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지우의 집에 갔던 건 우연이었다. 지우 어머니가 하윤에게 반찬 통을 가져다주라 부탁했고, 마침 지우는 학원에 가 있는 시간이었다. 현관문을 열어주는 지우 어머니의 손에는 늘 그랬듯 밑반찬이 담긴 통이 두세 개 겹쳐 들려 있었고, 김치 냄새와 참기름 냄새가 뒤섞여 좁은 복도에 번졌다.
"지우 방에 좀 놔주고 갈래? 엄마는 지금 나가봐야 해서." 그 말을 남기고 지우 어머니는 서둘러 나갔고, 하윤은 익숙한 손길로 지우의 방문을 열었다. 열여섯 해 동안 수백 번은 드나든 그 방이었다. 책장에 꽂힌 책의 순서까지 외울 수 있을 정도로 낯익은 공간인데도, 오늘따라 그 방은 처음 발을 들이는 곳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창문 틈으로 들어온 바람이 커튼을 흔들고 지나갔을 때, 하윤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방 안의 정적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책상 위, 늘 그 자리에 있던 낡은 다이어리가 살짝 열려 있었다. 원래는 손대지 않는 물건이었다. 지우가 그 다이어리를 얼마나 소중히 다루는지 하윤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표지를 넘겨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바람이 창문 틈으로 다시 한 번 불어들며 페이지를 넘겼고, 그 사이로 익숙한 글씨체가 언뜻 눈에 들어왔다. 하윤. 그 이름이 페이지마다 반복되고 있었다.
반찬 통을 책상 한쪽에 내려놓는 손끝이, 저절로 그 페이지를 향해 뻗어갔다. 읽으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하윤은 그 얇은 종이를 넘기고 있었다.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오늘도 하윤이는 아무것도 몰랐다.』 『언제까지 뒤에서만 봐야 하는 걸까.』 『걔가 누구 좋아하게 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문장들은 완결되지 않은 채 조각조각 흩어져 있었고, 그 조각들을 하나씩 맞춰갈수록 하윤의 손끝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 방 안의 온도는 그대로였는데도, 손끝에서 시작된 냉기가 팔목을 지나 어깨까지 슬금슬금 올라오는 것 같았다.
『열 살 때부터 알았던 것 같다.』 그 문장 아래, 지우의 필체가 유난히 흐트러져 있었다. 평소의 지우라면 절대 남기지 않을 삐뚤빼뚤한 글씨였다. 『근데 말하면 다 끝날 것 같아서 그냥 옆에만 있었다.』
하윤은 그 자리에 서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페이지를 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고, 그 떨림이 종이에도 그대로 옮겨가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지우를 짝사랑해온 것이라 믿었던 그 시간이, 실은 처음부터 짝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열 살. 그때가 언제였더라.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지우가 넘어진 하윤을 업고 보건실까지 뛰어갔던 그해였을까. 아니면 그보다 더 이전, 놀이터 미끄럼틀 아래서 둘이 처음 말을 섞었던 그해였을까. 하윤은 기억을 더듬으려 했지만, 머릿속은 온통 방금 읽은 문장들로 가득 차 있어서 아무것도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다이어리를 서둘러 원래 자리에 놓고 방을 나오는데, 현관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하윤은 애써 태연한 얼굴을 하려 했다. 지우였다. 학원이 예상보다 일찍 끝난 모양이었다.
"뭐해, 여기서." 지우가 신발을 벗으며 물었다. 목소리에는 별다른 의심이 담겨 있지 않았다. "어머니가 반찬 통 갖다드리라고 해서." "그래." 지우는 별다른 의심 없이 신발을 벗었지만, 하윤은 그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보지 못했다. 지우가 가방을 내려놓고 방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하윤은 그 방 안에 있는 다이어리가 마치 자신의 등 뒤에서 무언가를 계속 속삭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
다음 날 등굣길, 교문 앞에서 낯익은 얼굴이 하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1학년 박은서였다. 지난달 하윤에게 고백했다가 정중히 거절당한 아이. 하윤은 은서의 용기를 언제나 소중히 여겼지만, 그 마음을 받아줄 수는 없었다.
"선배." 은서가 밝게 웃으며 다가왔다. 교복 치마 아래로 드러난 무릎이 아침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났고, 손에는 늘 그렇듯 작은 간식 봉지가 들려 있었다. "저번에 거절당한 거, 이제 괜찮아요. 그래도 계속 좋아하는 건 제 마음이니까요." "은서야." "오늘도 같이 등교하면 안 돼요?"
그 순간, 옆에서 걸어오던 지우의 걸음이 뚜렷하게 느려졌다. 발소리가 아스팔트 위에서 뭔가에 걸린 것처럼 어긋났다. 은서가 하윤의 팔을 자연스럽게 붙잡으며 걷기 시작했고, 지우의 시선이 그 손 위에 오래 머물렀다.
"누구야." 교문을 지나며 지우가 낮게 물었다. 목소리에 서늘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평소라면 그냥 넘어갔을 질문인데, 오늘은 그 한마디에 유독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 1학년 후배." "친해?" "그냥 아는 사이야." "그래 보이진 않는데."
지우의 시선이 은서와 하윤 사이를 오가는 그 짧은 순간, 하윤은 처음으로 지우의 눈빛에서 명백한 무언가를 읽었다. 그것을 질투라고 불러도 되는지, 하윤은 확신할 수 없었다. 다이어리 속 문장들이 다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언제까지 뒤에서만 봐야 하는 걸까. 걔가 누구 좋아하게 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 그 문장이, 눈앞에서 그대로 일어나고 있는 건가.
은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여전히 하윤의 팔을 붙잡고 걸었고, 그 무심한 손길이 오히려 지우의 표정을 더 딱딱하게 만들고 있었다. 셋이 나란히 교문을 지나는 그 몇 걸음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침 공기는 차가웠고, 그 차가움 사이로 세 사람의 숨소리만 유독 선명하게 들렸다.
다만 그 순간부터, 세 사람 사이의 공기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온도로 바뀌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교실에 들어서서도 지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옆자리에 앉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았을 텐데, 오늘은 창밖만 바라보며 턱을 괴고 있었다. 그 옆얼굴이 유난히 멀게 느껴져서, 하윤은 몇 번이나 말을 걸려다 그만두었다.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 지우가 문득 고개를 돌려 하윤을 바라보았다. "그 후배, 자주 만나?" "아니, 그건 아닌데." "그래."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온도는 결코 짧지 않았다.
하윤은 그 눈빛을 마주하며, 어제 읽었던 다이어리의 문장들이 지금 이 순간과 겹쳐지는 것을 느꼈다. 지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하윤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침묵이, 이전의 어떤 침묵보다도 무겁게 느껴진다는 것만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