고 선 지우의 그림자가, 하윤의 발끝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다만 그 순간부터, 이 백 번의 연습이 결코 가벼운 게임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만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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