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다음 날 아침, 나는 눈을 뜨자마자 나침반을 노려봤다. 나침반은 눈이 없으니 노려봐도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습관이란 게 그렇다. 쓸데없는 줄 알면서도 그만두지 못하는 것들.
"말해봐. 뭔데." 나는 이불을 걷어차며 일어났다.
"위면." 나침반이 짧게 말했다.
"뭔 소리야."
"세상 밖에 또 다른 세상들이 있어. 문틈 같은 곳이지. 거길 순회하면서 이수의 혈맥을 모으면, 혈변경계가 뚫려." 바늘이 빙글 돌았다. "십 일 안에 몇 개는 돌 수 있을 거야.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달라서."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다르다는 게 무슨 말이야."
"거기서 하루가 여기선 한 시간일 수도 있고, 반대일 수도 있어."
"그러면 며칠 걸려도 상관없다는 거야?"
"상관없어. 대회 전까지만 돌아오면."
편리한 소리였다. 편리한 만큼 불안했다. 시간이 제멋대로 흐르는 곳에 몸을 던진다는 건, 돌아올 때쯤 뭔가 잘못될 확률도 그만큼 커진다는 뜻이니까.
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수라는 게 뭔지 대충은 알고 있었다. 인간형이 아닌, 짐승과 요괴의 중간쯤 되는 존재들. 그런 것들의 피를 모으라는 말이었다.
"싫어." 나는 딱 잘라 말했다.
"뭐?"
"목숨 걸고 짐승 사냥할 시간에 그냥 대회 안 나가면 안 되냐." 나는 진심이었다. 전생에도 이런 위험한 짓은 최대한 피하며 살았다. 목숨은 하나뿐이니까. 보험도 안 들어주는 세상에서 몸 사리는 건 기본 상식이다.
"불참하면 황가 명예가 걸려. 네 모후 위치가 흔들릴 거야." 나침반이 사무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하나 더."
"뭔데."
"이대로 있으면 성능력 봉인, 계속 유지야. 영구적으로."
순간 등줄기가 다시 서늘해졌다. 영구적. 그 두 글자가 뇌리에 박혔다.
"확실해? 그거 뭐, 협박 아니고?" 나는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다.
"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어."
없었다. 안타깝게도 없었다. 이 나침반은 늘 사실만 말했고, 그 사실이 늘 최악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갈게." 나는 결국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는 건 인정한다.
"진작 그럴 것을." 나침반의 바늘이 만족스럽게 한 바퀴 돌았다.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짐승을 잡으라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위면이라는 곳이 정확히 어떤 곳인지도 몰랐다. 나침반은 자세한 설명을 아꼈다. 그저 "가보면 알아"라는 말만 반복했다. 이런 무책임한 소리를 하는 물건에게 목숨을 맡겨야 하는 처지가 어이없었다.
"뭐라도 챙겨가야 하는 거 아냐? 무기 같은 거." 나는 옷을 갈아입으며 물었다.
"네 능력이 무기야."
"그 능력이 봉인돼 있잖아, 지금."
"…아." 나침반이 잠깐 침묵했다. "그럼 검이라도 챙겨."
"이제 와서?"
나는 결국 벽에 걸려 있던 검 한 자루를 챙겼다. 손에 쥐어보니 무겁고 낯설었다. 전생엔 이런 걸 잡아본 적이 없었다. 회사에서 쓰던 거라면 결재 도장 정도였지, 사람 죽이는 도구는 아니었으니까.
출발 전, 정원을 가로질러 가는 길에 뜻하지 않은 소동이 있었다.
"어머!" 짧은 비명이 들렸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정원 연못가에서 궁녀 하나가 옷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붉은 머리, 붉은 눈동자. 적호족 특유의 색이었다. 이름이 유설이라고 들었던 것 같다. 얼굴을 몇 번 스쳐 본 적은 있어도 말을 섞은 적은 없었다.
문제는 내 발밑에서 벌어졌다. 걷다가 무심코 바람 능력을 살짝 흘려버렸는데, 그게 하필 유설 쪽으로 몰려가 옷자락을 확 걷어 올린 것이다.
바람이 한 번 휘몰아치는 소리가 났다.
휙.
그리고 뒤이어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
"죄, 죄송합니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아니, 정확히는 다른 부위가 뜨거워지려다 곧바로 서늘해졌다. 봉인이 발동한 모양이었다. 이런 것도 딴짓으로 치는 건가. 남의 옷자락 좀 스쳤다고 이렇게까지 서늘해질 일인가.
"괜찮습니다, 황자님." 유설이 옷매를 다시 정돈하며 조용히 답했다. 목소리에 화가 실려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반갑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연하지.' 나는 속으로 자책했다.
"바람이 제멋대로라서요." 나는 궁색한 변명을 덧붙였다.
"바람이요." 유설이 나를 잠깐 응시했다. 붉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뭔가 더 말하려는 듯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이내 다시 다물렸다. 그리고는 별말 없이 자리를 떴다. 뒷모습이 꼿꼿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잠깐 멍하니 있었다. 뭘 잘못했는지는 알겠는데, 뭘 어떻게 사과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몰랐다. 궁 안의 예법이란 게 이럴 때 특히 복잡하게 느껴졌다.
"헛짚었네." 나침반이 등 뒤에서 툭 끼어들었다.
"어디서 나타났어." 나는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계속 있었지." 나침반은 태연했다. "근데 지금 저거 신경 쓸 때가 아닌데."
"뭘 헛짚었다는 거야."
"저 여자 반응. 화난 게 아니라 흥미로워하는 거였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난 다 알아. 그게 내 일이야."
믿음직스럽지 않은 만능이었다. 세상 밖 다른 세상은 자세히 설명 안 해주면서, 여자 마음은 또 척척 읽어내는 이 나침반의 우선순위가 궁금해졌다.
"알아, 아는데……" 나는 말을 흐렸다. 여자한테 관심을 보이면 봉인이 더 세게 걸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예감이 든다고 해서 마음이 그렇게 쉽게 정리되지는 않았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면 애초에 이런 고생을 안 했을 거다.
"이수 잡을 생각이나 해." 나침반이 재촉했다.
"내가 언제 딴생각했다고."
"방금까지 했잖아. 표정에 다 써 있었어."
표정 관리가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전생에는 회의실에서 상사 욕을 속으로 하면서도 겉으론 웃는 얼굴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기본적인 기술마저 녹슨 모양이었다. 몸이 바뀌면 표정도 바뀌는 건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우리는 궁 외곽의 오래된 정자로 향했다.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었다. 기둥에는 이끼가 껴 있었고, 지붕 한쪽 기와는 이미 깨진 채였다.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보였다. 이런 곳을 골라서 문을 여는 이유가 있을 텐데, 나침반은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왜 여기야." 나는 정자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기가 통하는 자리야. 아무 데서나 열리는 게 아니거든."
"그럼 진작 말했어야지."
"물어봤어야지."
말이 안 통했다. 이 나침반과 대화를 하다 보면 늘 이런 식으로 막다른 길에 몰리는 기분이었다. 질문을 안 하면 안 알려주고, 질문을 하면 뒤늦게 알려주면서 마치 내가 게을렀다는 투로 말한다. 얄미운 물건이다.
나침반이 그 위에서 빙글빙글 돌더니, 바늘 끝에서 옅은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준비됐어?" 나침반이 물었다.
"준비랄 게 있나." 나는 심호흡을 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떨고 있네."
"안 떨어."
"떨어. 눈으로 보이는데 뭘 아니래."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인정하는 것보단 침묵하는 게 나았다.
빛이 점점 커졌다. 정자 한가운데 바닥이 물결처럼 일렁이더니, 이내 검은 구멍이 열렸다. 안쪽에서 습한 바람이 새어 나왔다. 흙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짐승의 체취 같은 것도 섞여 있었다. 비릿하면서도 퀴퀴한, 오래된 우리 냄새 같은 것.
구멍의 가장자리가 조금씩 흔들렸다. 마치 물웅덩이에 돌을 던진 직후처럼, 파문이 계속해서 바깥으로 번져나갔다. 그 안쪽은 완전한 어둠이었다. 빛이 하나도 통과하지 않는, 그런 종류의 검은색.
"뛰어들어." 나침반이 말했다.
"지금?"
"지금."
"조금만 더 설명하고 가면 안 돼? 저 안에 뭐가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들어가면 알아."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게 이 물건의 특기였다. 매번 이런 식이다. 중요한 정보는 뒤로 미루고, 결정은 즉흥적으로 강요한다. 마치 계약서 세부조항은 서명 다 끝난 뒤에 보여주는 악덕 업체 같았다.
나는 눈을 질끔 감고 구멍을 향해 몸을 던졌다.
떨어지는 감각이 이어졌다. 위장이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고, 눈앞이 온통 검게 물들었다. 몸이 어느 방향으로 떨어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위인지 아래인지, 앞인지 뒤인지 구분이 안 됐다. 그냥 계속 떨어지고 있다는 감각만 남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체감상으론 아주 짧은 순간이었는데, 어쩌면 나침반이 말한 것처럼 시간의 흐름이 여기선 다르게 작동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리고 어디선가,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르르릉.
그것은 짐승의 소리였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숨을 죽였다. 눈은 아직 뜨지 못한 채였다. 발밑에 뭔가 단단한 것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 착지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몸을 움직이기도 전에, 그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이번엔 훨씬 가까웠다.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로.