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소꿉친구의 백번째 진심

3화

삼 일이 지나는 동안, 하윤은 매일 한 번씩 고백을 뱉어야 했다. 첫날은 급식실 앞이었다. 식판을 든 채 줄을 서 있던 아이들 사이에서, 지우는 팔짱을 끼고 서서 하윤을 기다렸다. "여기서?" 하윤이 물었을 때, 지우는 대답 대신 눈짓만 했다. 결국 하윤은 식판을 내려놓고,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국물 냄새와 아이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그 말을 뱉어야 했다. "좋아해." 목소리가 갈라졌다. 지우는 팔짱을 풀지 않은 채 짧게 말했다. "무효." "왜." "목소리가 갈라졌잖아." 둘째 날은 계단 아래였다. 아무도 없는 시간을 골랐다고 생각했는데, 계단을 오르던 후배 몇이 지나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하윤은 그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지우를 마주 보았다. 계단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빛이 지우의 옆얼굴에 걸쳐 있었고, 그 빛이 지우의 눈동자 색을 유난히 옅게 만들었다. "좋아해." 이번엔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지우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무효." "이번엔 또 뭐가." "손이 떨렸어." 하윤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떨리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셋째 날, 학원 가는 버스 정류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버스가 두 대나 지나갔지만 지우는 타지 않았다. 정류장 벤치에 나란히 앉아, 하윤은 지나가는 차들의 헤드라이트를 세는 척하며 시간을 끌었다. 결국 지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 할 거야?" "할 거야." "그럼 해." 하윤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말했다. "좋아해." 지우는 이번에도 짧게 답했다. "무효." "오늘은 왜 또 무효야." "눈을 피했잖아." "안 피했어." "피했어." 사소한 말싸움이 반복될수록,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오히려 좁혀지는 것 같았는데, 그 좁혀짐이 하윤에게는 위안이면서도 동시에 공포였다. 무효의 기준이 매번 달랐다는 것을, 하윤은 뒤늦게 깨달았다. 목소리, 손, 눈, 그다음엔 또 무엇을 걸고넘어질까. 지우는 그 기준을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고, 알려줄 생각도 없어 보였다. *** 그날 오후, 교실 뒤편에서 여자아이들 몇이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고, 김소라도 그 무리 안에 있었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오후 빛이 아이들의 책상 위에 얇게 깔려 있었다. "근데 하윤이 요즘 지우한테 완전 붙잡혀 다니지 않아?" "어, 나도 봤어. 무슨 게임 같은 거 한다며." "게임?" "몰라, 고백 연습이라던데." 소라가 목소리를 낮추지 않은 채 그렇게 말했고, 그 말은 생각보다 멀리까지 퍼졌다. 소라가 무심코 던진 그 한마디에, 주변 아이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하윤 쪽으로 쏠렸다. 마침 교실로 들어서던 하윤은 그 시선의 무게를 정면으로 받아냈다. 문 앞에 멈춰 선 채로, 하윤은 자신의 이름이 누군가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의 그 서늘함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고백 연습이 뭔데." 한 아이가 웃음기 어린 얼굴로 물었다. "누구한테 차였다며. 그래서 연습하는 거야?" 옆에 있던 다른 아이도 흥미롭다는 듯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순간 하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걸, 소라는 그제야 눈치챘다. 아,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얼굴이었지만, 이미 뱉어진 말은 주워담을 수 없었다. 소라는 입을 다물었지만, 늦었다는 것을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 그게…" 하윤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완결되지 못한 문장으로 방치되었다. 시선이 사방에서 쏟아졌고, 그 시선들 사이에서 하윤은 무엇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거짓말이 거짓말인 것을 들키는 순간과, 진심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들키는 순간이 동시에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한테 차였는지 궁금하네." 다른 아이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을 던졌다. "설마 우리 반 애야?" 웃음소리가 번졌고, 그 웃음소리 하나하나가 하윤의 귀에는 날카로운 파편처럼 박혔다. 누군가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고, 누군가는 옆자리 아이의 어깨를 툭 치며 눈짓을 보냈다. 하윤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들이 겹쳐지면서, 정작 하윤 자신은 그 소리들 속에서 점점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하윤은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대답을 지어내야 했는데,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려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교실 바닥의 나뭇결이 유난히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고, 창밖에서 들리는 매미 울음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지우는 어디 있을까. 그 생각이 든 순간, 하윤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지우를 찾고 있었다. 왜 지금, 이 순간에 지우를 찾는 걸까. 그 물음에 답할 시간도 없이,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문 쪽에서 들려왔다. "뭐가 그렇게 궁금해." 지우였다. 교실 문에 몸을 기대선 채, 팔짱을 끼고 아이들을 훑어보는 그 시선에는 웃음기가 조금도 없었다. 교복 셔츠의 소매가 살짝 걷어 올려져 있었고, 그 아래로 드러난 손목에 오후 빛이 얇게 걸려 있었다. 순식간에 교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방금까지 웃던 아이들이 하나둘 시선을 피했고, 소라도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는 책상 위의 책을 괜히 뒤적였고, 누군가는 창밖을 바라보는 척했다. 지우가 굳이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는데도, 그 낮은 어조 하나가 교실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별거 아니었어." 지우가 그렇게 짧게 마무리하며 하윤에게로 다가왔는데, 그 걸음걸이가 유난히 빠르고, 유난히 곧았다. 걸어오는 동안 지우의 그림자가 교실 바닥을 길게 가로질렀고, 그 그림자가 하윤의 발끝에 닿을 때쯤, 지우는 이미 하윤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하윤은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안심이라고 하기엔, 지우의 표정이 너무나도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가자." 지우가 말했다. 명령형도 아니었고 권유도 아니었지만, 그 짧은 한마디에는 거절을 허락하지 않는 무언가가 배어 있었다. 하윤은 아무 말 없이 지우를 따라 교실을 나섰다. 복도로 나온 두 사람 사이에, 한동안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지우의 발걸음은 여전히 빠르고 곧았고, 하윤은 그 뒤를 반 걸음 늦게 따라가며 지우의 뒷모습만을 바라보았다. 좁은 어깨, 곧게 뻗은 목덜미, 그리고 그 아래로 드리운 짙은 그림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윤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계단 앞에 다다랐을 때, 지우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 눈빛이 평소와는 다르게 가라앉아 있었다. "소라가 그런 말을 어디서 들었을까." 지우가 물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건조했지만, 그 안에 무언가 다른 것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하윤은 그 질문의 의미를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뭐?" "고백 연습이라는 말." 지우의 시선이 하윤을 정면으로 향했다. "네가 누구한테 말했어?" 하윤의 심장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그 질문 뒤에 숨겨진 게 무엇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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